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첫째주는 김장공급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올 김장 공급은 예년보다 좀 늦게 한 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올해 유기농 배추가 자라지 않아서 최대한 자라도록 밭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속이 차지 않아 결국 생산자는 속을 엄청 태웠습니다. 예년에 비해 수확량이 1/3 정도 나왔다고 합니다. 애초에 가격을 결정할 때 12월 정도 되면 물량이 어느 정도가 나오겠다는 짐작으로 결정하는데 이번에는 완전 엇나가서 생산자가 뼈빠지게 농사짓고 손해를 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생산자가 손해를 보게 할 수도 없었지만 또 소비자에게 이미 가격이 나간 후로 변경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한참 고민하다 미리 선입금을 하신 분들과 수원과 양평에서 물건을 사러 오시는 분들을 제외하고는 전화를 돌렸습니다. 다행히 올해 날씨 탓에 배추 속이 안 찬 것과 배추 가격이 오른 것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이미 결정된 가격을 변경하는 것이 어딨냐고, 날씨 탓을 왜 하냐고 생산자에게 못 올려준다고 말하라 하십니다. 그 분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 마음에서는 분별심이 났습니다. 못 사는 사람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집값을 자랑하는 곳에서 살면서 그렇게 말하니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알았다고 답하고 생산자에게는 올려주고, 그 분에게는 가격 변동없이 그대로 공급을 나갔습니다.
저 더러 왜 상황 설명을 더 적극적으로 해서 설득을 안 시키고 손해를 보느냐고 하는데 전 그러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구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냥 봉사한 셈 쳐도 되고, 그 돈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데 그걸 가지고 치사하게 구구절절이 말한다는 게 싫었습니다. 괜히 제 자존심이 구겨지는 느낌이랄까요.
타워팰리스 찍고, 반포동 찍고, 홍제동을 찍으니 밤 12시 30분그렇게 여러 감정을 느껴가며 금요일까지 김장공급을 바쁘게 했습니다. 금요일이 마지막 공급날이었는데 그날은 밤 12시 30분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습니다. 타워팰리스로, 반포 고급 빌라촌으로, 그리고 홍제동까지 배달하고 집에 오니 자정이 넘었습니다.
타워팰리스를 처음 가봤는데 그 부근이 완전 외국 도시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파트 입구도 완전 호텔처럼 해놓았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타워팰리스를 들어가려면 주민등록증을 맡겨야 한다는데 제가 갔을 때는 핸폰과 이름을 적고 배달가는 집과 연락해서 맞는지만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직원이 나와 입구 로비까지 안내해주며 차 댈 곳을 정해줬습니다.
최대한 촌스런 티를 안 내면서 여기저기를 훑어봤습니다. 다른 집과는 달리 아파트 안까지 배달해 주고 싶은 유일한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워낙 예의가 바르신지라 입구에서 자신이 직접 나르겠다고 하셔서 안타깝게도 타워팰리스를 들어갈 유일한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다음으로 배달간 집은 반포동 빌라였는데 내비를 찍고 갔어도 한참 헤맸습니다. 반포동 빌라촌은 평창동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큰 도로 옆 골목으로 오르막길에 줄지어 있는 그 빌라들이 제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라 찾기 어려웠습니다. 가뜩이나 길눈 어둡기로 소문난 제가 골목에서 헤맨 시간이 꽤 됐습니다. 덕분에 도착하자마자 늦게 왔다고 엄청 깨졌습니다. 그 시간이 밤 10시 30분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퇴근하고 출발하니 저녁 늦게나 도착하겠다고 말했는데 서로 늦는다는 시간의 개념이 달랐나 봅니다. 기다리다가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00kg 김장을 하기 위해 아주머니 두 분이 1박 2일로 와 계시는데 배추가 도착하지 않으니 화가 날 만도 합니다. 헌데 정작 제 손님은 저를 오랫동안 아는 처지라 화를 못내고 참는 게 역력한데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저를 보더니 폭발하셨습니다.
"도대체 지금이 몇 시예요? 왜 이제 가져오는 거예요? 이렇게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를 해야 할 것 아니에요? 7시 반에 출발한다면서요?"다다다 이어지는 아주머니의 폭발된 음성을 듣는 순간 저는 너무 당황했습니다. 멍 때린다고 표현하나요? 약간 멍때리다 정신이 차려지니 그 다음은 울컥 올라오는 마음이었습니다. 절반은 화가 울컥, 나머지 절반은 슬픔이 울컥 했습니다.
자기네 집만 배달하는 것도 아니고 금요일 저녁에 강남이 얼마나 차 막히는 곳인데 그런 건 생각도 안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물건 시킨 사람은 가만 있는데 뭔가 싶기도 하고, 내가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나 싶은게 별 생각이 다 올라왔습니다.
그런 온갖 생각이 다 올라오면서 잠시 흔들리다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래 늦게까지 연락도 안되고 기다리니 화가 났겠다. 빨리 일하고 자려는데 물건이 늦게오니 화가 났겠다'
"죄송합니다."그렇게 화내는 아주머니께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았습니다. 만약 혼자 갔더라면 기분이 급다운됐을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같이 간 언니와 그런 마음 상태에 대해서 나누기를 했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고 나니 별 일이 아닌데 그때는 한꺼번에 많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정엄마가 날 공부시킬 때는 힘든 일 하지 말라고 시켰을 텐데, 장사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한 것이 이래서 나온 말이구나, 나를 뭘로 보고 그렇게 함부로 하냐는 등 씩씩거리다 마지막 한 생각에서 모든 것이 멈췄습니다.
뭘까요? 절 멈추게 한 생각이.
'아. 내가 그랬구나. 내가 저 아주머니가 한 것처럼 그랬구나.'그 일하는 아주머니께서 제게 버럭 화를 낸 것처럼 저 역시 물건을 늦게 가져오거나 실수하는 거래처 직원에게 큰소리를 쳤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저희 두부, 콩나물 가져오는 분이 만날 시간 약속을 어깁니다. 술 먹고 뻗어서 전화 안 받는 일이 많은 그 사람은 저한테 특히나 배부르게 욕을 먹었습니다. '인생 그렇게 살면 안된다, 사람이 신용이 있어야지 왜 허구헌날 약속을 안지키냐' 면서 제가 엄청 깠습니다.
제가 상처를 받아보니 그동안 상처줬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오르면서 그 아주머니 심정이 이해되고 화가 풀어졌습니다. 그 아주머니도 그때의 나처럼 화가 났었겠구나. 화가 날만도 하다. 또 내가 화냈을 때 그 분은 정말 무참했겠구나. 참 미안하다.
한 생각 돌이켜보니 제게 버럭 화를 내준 그 아주머니가 보살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경험을 제가 안했다면 전 오늘도 술먹고 뻗어 안오는 그 사람을 향해, 실수하는 사람들을 향해, "일 똑바로 안하냐!"라고 버럭거렸을 겁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스승임을 깨닫게 한 김장 공급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