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닫고 가서 쉬세요."
아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었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었다. 아내 혼자 힘들게 김장하고 있는 모습을 방 안에서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어서 방에서 나와서 어슬렁거렸다. 내 딴에는 김장하는 아내의 일을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내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아내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다가 달리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살그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아내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니, 이제는 엄마를 도와서 김장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몰라라 한다. 큰 놈은 아예 몰라라 하고, 둘째는 살짝 살짝 도와주기는 하지만, 요령을 피운다.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엄마의 표정에 한계를 넘어서는 것 같으면 얼른 나서서 이것 저것 도와준다. 그리고는 이내 힘들다면서 방으로 들어 가버린다. 그런 딸을 집사람은 웃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딸의 모습이 조금도 밉지가 않은 표정이었다.
"딸들도 이제 다 컸는데, 좀 시켜먹지."
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 마디 하였다. 그러나 집사람의 대답은 의외다. 시집가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집안일인데, 뭐 벌써부터 시키느냐는 것이다. 자기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황금 같은 귀한 딸들을 어떻게 시켜 먹느냐고 되묻는다.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해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어려서부터 시키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것이고, 시집가서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엄마가 자식을 잘못 키우는 것이 아닌가?
묵묵히 김장을 하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날들을 돌아다본다. 결혼한 이후로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다 집사람이 도맡아 해왔다. 집사람이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여겼고, 실제로 잘 해오고 있었기에 믿었다.
집사람이 하는 일에는 실수가 없었다. 집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믿었다. 그런데 요즘 와서 뭔가가 조금씩 잘못되어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바라보았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는데 실수가 생기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사람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집사람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들이 깊게 파여 있었다. 세월이 그만큼 흘러갔으니, 달라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집사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헛웃음이 나온다. 어리석은 것이 사람이라고 하였던가? 왜 인지하지 못하였을까? 집사람도 사람이니, 당연히 달라질 수 있고, 실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진즉 알아채지 못하였을까? 집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믿었다. 집사람이 한 일이니까 실수가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나 자신을 돌아다보게 된다.
올 김장도 결국은 집사람 혼자 모두 다 해치웠다. 다 큰 딸들은 다 해놓은 밥상에 앉아서 품평회가 한창이다. 그런 딸들을 집사람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딸들이 내 눈에는 밉상으로 보이는데, 집사람의 눈에는 조금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어떻게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힘들게 혼자 김장을 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딸들을 바라보는 집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