최근 필자의 귀에 포착된 낯설고 수상한 유행어가 '국가의 품격'이다. 궁금하여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봤다. 제공된 잡다한 정보들을 대충 맞춰보니, 2005년 일본에서 출간된 같은 제목의 베스트셀러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7년 무렵 한국에 번역되었고, 그 후 '깜도 안 되는 좌파 정권'과 대비된 품위 있는(?) 보수주의적 지도력을 은근히 지지하는 논리로 뒷받침 되다가, 요즘에는 주로 이명박 정권의 국내외정책에 맞장구치는 추임새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시사용어임을 알게 되었다.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의 국가의 품격"이라는 신문제목이 이런 최신 용례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국가의 품격'이라는 용어가 필자의 귀에 거슬렸던 가장 큰 이유는 '국가주의 망령'의 부활과 그것이 동반할 폭력성과 시대착오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으리라. 천황주의·군국주의적 전통이 깊은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개념이라는 점도 꺼림칙하지만, '국가'라는 추상단어가 '품격'이라는 도덕적 개념과 조합하여 만든 의인화된 이미지가 겨냥하는 권력효과를 더 경계해야 한다. 무슨 뜻인지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국가'라는 무거운 단어에 개인과 나를 포함한 하찮은 이웃들이 짓밟히고, '품격'이라는 고귀한 가치에 빵과 일자리라는 통속적이지만 중요한 현안이 묻혀버릴 것을 염려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의 품격'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과 참을성을 요구하는 속임수로 오용됨에 유의해야 한다. 말하자면,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이겠다"고 맹세하기를 우격다짐했던 박정희 개발독재시대의 망령이 21세기 벽두에 더 흉한 꼴로 되살아났다고 나는 걱정한다.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앞장세우며 지배 권력층이 착하고 근면한 국민들을 꾀고, 꾸짖으며, 훈육하려고 했던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사수를 철석같이 약속하면서 한강철교를 파괴하고 멀리 부산까지 줄행랑을 쳤던 이 땅의 초대 대통령에 대한 나쁜 기억이 아련하다면, 아이들의 안전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를 원망하며 국가대표 운동선수로서 받았던 훈장을 반납하고 외국으로 이민을 떠난 어머니의 분노와 눈물을 잊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안보적 해이함과 정치경제적 무능력을 '국가의 품격'이라는 슬로건으로 감추고 그 뒤에 숨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의 이런 판단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위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졸지에 사랑하는 아들/삼촌/손자를 잃은 가족들이 "동물처럼 울부짖어" 선진국으로 향하는 국가를 망신시켰다는 현 경찰총장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은 돌발사태가 아니라, 집권층이 공유하는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정확하고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그리고 '강부자 정권'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에 오죽하면 중소 기업인들마저도 국가로부터 수여받은 수출 공로훈장들을 청와대 앞에 반납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을까. 이런 관점에서 관찰하면, 천박한 시장만능주의와 허울 좋은 세계화 사이에서 좌표를 잃고 좌초된 정권의 '생얼'을 숨기기 위한 화장술(레토릭)이 '국가의 품격'인 것이다.
다른 한편, 이 용어가 국민의 기본권을 방해하는 퇴행적인 논리로 악용될 위험도 있다. 아름다운 상부상조의 전통을 해치는 노동자와 사용자의 갈등을 원천봉쇄하고, 동방예의지국에 어긋나는 야간시위도 불법화하며,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흩트리는 여성권의 도전을 억압하는 무기로 변신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국민들이 마땅히 향유해야 할 자유를 간섭하고 침해하는 익명의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제한된 임기를 가진 실명의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명찰을 부착한 정부 관료와 검찰과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이 애써 지켜야 할 것은 '품격'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이며 국민들이 행복할 권리이다. 우리가 힘들게 노동하여 납부한 세금으로 부양되는 공복(公僕)들이 '국가의 품격'을 보호한다는 궤변으로 나의 일상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행위는 주제넘고도 어처구니없는 불법임을 세상천하가 다 알고 있다. 오호라, 오늘날 국가란 나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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