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김종림(金宗林)은 최초로 백만장자가 된 사람이다. 그뿐인가. 미주의 한인 중에서 최초로 럭펠러를 닮은 인물이었다.
1919년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그는 3천4백 에이커(약 420만 평)의 논에 쌀을 재배했다. 한 해 동안 올린 소득은 당시 금액으로 약 8만 불. 구매력 대비 환산하면 요즘 금액으로 약 160만 불. 그때 80 kg 쌀 한 석이 4불이었는데 90년 후 한국의 추곡수매가격 15만 원(약 150불)으로 환산하면 무려 3백만 불이라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해서 '백미대왕(Rice King)'으로 등극한 게 결코 억지춘향이 아니라는 얘기다.
럭펠러를 닮아 그는 '기부의 대왕'이기도 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그 해 미주에서 송금한 후원금 합계가 3만388불. 그 중 3천4백 불을 김종림이 기부했다. 요즘 돈으로 10만 불 이상의 최고액을 그가 내놓은 것이다. 다음해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은 그를 비롯 몇몇 큰손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함경도 원산 출신인 김종림이 샌프란시스코에 내린 건 1907년 1월. 23세의 나이였고 물론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 시로 가서 철도 노동자로 일하다가 1년 후쯤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그의 가슴 속에는 조국의 독립이라는 염원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돈이 있으면 돈으로 돈이 없을 때는 시간과 노력을 바치자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쌀농사에 뛰어들기 전에는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의 사무를 돕거나 인쇄 일을 돌봤다. 1918년 쌀농사로 돈을 벌자 '신한민보'에 2백 달러를 기부해 우선 식자기계부터 들여놓도록 했다.
1909년 이상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에 의하면 새파란 나이에 벌써 국민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 즈음 이상설은 덴버에 있는 박용만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니 김종림도 박용만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을 게다. 또 1911년 초 박용만이 신한민보의 주필로 일할 동안 자주 대했으리라 믿어진다. 박용만이 세운 소년병학교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몇 년 후 윌로우스에 한인비행학교(Korean Flying School)를 세우는데도 주저 없이 용단을 내리지 않았을까.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이 창립됐다. 흥사단은 장차 조국에서 활동을 펼칠 계획이었다. 창립 발기인을 조선 8도의 각 도별로 한 사람씩을 선발한 것은 그래서였다. 김종림은 함경도를 대표하는 발기위원으로 뽑혔다.
김종림의 쌀농사에 관한 기사가 처음 난 건 1915년 12월 9일자 <신한민보>에서였다.
"콜루사 통신을 거한즉 재미 한인의 실업가로 긔백(기백)이 강쟝한 김종림씨난 금년 벼농사에 희유한 풍작을 엇어 백여 엑카(에이커) 토디(토지)에서 6천2백 석을 츄슈하얏다더라. 씨난 원래 벼농사에 연구와 경력이 만하셔 풍족히 거둘만한 심산이 잇스되 오직 자본과 토디의 샹당치 못함을 인하야 다년간 푸린스톤(주-샌프란시스코의 북쪽에 위치) 등디(등지)에셔 느즌 비로 더브러 운명을 각승하야 량슈쳥풍(양수청풍)에 신셰가 의연함을 탄식하얏스며 금년 경작에는 뜻밧게 일은(이른) 쟝마의 해를 밧아 3백 엑카 계획에 탕슈(창수)로 졀반을 끈어바리고 겨우 백여 엑카에 씨를 던졌스며 이것이나마 발묘가 느져 사람마다 츄셩의 바람이 업겟다고 평론하난 것을 씨난 뎍확(적확)한 희망이 잇슬 줄 알고 물주어 길음(기름)에 게을니 하지 안이하야 이갓치 풍족한 슈확(수확)을 엇엇다더라(얻었다더라)." 캘리포니아에서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건 중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캘리포니아에 금 노다지(Gold Rush) 돌풍이 불었던 건 1850년 대. 일확천금을 노리고 30만 명의 뜨내기들이 각지에서 개미떼처럼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4만 명이 나 되는 중국인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먹을 쌀을 소량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상업적인 벼농사가 시작된 건 1912년 이후부터였다.
김종림이 벼농사에 뛰어든 건 1914년경. 초창기에 그야말로 선두주자로 뛰어든 셈이다.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전 세계적으로 식량 품귀현상이 일어났고 쌀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연 쌀값도 폭등했다. 캘리포니아의 농장주들은 다른 작물 대신에 벼를 심기 시작했으며 몇 안 되는 한인 농부들은 90불이라는 높은 월급을 받고 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김종림의 쌀농사는 번창일로를 달렸다. 1917년 봄에는 1천 에이커(약 6천 마지기), 1919년에는 3천4백 에이커로 늘어난 광대한 논을 경작했다. 그렇다고 그가 그 많은 농지를 사들인 건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동양인의 농지 소유를 법으로 막고 있었다. 김종림은 농지임대를 했는데도 엄청난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농지를 임대할 경우 그는 소득의 10% 밖에 받지 않는다. <신한민보> 기사에 의한 계산법을 따르면 100에이커에서 그가 챙기는 소득이 620석이었다면 3400에이커의 경우 2만1천80석이 된다는 얘기다.
그의 가장 통 큰 기부는 '한인비행학교'의 창설과 운영을 위해 바쳐졌다. 노백린 장군을 교장으로 '한인비행학교'가 설립된 건 1920년 2월 20일. 그렇다고 그날부터 비행기를 띠운 건 아니고 비행기를 구입할 때까지 한 동안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 한 해 동안 김종림은 비행학교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3만 불은 현금으로 내놓아서 그 돈으로 교관의 보수와 운영비 일체를 감당했다. 비행장 부지 제공과 비행기 구입 등 그가 기부한 돈은 5만 불이 넘는 거금이었다.
1920년 1월의 한 겨울.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을 찾아간 노백린은 빈손인 채 워싱턴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를 향하고 있었다. 시카고에서부터 그를 동행한 사람은 곽림대(郭臨大)였다. 그는 대한인국민회 총무직을 맡기 위해 서부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차 속에서 서부에 있는 한인들을 모아 군사훈련과 비행술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숙의했다.
"노백린장군은 워싱턴에서 미국 연방정부와 교섭해 시베리아에 자리를 정하고 한국군 민병을 모집해 독립군대를 양성하기로 하되, 미국의 시베리아 원정대가 철도를 부설하는 일을 협조하면서 야간을 이용, 훈련에 진력해 독립군 양성에 박차를 가할 계획을 세웠었다." 자신의 회고록에 곽림대가 기술한 구절이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원정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으므로 허사가 됐다. 곽림대의 제안에 따라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진 윌로우스로 김종림을 찾아갔다.
세 사람은 뜻을 모았다. 우선 비행사 훈련에 앞서 한인 장정들을 모아 군사훈련부터 시작했다. 김종림은 군단의 부지로 1만 평을 제공했다. 막사와 장비도 그가 마련했다.
윌로우스 시에서 발간되던 영자신문 <윌로우스데일리저널(Willows Daily Journal)> 1920년 2월 19일자에 '한국인들 비행장을 갖는다'라는 톱기사를 실었다.
"쌀농사로 부호가 된 한국인 김종림이 한인 청년들에게 조종술을 가르치기 위해 비행장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19일 밝혔다. 이를 위해 최근 문을 닫은 퀸트학교를 임대했으며 학교 인근에 비행장부지로 40 에이커(약 4만9000평)도 이미 구입했다. 교관도 1 명 채용했고 최첨단 기종인 비행기 3대도 이미 사들여 곧 도착하는데 정비사 2명이 근무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인비행학교는 노백린장군이 교장, 김종림이 총재를 맡았고 곽림대는 훈련생 감독으로 복무했다.
戎馬多年浪得名 말 타고 여러 해 떠돌며 이름을 얻으니 愧吾今日作干城 부끄러워 오늘은 간성을 쌓는다 欲破海洋三萬里 해양 삼만 리를 주파하기 바라며 御風先試航空行 바람타고 하늘을 날기를 시도한다이 시는 상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 1920년 4월 27일자에 게재된 노백린 장군의 시다. 그는 한인 비행사 6인과 함께 비행기 앞에서 찍은 사진도 같이 보내 실리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임시정부는 문명의 첨단으로 등장한 비행기에 대해 관심이 컸다. 1919년 11월 5일 발표된 관보를 보면 군무부 휘하 육군과 해군에 비행대를 편성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아직 상해로 부임하지는 안 했지만 군무부장인 노백린이 미국에서 한인비행학교를 세우고 비행사를 양성한다고 하지 않는가. 바람타고 하늘을 날기를 시도한다고 하지 않는가. 임시정부는 비행기를 조국 상공에 띄워 임시정부의 명령을 널리 전파하고 인민의 배일사상을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했다. 그 희망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망상임을 그들은 알고나 있었을까. 그런데도 1920년 1월에는 비행기 구입을 위한 가능성을 여러 경로로 탐문했다.
한인비행학교에는 중국에서 훈련을 받으러 온 생도들도 있었다. 박희성(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박희도의 동생), 손이도(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목사의 동생), 신형근(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신규식의 조카)이 그들이었다. 그들 중 박희성은 훈련생들 중 가장 기량이 뛰어난 톱건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그들은 모두 중국 대륙으로 다시 돌아갔다. 현재 대한민국 공군은 그 뿌리가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