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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에 놀란 어린 가슴들이 한 데 모였다고 한다. 인천 영어마을에 집단 입소한 것이다.

 

인천시교육청은 연평도 피란민들의 임시 숙소인 한 찜질방에서 지내던 초중고생 100여 명을 지난 29일 영어마을에 입소시켰다. 영어몰입교육을 위해 만든 영어마을에서 5박 6일간 먹이고 재우며 영어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한 곳에서 함께 공부하도록 해 달라'는 찜질방 부모들의 부탁을 들어준 결과란다.

 

원어민 수업 듣고 얼굴 활짝 폈다?

 

 <중앙일보> 30일치 16면 머리기사.
<중앙일보> 30일치 16면 머리기사. ⓒ 중앙일보 PDF

다음은 이에 대한 <중앙일보> "'전쟁 공포' 짓눌린 아이들, 원어민 수업 듣고 얼굴 활짝"이란 제목의 기사(30일치) 앞부분이다.

 

"뚜껑 열린 차를 영어로 뭐라고 할까요?"

"우리 아빠 차요."

 

29일 오후 인천시 서구 당하동의 인천영어마을. 연평도 아이들이 모처럼 포탄의 공포를 잊고 웃었다. 초등학교 1, 2학년 16명이 배정된 반에서 선생님이 '스포츠카'에 대해 묻자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의 대답이 우렁차다. 뚜껑 없는 아빠의 트럭이 아이들 눈에는 곧 스포츠 카였다.

 

하지만 나는 '원어민 수업 듣고 얼굴이 활짝 펴졌다'는 식의 위 보도내용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영어마을 입소에 대해 호의적인 보도를 한 대부분의 언론 보도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왜 하필 영어마을 입소인가? 학교 영어교육도 받아보지 못한 초등 1학년생 앞에서 '뚜껑 열린 차를 영어로 말하라'는 원어민의 교육이 가당키나 한 행동일까? 더구나 이들은 대포 소리에 짓눌린 여린 가슴을 지닌 아이들이 아닌가.

 

공포에 짓눌린 어린 영혼, '영포아' 우려

 

영어마을은 미국 마을을 본떠 학교, 우체국, 공항, 상점 따위를 가상으로 만들어놓고 영어로만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 몰입영어장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도 원어민 교사다. 따라서 수업시간 모두 '영어만 써야 한다'는 게 이 마을의 원칙이다. 더구나 인천 영어마을은  유초등생을 대상으로 한 영어 영리교육업체가 위탁 관리하는 곳이다.

 

물론 연평도 아이들에게는 '영어만 쓰라'는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등 특혜(?)를 주기로 했다고 한다. 연평지역 학교 교사들과 상담 교사도 도우미로 나선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함께 있게 해 달라'는 아이들을 영어마을로 입소시킨 행동은 사려 깊지 못했다. 편의적인 발상이며 반교육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

 

도시지역 학생들도 초등 영어교육으로 '영포아'(영어포기아동)가 상당수다. 영포아를 넘어 또 다른 형태의 영포아(영어공포아동)도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형편에서 포탄 소리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 원어민의 영어몰입 교육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일이다. 왜 포탄에 짓눌린 영혼들을 다시 영어교육으로 주눅이 들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있다.

 

지금 연평도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어교육이 아니다. 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따뜻한 밥과 방이고, 한국인 담임교사와 심리치료 교사의 따뜻한 교육이다.

 

수두룩한 학생수련원 빈방 놔두고 왜 하필...

 

 인천시 강화도에 있는 호국수련원 전경.
인천시 강화도에 있는 호국수련원 전경. ⓒ 호국수련원

보낼 곳이 없어서 영어마을을 선택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인천시교육청이 관리하는 학생종합수련 시설 가운데 숙식이 가능한 곳은 세 군데다. 해양환경탐구수련원과 흥왕체험학습장, 서사체험학습장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엔 교사와 연구사, 수련 지도사 등 13명을 비롯해 모두 24명의 교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연평지역 학교 교사들까지 합세한다면 알찬 교육이 가능한 곳이다.

 

고급 콘도식으로 되어 있는 을왕리 인천교직원수련원도 숙식과 교육을 할 수 있는 장소다. 객실 34개에 240명까지 생활할 수 있다. 숙식 제공이 가능한 강화도 경기호국교육원도 20여 명의 교사 등 50여 명의 교직원이 수백 명의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 이들 수련원은 학기 중인데다 평일이어서 상당수 방이 텅텅 비어 있는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이곳 말고도 인천시와 경기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수련원도 수두룩할 것이다. 이런 곳을 제쳐놓고 영어마을을 선택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인천시교육청 관계자는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인데 이번에 좋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어마을이라는 곳이 섬에 있는 아이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이다. 이번 기회에 다른 나라 문화를 접하고 영어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학부모들에게 영어마을 입소를 제의했더니 찬성하는 분들도 많았다고 한다."

 

선후 구별 못한 시교육청, 다른 문화 접하게 하려 했다고?

 

다른 나라 문화를 접하고 영어교육을 하겠다는 데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아이들이 찜질방에서 생활하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포탄 소리에 가슴을 떨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이런 영어교육이 왜 시급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인천시교육청에 지금 필요한 것은 선후를 구별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이 아닐까?


#연평도 아이들#영어몰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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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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