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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일)


지난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까닭에 오늘 아침은 예전보다 더 이른 시간에 눈을 뜬다. 눈이 말똥말똥하다. 눈만 말똥말똥한 게 아니라, 온몸의 근육에도 잔뜩 힘이 들어 가 있다. 어제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겉보기엔 하룻밤 사이 푹 자고 일어나, 몸이 상당히 호전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내 몸이 새로운 기운으로 충만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사실 다른 이유 때문이다. 지금 나는 약간의 긴장 상태에 빠져 있다.

거제도는 올해 초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애초 거제도를 일주할 예정이었는데, 이틀째 되는 날 거제도를 절반도 돌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해안을 따라 도는 여행이었다. 첫날은 오후 늦게 여행을 시작한 까닭에, 얼마 가지 못해 옥포조선소 근처에서 하루를 묵었다. 첫날은 여행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가벼운 여정이었다.

그렇지만 다음 날, 거제도 북쪽의 장목면까지 거북이목처럼 튀어나온 지역을 돌아서 나오는데 몹시 힘들었다. 오르막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바람에,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뻔했다. 해가 질 무렵 간신히 고현의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오래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바로 여행을 끝마쳤다. 그때는 물론 거제도와 다리로 연결이 되어 있는, '칠천도' 같은 섬들을 거쳐 갈 생각 같은 건 눈꼽만큼도 하지 않았다.

 거제도에서 건너다보는 통영. 바다 한가운데 갈매기들이 솟대 모양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거제도에서 건너다보는 통영. 바다 한가운데 갈매기들이 솟대 모양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 성낙선

거제도에 다시 내민 도전장, 그 결과는?

오늘 드디어, 그날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거제도에 다시 도전장을 내민다. 긴장이 된다. 당연히 몸과 마음이 굳어질 수밖에 없다. 거제도에서는 여행 기간을 아무리 짧게 잡아도 최소 3일은 걸린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최소한 3일은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통영시내에서 거제대교를 넘기 전까지는 14번 국도를 타고 올라간다. 14번 국도는 거제도를 오가는 도로라서 그런지, 차량이 비교적 많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거제도로 들어선 이후에 나타나는 해안도로는 의외로 한적하다. 그리고 곧고 평탄하다. 자전거 타기에 좋은 길이다. 얼마나 편안하던지 아침부터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게 무색해질 정도다.

곧이어 오르막길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전에 내가 거쳐온 길들에 비하면 상당히 완만한 편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런 길만 나타난다면, 오늘 밤 길에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할 일 같은 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미처 겪어보지도 않은 일을 앞서서 걱정하고 있었던 꼴이 될 수도 있다. 제발이지, 우려가 그저 단순한 우려로, 그리고 걱정이 쓸데없는 걱정으로 끝나기를 바란다.

거제도 해안도로에서 바다 건너편으로, 아침 일찍 지나온 통영시가 빤히 건너다 보인다. 통영에 있을 때는 언제 그곳을 벗어날까 했는데, 막상 그곳을 벗어나고 나니 또 금방이다. 아주 잠깐 머물렀던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가면, 사실 거제도도 아주 잠깐 거쳐가는 곳이 되고 말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위안으로 삼기에는 아직은 갈 길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멸치를 배에서 자동차로 옮겨 담는 장면. 멸치를 끝없이 퍼올린다.
멸치를 배에서 자동차로 옮겨 담는 장면. 멸치를 끝없이 퍼올린다. ⓒ 성낙선

어구마을로 들어서기 직전에, 한 자그마한 포구에서 멸치를 실어 나르는 광경을 구경한다. 배로 잡아온 멸치를 트럭으로 옮겨 담고 있다.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 옆에 4.5톤 트럭 한 대가 서서, 배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지는 엄청난 양의 멸치를 받아내고 있다. 멸치가 끝없이 올라오는데, 좀처럼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배가 거대한 펌프 역할을 하면서 바다에서 끊임없이 멸치를 퍼올리고 있는 것과도 같은 형국이다. 도로 위에는 또 그만한 크기의 트럭이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앞서 몇 대의 트럭이 왔다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이런 풍경이 매우 낯설고 신기한데, 트럭 위로 멸치를 옮겨 담는 일꾼들은 내가 더 낯설어 보이는 모양이다. 힐끗힐끗 나를 내려다보며, '저 놈이 이제는 떠날 때가 됐는데 아직도 저러고 있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걸 잘 아는데 좀처럼 몸이 움직여주질 않는다. 멸치를 구경 삼아, 어디 볕 좋은 데 퍼질러 앉아서는 시간 가는 대로 한참 노닥이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거제도 앞바다를 가득 메운 양식장 부표들.
거제도 앞바다를 가득 메운 양식장 부표들. ⓒ 성낙선

드디어 거제도다운 길이 나타나다

어구마을을 떠나서도 한동안 여유를 부리기 좋은 길이 계속된다. 햇볕도 좋고, 바람도 좋고, 풍경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다. 긴 여행으로 생긴 여독만 아니라면, 참 즐거운 여행길이 되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여유도 쌍근마을을 지나면서부터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역시 거제도는 거제도다. 그냥 한가하게 여유를 부리면서 경치를 구경하는 데 넋을 놓고 있을 곳이 아니다. 쌍근마을에서부터 드디어 거제도다운 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긴 했는데, 설마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좁고 가파른 시멘트 길이 산비탈 위 키를 넘는 잡목 숲 사이로 슬쩍 머리를 감추고 있다. 저 놈의 길이 도대체 어디를 향해 가려고 저 모양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시멘트를 거칠게 발라놓은 가파른 길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부터는 힘 좀 써보시지'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소리가 심장을 조여 온다. 이 길은 일명, '앙김이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쌍근마을에서 저구마을까지 이어지는 바닷가 절벽 길이다.

 앙김이길 입구. 처음부터 고난이 예상되는 길이다.
앙김이길 입구. 처음부터 고난이 예상되는 길이다. ⓒ 성낙선

 앙김이길. 해안 절벽을 가파르게 가로지른다.
앙김이길. 해안 절벽을 가파르게 가로지른다. ⓒ 성낙선

그 길 입구에 '차량 통행은 자제할 것'을 경고하는 문구가 붙어 있는 걸 봤을 때, 깨달았어야 했다. 그런데 정작 그 문구를 쳐다보고는 차들이 지나다니지 않아 자전거 타기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순진하다. 길이 바닷가 가파른 산비탈을 가로지른다. 절벽 중간에 바위를 깎아 길을 만들었다. 인가는 물론, 사람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6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계속 산중턱 절벽 길을 오르내리는데 솔직히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앙김이길에서 만나는 갈림길. 직진해야 한다. 오른쪽은 절벽 아래 막다른 길.
앙김이길에서 만나는 갈림길. 직진해야 한다. 오른쪽은 절벽 아래 막다른 길. ⓒ 성낙선
이 길에서, 여행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방언'을 하기 시작한다. 참 열심히 떠들어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이 길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내 입에서 욕과 한탄이 뒤섞여 나온다. 내 저질 체력을 탓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해안 여행길 책자를 만들면서 이 길이 어떤 길인지를 상세히 설명해주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욕을 해댄 것 같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되돌아 올라오기까지 하는 고역을 치른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그야말로 '뚜껑'이 열리기 직전까지 가고 만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이 모진 길을 빠져나온다. 덧붙이는데, 이 길에서는 중간에 다른 길이 나온다 해도 절대 그 길로 들어서지 말기를 바란다. 계속 직진해서 2차선 아스팔트 길이 나올 때까지는 다른 길로 올라서지 않는 게 좋다.

 명사해수욕장을 지나가는 남부해안로. 배경에 있는 산 위로 앙김이길로 흐릿하게 드러나 보인다.
명사해수욕장을 지나가는 남부해안로. 배경에 있는 산 위로 앙김이길로 흐릿하게 드러나 보인다. ⓒ 성낙선

거제도의 숨은 절경을 그냥 지나치다니...

이 길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스팔트 길을 만나 내리막길을 죽 달려 내려오면 바로 저구항과 명사해수욕장이 나온다. 이곳에서부터는 한동안 매우 낮고 평탄한 길이다. 해수욕장 앞을 지나가는 길이 새로 단장돼 자전거 타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자연히 긴장이 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길을 지나는 사이에 그만 거제도 최남단의 해안 절벽 길을 벗어날 수 있는 우회로를 놓치고 만다.

이제부터 달리게 되는 길은 다포리 해안길이다. 길이 앞서 달려온 앙김이길과는 많이 다르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이 길은 처음에는 아스팔트 길이었다가 중간에는 시멘트 길로, 그러다 나중에는 비포장 길로 뒤바뀐다. 이 길에서 두 번째 방언이 시작된다. 허공에다 대고 뭐라고 뭐라고 계속 지껄여대는데, 곁에서 듣는 이 없기 망정이지 딱 정신나간 놈 소리 듣기 좋은 짓이다.

 다포리 해안 길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다포리 해안 길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 성낙선


 다포리 해안 길.
다포리 해안 길. ⓒ 성낙선
그런 가운데 그 길로 간간이 차들이 지나간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길을 자동차를 피해 멈춰 서야 한다. 도망갈 곳이 없다. 그럴 때마다 또 그 자리에서 뽀얀 먼지를 뒤집어써야 하는 수모를 감내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또 이 길을 오나 봐라' 하는 심정으로 이를 악문다. 물론, 말뿐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내 속마음까지 그런 건 아니다.

이 길은 거제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에 하나로 꼽힌다. 내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는 나머지, 그 길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게 너무 아쉬울 뿐이다. 앙김이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거제도의 바다와 섬 풍경이 절경이라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다.

내겐 이런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전거여행자들에게 환상적인 길이 될 수도 있다. 걷기 좋은 길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정신 멀쩡하고 기운 펄펄한 몸으로 이 길을 다시 한 번 더 달려보고 싶다. 가다 못 가면 자전거를 끌고서라도 가고 싶다.

다포리 해안길 정상에 전망대가 있다. 산 아래로 고즈넉한 풍경의 여차몽돌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인다. 해변으로 검은 몽돌밭이 자로 그은 듯 곧은 선을 드러내고 있고, 그 주변을 멋들어진 바위 절벽이 에워싸고 있다. 여차몽돌해수욕장뿐만이 아니다. 사방으로, 그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해안 풍경이 펼쳐진다.

전망대 주변에 여러 대의 차가 주차해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비경이라는 소문을 듣고, 여차몽돌해수욕장에서부터 비포장 산길을 달려 올라온 차들이다. 해가 지려고 하는데도 꽤 여러 대의 차들이 올라온다. 차에서 내려선 관광객들이 전망대에 서기도 전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험한 산길을 올라와서는 뜻밖에 멋진 풍경을 마주하게 돼, 다들 놀라는 표정이다.

길에서 만난 주민이 내민 구원의 손길

어둑어둑해질 무렵 전망대를 떠난다. 전망대에서부터 여차몽돌해수욕장까지는 줄곧 내리막이다. 그곳에서 돌멩이들이 여기저기 나뒹구는 산길을 더듬더듬 내려가다, 개 두 마리를 앞세우고 지나가는 마을 주민과 마주친다. '안녕하시냐'고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갈 생각이었는데, 이분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불러 세운다. 이것저것 묻는다. 아무래도 내 차림이 범상치 않아 보였던 모양이다.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냐'고 물어서 '두 달째, 50일이 넘었다'고 했더니 입을 쩍 벌린다. 한동안 말이 없다. 자전거로 여행을 하는데 어떻게 50일씩이나 걸릴 수 있는지 의아한 얼굴이다.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이렇게 오래 걸렸다'는 말을 덧붙인다. 비로소 조금 이해가 가는 표정이다. '힘들지 않느냐'고 해서, 보통 때 같으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고 얼버무렸을 텐데, 때마침 험한 산길을 두 개나 넘어온 뒤라 '죽을 맛이다'라고 엄살을 부린다. 그 말에 다시 '오늘은 어디서 잘 거냐'고 묻는다.

사실은 어두운 산길을 내려오는 동안 내내 그게 걱정이었다. '어디든 민박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이분 대뜸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한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혹시 민박을 하시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반색을 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내게 자기 집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그러고는 '미리 전화를 해 놓을 테니 먼저 그리로 가 있으라'고 일러준다.

 해질 무렵 다포리 해안 길에서 내려다 본 풍경.
해질 무렵 다포리 해안 길에서 내려다 본 풍경. ⓒ 성낙선

처음에는 보통 민박집인 줄 알았는데, 가서 보니 잘 꾸며진 펜션이다. 다 좋은데 숙박비가 고민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인아주머니가 숙박비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아저씨(남편)가 돈을 받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뒀단다. 그래도 고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돈을 지불하는 것도, 그렇다고 지불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성의를 무시하는 경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여행을 하면서 올해 관광지마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걸 알게 된 터에 무전숙식까지 할 수는 없다. 결국 적당한 선에서 서로 기분 좋게 성의를 주고받는다. 이렇게 해서 이날 밤, 여차몽돌해수욕장에서 내 집에라도 온 것인양 편안한 잠을 잔다. 물론, 오늘 하루 모진 고생을 하고도 악몽 같은 건 꾸지 않는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오늘 그 말 한 번 제대로 들어맞는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82㎞, 총 누적거리는 3603㎞다.

 다포리 해안 길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여차몽돌해수욕장.
다포리 해안 길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여차몽돌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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