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치옥이 궁을 나온 후, 관상감의 높은 관직에 있던 오창하 부정(副正)의 호출을 받았었다. 그곳은 견평방에 위치한 '내외술집'으로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엔 더없는 장소였다.
평소 관상감 쪽과 교분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궁을 나오는 자신에게 할 얘기가 있다는 훈도(訓導)의 말에 실연기처럼 일어나는 의혹을 꾸욱 눌러 뒷전에 감추며 술자리에 마주앉았다.
"남별감을 보자 한 것은 장지(葬地) 때문이오.""장지라니오?"
"어느 후손이건 제 부모 묘역은 좋은 자릴 찾으려 들지 않겠소. 손이 귀한 집이면 자손들이 쑥쑥 태어나는 산구형(産狗形)이 좋을 것 같고, 아들이나 딸이 그런대로 있는 집안이라면 관직에 나갈 좋은 터를 찾을 것이오. 남별감은 기억하는지 모르겠네만, 자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내가 감여(堪輿)를 보내 자넬 거들게 했었네." "감여를 보내요? 누굴···."
"관상감의 참봉(參奉)으로, 좋은 혈을 찾는 데 일가견 있는 최감여네. 자식을 주렁주렁 낳을 자릴 일러주겠다 하자 자넨 자식을 쌍(雙)으로 갖고 싶다 하여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을 부친의 장지로 썼잖은가."그 말에 남별감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잊고 있었던, 아니 잊어야 하는 그 당시의 일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부모를 좋은 곳에 모신다는 건 후손들이 복 받기 위해서지만 개나 돼지처럼 자손만 많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열 아들을 낳아 평범하게 키우기 보단 하나라도 좋으니 장원급제에 어사화 꽂고 벼슬길에 나갔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게 안 될 일이라는 건 이미 알았다.
자신이 중인(中人)이니 양반들의 노리갯감인 과거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날 최감여는 그 점을 건드리며 목소릴 깔았다.
"반드시 비룡승천의 자리만 좋은 건 아니지요. 남별감은 중인이니 '푸른 산에 누에나방이 붙어있는 비아부벽형(飛蛾附壁形)'이 나 '어옹수조형(漁翁垂釣形)',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도 좋습니다.""그런 자린, 장지로 쓰면 모두 복 받을 수 있는가?"
"그건 아닙니다.""아니라?"
"비아부벽형은 혈지 앞에 꽃가지가 있어야 하고 뒤쪽엔 봄바람을 몰아쳐 오는 부채가 있어야만 복이 일어납니다. 어옹수조형은 앞뒤로 물고기 모양의 사(砂)가 있어야 좋고, 갈마음수형은 혈의 앞에 연못이 있으면 길합니다. 먼 길을 달려온 말은 몹시 목이 타므로 혈 앞에 물이 있는 걸 길지로 여깁니다. 이런 혈이 남별감께 적당한 혈자리라 봅니다."남치옥은 상대의 말을 별반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자신 부친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산동의 한 자리에 미련이 남아있었다.
이곳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관계있었다. 그는 스물일곱에 생원시에 장원했고 두 해 뒤인 1635년엔 후일 효종이 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로 임명됐다.
대략 일 년 여의 사부생활을 했으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자 벼슬을 사임하고 학문에만 몰두하다가 그 후 벼슬길에 나갔으나 김자점 일파의 잔꾀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89년 숙의 장씨가 아들을 낳자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에 유배됐다가 서울로 압송된 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서인이 정권을 잡자 수원을 비롯해 정읍·청주 등지에 그를 배향하는 사원이 생겨 그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게 되었는데 그의 무덤은 수원에 있다가 훗날 충청북도 청산동으로 옮겨졌다. 그곳이 바로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이다. 남치옥은 그런 혈지에 대해 관심을 나타냈는데 최감여가 난색을 나타냈다.
"장군대좌형은 묘 주위에 병졸이 있어야 발복하는 곳이니 후손들의 발복을 바라는 자리로선 너무 눈에 띕니다. 잘못 하다간 반역을 꿈꾸는 역도로 몰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그럼, 어쩐다?"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으나 단숨에 반역도로 몰릴 수 있는 위험은 피해야 했다. 남치옥은 어릴 때 전북 익산에서 잠시 지낸 적이 있었다. 서쪽엔 미륵산, 동으론 용화산이 있는데 이곳 산간 마을에서 바라뵈는 미륵산이 여인의 생식기를 닮아 옥녀개화형(玉女開花形)이나 옥녀만개형(玉女滿開形)으로 불러야 하나 미륵산이 워낙 유명한 까닭에 연화반개형(蓮花半開形)으로 불린다. 이곳에 대해 최감여는 자신의 생각을 내놓는다.
"남별감이 지냈다는 그 자린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라고도 해요. 여자가 화장을 위해 머릴 풀어헤치고 있는 모습이니, 그렇게 하자면 분갑 기름과 화장대도 있어야 합니다." 여자가 화장을 하기 위한 자세이므로 발복이 일어날 수 있는 명당이 되려면 거울과 분갑기름이 있어야 했다.
어느 얼풍수가 남치옥에게 말한 얘긴 이곳에 물이 없으니 우물을 파라고 권했었다. 얼풍수는 이 자릴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혈지는 옥녀가 비단을 짜듯 인재를 배출하는 형으로 물이 있어야 좋지만, 그렇지 않고 보니 우물을 파라는 것이었다. 남치옥은 이곳이냐 저곳이냐를 결정치 못했을 때 최감여는 목소릴 낮췄다.
"관상감에 몸을 담고 있으니 좋은 혈지를 찾아 나서는 게 내가 하는 일이오. 몇 해 전에도 수원과 용인 지역을 샅샅이 뒤졌는데 예기치 않게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을 찾아내지 않았습니까."최감여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고 나서 목소리를 깔았다.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이런 자린 용이 승천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이런 곳에 무덤을 쓰면 후손은 고관대작이 되지만 중인(中人)의 신분인 그가 택할 자린 아니었다. 그러나 최감여는 의미있는 웃음을 입가로 흘렸다.
"양반들은 자신들만이 좋은 길지를 쓰기 위해 온갖 문자로써 이런 저런 말을 하지요. 봉황과 용은 제왕의 자리라고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중인들도 얼마든지 그런 자릴 꿰찰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용이 신령한 조활 부릴 수 있게 하는 여의주가 '호주(狐珠)'인 까닭이지요.""호주?"
"그렇습니다. 여우의 뱃속에 든 구슬이니 얼마나 조화를 잘 부리겠습니까. 그러니 그곳을 남별감의 부친 장지로 사용하세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곳은 장차 후손들에게 큰 복록을 가져옵니다."그런 연유로 최감여가 권한 자릴 부친의 장지로 삼은 남치옥은 크고 작은 참변이 일어났을 때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지만 자식이 들어차지 않은 것이 못내 섭섭했다.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을 부친의 장지로 삼은 건 나라에서 절대 써선 안 될 자리라고 못 박은 곳이었기에 지금껏 찜찜해 온 건 사실이었다. 오창하는 얘기의 방향을 틀었다.
"남별감이 그곳을 장지로 쓴 그 자리에 대해, 오늘 조아(朝衙)가 열리자 상감께서 정약용을 불러 <금시조(金翅鳥)에 대해 조사를 당부하셨네.""금시조라니오?"
"용을 잡아먹는다는 새 말이네. 그 새의 그림을 사도세자가 궁으로 가져온 건 보윌 찬탈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 했네. 사나운 새의 공격을 피하려면 토굴을 파고 지내라던 풍수사의 가르침에 따라 사도세자께선 그러하지 않았는가.""그랬지요."
"그게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일로 풍수사의 허언이 아니라 깊은 음모가 숨어있는 계책이란 거지. 상감께선 관상감의 능력있는 풍수사들을 은밀히 잡아들였는데 어딜 어떻게 건드렸는지 몰라도 정순왕후께서 크게 노하신 것이야. 그래서 상감께선 정약용을 불러 은밀히 당부하신 것이네.""무···얼···?"
"<금시조>가 사도세자의 살았을 때 운이면 <뇌공도(雷公圖)>는 죽었을 때의 운이니 그걸 조사하라는 게지. 무엇보다 <뇌공도>를 그린 김덕성 화원의 소재부터 찾으란 어명이 있었네.""이유가 뭘까요?"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천둥이 울고 번개가 치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 정도였네. 사도세자의 나들이 때 동행하던 김덕성 화원이 <벽화지매(壁畵枝梅)>를 그리고, 세자가 가장 두려워하던 천둥과 번개의 뇌신(雷神)인 <뇌공도>를 그렸는지 모를 일이네. 해서···, 당장에라도 화원을 만나 연유를 들어보고 싶은데, 그 자가 자네 집에 식객으로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만날 수 있겠지?""그 화원은 지금 사헌부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사헌부에?""예에."
"내가 여기 온 건 정순왕후 명을 받아서네. 마마께서 그 화원에게 <벽화지매>와 <뇌공도>를 그리게 했다는 불손한 소문 때문이지. 그림으로 인해 사도세자가 역모에 휩쓸렸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무덤을 소란케 하는 그림이 나타났으니 이것은 누군가 정순왕후와 세자를 노리고 저지른 일이 분명하다는 게지. 해서, 마마께선 나를 급히 보내신 것이네.""아, 예에."
"그 일을 지금 정약용이 조사한다지 않은가!"
[주]
∎감여(堪輿) ; 풍수사
∎조아(朝衙) ; 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