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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1월 서울 백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리영희 선생이 지인들의 방문에 활짝 웃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 백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리영희 선생이 지인들의 방문에 활짝 웃고 있다. ⓒ 권우성

삶이란 구름 한 편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구름 한 편 사라지는 것

뜬 구름 본시 그것 빈 것이어서

사람 몸 나고 죽음 다를 바 없네

그 중에 영거로운 그 무엇 하나

언제나 길이 길이 맑아 있나니

옛 사람 그것 일러 향수해(香水海)같고

길고 깊음 보타산(補陀山)과 같다 하였네

 

리영희 선생님 영전에 이 글을 바칩니다. 지은이 함허선사는 육신이 무너진 뒤에 따로이 "길고 긴 영물(靈物) 하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불교설화에 세계의 중앙에는 수미산이 있고, 그 주위에는 일곱 산, 일곱 향수 바다(향수해)가 둘러 있으며, 다시 그 밖에 짠맛 나는 큰 바다와 철위산이 있다고 합니다. '보타산'은 관세음보살이 계신 산을 일컫지요.

 

일편 구름처럼 생겼다가 꺼지는 것이 빈부귀천 불문의 인생사라면, 선생님께서는 적어도 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향수해'와 같고 '보타산'과 같은 존재이셨습니다. 육신은 가셨어도 남기신 정신과 업적은 향수해이고 보타산입니다.

 

선생님께서 이토록 서둘러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온 산에 낙엽지고 바람결 소슬한 이 적막 계절에 선생님은 가셨습니다. 병환이 깊으셔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토록 서둘러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선생님, 능력으로 보나 근면성으로 보나 맘만 먹으면 평생 몸과 마음과 가족이 편안할 수 있었는데도 평탄한 길을 택하지 않았고, 흔한 말로 부귀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권세'와 부족함 없는 생활 정도는 누릴 수 있었는데도 그것을 마다하고 험난한 길을 걸어 힘들게 사셨습니다. 이제 모두 잊고 평안한 영생을 누리십시오.

 

선생님, 깨끗한 인성과 맑은 이성으로 사악하고 추악한 우상들과 싸우기에 얼마나 힘들고 긴 고통의 세월이었습니까. 나이 들어 안일에 빠지거나 권부에 기웃대는 '원로'가 많은 세태에도 선생님께선 한결 같이 깨어있는 이성이었고, 행동하는 지성이셨습니다. 언론인·대학교수로서 추상과 관념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세계를 실증적으로 검증하고 분석하고 실천하셨습니다.

 

언론사에서 두 번, 대학에서 두 번 쫓겨나고, 전후 10여 차례 투옥과 1000일 넘은 옥살이를 하면서도 펜과 허리는 굽어지지 않았고 신념과 이성은 더욱 예리하셨지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자와 그들의 충용스러웠던 우상들을 상대로, 한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세월에 곁눈을 팔지 않고 싸워왔습니다.

 

다시 낯 두꺼운 우상들이 공권력을 휘두르며 이성을 겁박하는 시대에 선생님은 홀연히 떠나셨습니다. 많은 후학·후배들을 길렀지만, 아직 이성은 명료하지 못하고 논증은 철저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용기도 부족하고요. 하지만 선생님과 함께 성장한 4월혁명·부마항쟁·광주항쟁·6월항쟁·촛불항쟁으로 이어오는 이성의 세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암울한 세태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선생님

 

 지난 2006년 9월 50여년간의 연구와 집필생활을 마감하는 기념으로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리영희 선생이 웃고 있다.
지난 2006년 9월 50여년간의 연구와 집필생활을 마감하는 기념으로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리영희 선생이 웃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선생님은 맹목적이고 광신적이며 반이성적인 극우 반공주의에 마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의식을 바로잡아주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으셨지요.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무리들이 공권력을 남용하고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도저한 역사의 흐름을 언제까지 역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권력에 아부하면서 이권과 특혜를 누리는 '언롱인(言弄人)'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맑은 이성과 지성으로 정론을 펴는 진짜 '언론인'도 적지 않습니다. 학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당 말기·유신말기·5공 말기를 역사는 기록하고 기억합니다.

 

선생님, 정의와 불의, 이성과 몽매가 전도되는 사회상을 지켜보면서 사마천의 울부짖음, "천도(天道)는 과연 있는가"를 새삼 묻게 됩니다. 독재자·친일세력·어용 지식인·언론의 탈을 쓴 곡필배들의 건재와 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의 병마·가난·소외를 대비하면서 '천도'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고통의 세월을 보낼 때 호의호식하며 곡필을 휘둘렀던 자들은 모두 저렇게 배 두들기며 포만을 즐기는데, 선생님은 복수에 찬 물을 뽑아내는 고통 끝에 결국 운명하셨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 정직하지 못한 천도가 야속합니다.

 

선생님은 암울한 세태에서도 역사의 진보를 낙관하시며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긴 안목으로 보면 역사는 정의의 편이고 천도의 거역자는 징벌을 받는다고 '업보'를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인류사·역사가 진행된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선 깨어있는 스승이고 진정한 원로셨습니다

 

선생님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남달랐습니다. 이북이 고향이라 벌이는 '고향 찾기' 수준의 노스탤지어가 아닌 민족에 대한 애정이고 겨레사랑의 표상이었습니다.

 

"한겨레는 갈라져서 살 수 없다. 안으로는 대립의 요소들을 해소하고 밖으로는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조건들을 꾸준히 극복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이 그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다른 누가 그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줄 것이며, 그 험난한 길을 대신 걸어줄 것인가?" - <대화>(2005, 한길사)

 

수구세력의 극단적 좌파 매도와 민주진보세력을 용공친북으로 이념화한데 대해 선생님은<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자연현상을 들어 설명하셨지요.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 날개(좌익)와 오른쪽 날개(우익)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원리가 아닐까? 왼쪽의 날개로만 날아다니는 새를 보고 싶다. 마찬가지로 오른쪽 날개 하나로만 날아다니는 새를 보고 싶다. 그런 외날개 새를 한번 볼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다."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지난 2003년 3월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열린 이라크전 파병 반대집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리영희 선생(가운데).
지난 2003년 3월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열린 이라크전 파병 반대집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리영희 선생(가운데). ⓒ 오마이뉴스 남소연

선생님의 평전을 쓰느라고 지난날 발표하신 많은 글을 다시 읽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거듭  고난의 생애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선 감내하기 어려운 핍박과 가난 속에서도 신념과 절의를 지키셨고 우상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존경받는 원로가 드문 현실에서 선생님은 진정 깨어있는 사람들의 벗이고 스승이고 진정한 원로이셨습니다.

 

지난 8월 말 병환 중에 저와 나눈 대담이 사실상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으니, 보람이고 한편으로는 슬픔입니다. 그리 빨리 가실 줄 알았으면 자주 뵙고, 더 많이 묻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선생님, 편안히 가십시오. 지난 세월 불의의 시대에 이 땅의 지식인으로서 책임과 역할과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이제 바통을 후학·후배들에게 맡겨주십시오. "족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則不胎)"라고 말씀하셨지요.

 

국화꽃 향기와 함께 선생님 영전에 삼가 바칩니다.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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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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