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기행 일곱째 날(8월18일)은 단둥(丹東)행 야간열차에서 시작했다. 하얼빈 역에서 기차표를 잃어버렸을 때는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기분이었으나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만주기행 마지막 기차여행을 즐겁고 의미있게 장식할 수 있었다.
새로 구입한 기차표 좌석은 일행과 한 칸 떨어진 6인실 침대칸이어서 다행이었다. 하얼빈-장춘-사평-심양-단둥까지 거리는 약 700km로 12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지루하다기보다는 시간이 좀 더 걸렸으면 하는 마음이 더했다.
12시간 걸린다는 하얼빈-단둥 열차
기차는 예정시간보다 10분 늦은 오후 8시50분 하얼빈역을 출발했다. 짐을 정리하고 일행이 있는 칸으로 오니까 회사에 다니는 김명진(57세)님과 인솔자가 통로에 있는 의자에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인사를 하면서도 어색한 웃음만 나왔는데, 표를 빨리 구입해서 다행이라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김명진님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기차 없는 만주여행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드넓은 지역을 이동하기에는 기차만큼 편하고 안전한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기차여행은 많은 사람이 서로의 삶과 애환을 함께 느끼고 나누면서 젖어들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필자는 유달리 기차여행을 좋아한다. 기차에는 우리의 숨결이 있고, 인정이 묻어나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깊은 대화가 쉽게 이루어지면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차를 이용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주일 전에 창밖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예매하곤 했다.
자리가 정리되어 가니까 한 사람씩 모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술자리가 벌어졌다. 야간열차에서 일행들과 술잔을 돌리는 재미는 단체여행에서나 가능한 별미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가까워진 마음을 활짝 열고 이루어지는 대화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어디가 가장 인상깊었니?"... "화장실요!"마른 체격에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항상 진지하고 역사인식이 뚜렷한 게 매력이었던 성상희 변호사(민변소속)는 좋은 분들을 만나서 기뻤다며 네트워크가 이루어져 또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안중근 의사와 백범 김구 선생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던 성 변호사는 후손들이 꼭 알아야 할 항일역사의 현장을 보여주려고 가족 5명이 동반했는데 자신도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며 며칠 동안의 만주기행 소감을 밝혔다.
창밖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번 만주기행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서운해했다. 생각지 않고 있었는데 막상 얘기를 들으니까 아쉬움이 밀려왔다. 18일 단둥에서 하루 일정을 마치면 다음날(19일) 오전 9시 인천행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술자리는 하얼빈 역에서 한바탕 휘몰아친 광풍을 무사히 넘겼음을 자축하는 자리로 변해갔다. 처음엔 눈앞이 캄캄하고 별이 보였었다며 여러분의 위로와 협조로 이렇게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고, 옆에 있던 김남규 선생은 "저는 그대로 헤어지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해서 한바탕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부모와 함께 온 나영이, 지수, 한민이, 다인이, 은찬이도 침대칸에 마주앉아 놀이를 시작했다.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은 일주일 가까이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있었다. 가족이 동반하는 장거리 열차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겹고 흐뭇한 광경이었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그동안 어디를 가장 인상 깊게 보았느냐고 물으니까 기다렸다는 듯 "화장실요!"라고 대답했다. "화장실 말고는?" 하고 물었더니 '731부대 기념관'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꼽았다. 초등학교 4학년(11살) 나영이는 일제의 잔악함에 소름이 돋는지 목을 움츠렸다.
필자도 만주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불편을 느낀 게 화장실이었다. 인구가 7백 만이 넘는 심양에서도, 1천 만 가까운 하얼빈에서도 화장실 찾기가 어려웠고, 시설도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화장실을 '측소'(厠所), 공중화장실을 '공측소'(公厠所)라 했다.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흙 냄새와 인분 냄새오후 10시가 되니까 영락없이 불이 나갔다. 일행들은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박영희 시인은 편히 쉬라고 인사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제 또 맞이할지 모르는 낭만의 시간을 잠으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의자에 앉아 창문을 여니까 시원한 밤 공기가 가슴으로 파고들었고, 향긋한 백양나무 냄새는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니까 썩은 흙 냄새와 섞여 들어오는 인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래도 좋았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봉화 연기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기차에서 감상하는 흑룡강성(헤이룽장 성)의 밤 풍경은 아름답고 시(詩)적이었다.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서쪽 하늘의 샛별처럼 멀리서 반짝이는 농가의 불빛들이 오라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어슴푸레 보았던 외갓집 정경이 떠올랐다.
밤하늘에 여운을 길게 남기고 달리는 기적소리와 레일과 바퀴가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마찰음은 지상최대의 연주로 거듭나면서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가시게 했다. MP3에서 빠르게 흐르는 곡보다 경쾌한 마찰음은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 혼자서 감상할 수 있는 야간열차의 백미였다.
기차가 한참을 달려서 네온사인이 보이는 어느 큰 역에 도착했다. 마침 어깨에 검은 견장을 찬 20대 여승무원이 지나가기에 손짓발짓으로 물어보니까 "좌이층"(장춘)이라고 했다. 기차는 장춘에서 물을 공급받기 위해 30분 가까이 정차하다가 출발했다.
우리의 60년대 비슷한 만주의 농촌풍경밤 1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가, 장거리 기차여행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은 마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마치고 통로 의자에 앉았다. 다른 칸 손님들도 하나 둘 일어나 통로를 오갔고, 일찍 일어나 독서하는 일행도 있었다.
날이 환하게 밝아오니까 염소들이 풀을 뜯는 평화로운 모습에서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마을의 농가들까지 다양한 풍경이 펼쳐졌다. 신령스러운 산봉우리,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옥수수밭, 경운기 1대에 10여 명이 타고 가면서 손을 흔드는 모습은 빈곤 속의 풍요를 느끼게 했다.
기차가 사평, 심양을 지나니까 산줄기를 휘감고 있던 아침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모습이 움직이는 동양화 같았다. 들녘에는 결실을 준비하는 벼들이 바람에 넘실대고, 압록강 지류로 보이는 큰 냇가에서는 마을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60년대 농촌풍경과 너무도 흡사했다.
단둥이 가까워지니까 초라한 가옥에도 위성 안테나를 설치해놓고 과학문명의 혜택을 만끽하는 농가들이 보였다. 내릴 시간이 다가오니까 명절날 오후처럼 허전함과 허무감이 밀려왔다. 엿새 동안에 3일은 달리는 열차의 좁은 침대에서 보냈다. 그런데도 지루하기는커녕 아쉬움만 더했다.
기차표를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처음엔 어쩌다 잃어버렸느냐며 성질내더니 금방 걱정하는 표정으로 변하던 아내가 떠올랐다. 만주기행을 함께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중에 긴박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흥분하거나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기도 했다.
기차는 예정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은 18일 오전 9시10분쯤 요녕성(랴오닝 성) 단둥 역에 도착했다. 만주기행 7일째인 18일은 압록강 하류의 신의주와 마주하며 '압록강 철교(朝中友誼橋)'로 북한과 이어진 도시 단둥에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