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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책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 책보세
선생의 81세 생신날인 지난 2일 오후 5시, 우리 세 사람은 종로1가에서 만났습니다. <리영희평전> 저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이 책을 만든 '책보세' 출판사의 김이수 주간, 그리고 필자.

길이 막혀 김 주간이 5분 정도 늦게 도착했는데, 그가 도착하자마자 책부터 보자고 졸랐습니다.

김 주간은 가방에서 <평전> 두 권을 꺼내 저랑 김 관장에게 한 권씩 건넸는데, 흰색 하드커버의 고급스러운 장정이 첫눈에도 맘에 쏙 들었습니다. 또 크기도 보통 판형보다 큰 데다 쪽수도 600쪽에서 1쪽이 빠지는, 무려 599쪽이나 됐습니다.

세 사람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서 선생이 입원해 계시는 면목동 녹색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실에 들어서자 선생은 누워계셨는데, 이미 의식이 없으셨습니다.

한발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주간은 선생의 생신에 맞춰 내느라 제본소 사장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특별히 부탁해서 이 날짜에 맞췄다고 했습니다.

<리영희평전> 들고 생일날 찾아갔으나... 선생은 묵묵부답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리영희 평전>을 연재한 김상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지난 5월 3일 서울 백병원에서 입원치료중인 리영희 선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리영희 평전>을 연재한 김상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지난 5월 3일 서울 백병원에서 입원치료중인 리영희 선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권우성

선생을 대신해서 사모님이 갓 나온 평전을 요리조리 살펴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진은 언제 찍었고, 누구랑 찍었고 하시면서 옛 추억을 되살리셨습니다. 사모님은 당신 평전이 나왔노라고 선생께 고하셨으나 선생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리영희평전>이 태동한 것은 작년 가을 무렵의 일입니다. 경기도 군포에 있는 선생의 댁을 방문한 김 관장이 <평전> 집필 계획을 처음 밝혔고, 이후 금년 4월부터 <오마이뉴스>에 이를 연재하였습니다.

김 관장은 90년대 후반부터 우리 근현대 역사인물의 평전 집필을 진행해 왔습니다. 그 면면을 보면, 김구 전봉준 안중근 한용운 신채호 김창숙 조봉암 장준하  김상덕(반민특위 위원장) 등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모두 고인들로, 생존인물 가운데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리영희 선생 두 분을 택해 집필을 한 것입니다.

이번에 나온 <리영희평전>은 저자가 선생과 충분한 대화와 기존 자료를 두루 섭렵하여 쓴 점이 돋보입니다. 저자는 2007년부터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주 2회씩 6개월에 걸쳐 장장 150시간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증언과 회고담을 도출해 냈으며,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를 댁에서 발굴해 싣기도 했습니다.

또 기존에 나온 선생의 자서전 등 관련서 10여 권과 수백 편의 글들을 재검토하여 각계각층의 다양한 '리영희론'을 수렴, 정리하여 평한 책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우선 <평전>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간경화로 투병 중인 리영희 선생(8월 27일 연희동 아들집에서).
간경화로 투병 중인 리영희 선생(8월 27일 연희동 아들집에서). ⓒ 권우성

"글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 추구'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평전>은 선생이 지식인, 언론인의 산맥에서 봉우리로 우뚝 선 것은 치열한 '논증(論證)의 글쓰기'에서 비롯했다며 선생의 글쓰기를 시작으로 문을 엽니다. 선생의 글쓰기 자세를 두고 저자는 "종교적 엄숙주의에 가깝고 진실 추구의 의지는 혁명가에 가까웠다"며 선생을 특정이념의 기수로 보는 것은 당치 않다고 역설합니다.

이에 대해 선생은 저서 <우상과 이성> 서문에서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고 쓴 바 있습니다. 이런 선생을 두고 사회학자 고병권은 "지식보다는 각성을 전달한 사람", 글동무였던 고 송건호 선생은 "과격하다기보다 정직한 평론가"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선생의 '저항적 글쓰기'는 과연 그 뿌리가 어디일까? 저자는 선생 외삼촌 집안의 가족사를 들고 있습니다. 선생의 외조부는 '수전노'였던 반면 외삼촌 최인모는 소작인에게 토지문서를 나눠주는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개혁가였습니다. 선생은 외삼촌의 선진개혁 사상과 실천자세가 선생의 저항과 비판 정신의 씨앗이 되었다고 저자는 분석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 리영희 선생.
부모님과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 리영희 선생. ⓒ 한겨레 제공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신문을 애독해 또래에 비해 시국상황이나 정세에 밝았고,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걸 보고 분노와 개탄을 삭이지 못했습니다. 군에 입대해서는 군대의 비리와 모순을 보고 또다시 분개하였습니다.
  
선생이 정론직필의 필봉을 곧추세우기 시작한 것은 육군 소령으로 제대한 후 1957년 합동통신사에 입사하면서부터. 그 무렵 이승만 정권은 선거를 앞두고 언론인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공작이 자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자 사회는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정론을 생명으로 하는 지사적 언론인과 권력이나 이권을 좇는 사이비 언론인. 선생은 당연히 전자에 섰습니다. 거기엔 당시 다니던 합동통신이 '야성이 강한 언론사'였던 것도 하나의 배경이 됐습니다. 당시 선생은 결혼하여 부모를 모시고 변두리 월세방에 살았는데 쥐꼬리만 한 신문사 월급으로는 생계가 곤란해 영어번역 등 부업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선생의 기자정신은 권력이나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빈함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기자로서 늘 공부하는 자세를 게을리하지 않은 점이 그것입니다. 중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은 선생은 성장기에 우리글 문법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인데다 '우연히' 기자가 돼 기사를 쓰려니 제대로 될 리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선생은 당시 중·고등 국어교과서를 구입해서 남몰래 맞춤법과 글쓰기를 독학으로 익혔습니다. 선생은 평생을 배우는 자세로 살아왔는데, 불어 실력 역시 군에서 독학으로 터득한 것입니다.

 1960년 <워싱턴포스트>의 에스타브룩이 리영희 선생에게 보낸 편지와 당시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리 선생의 칼럼.
1960년 <워싱턴포스트>의 에스타브룩이 리영희 선생에게 보낸 편지와 당시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리 선생의 칼럼. ⓒ 한겨레 제공

예나 지금이나 기자교육을 잘 받았대서 '좋은 기사'를 쓰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반듯한 기자정신을 가졌느냐의 여부입니다. 선생이 초보기자 시절 한국의 언론은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진실을 보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나마 제 목소리를 내던 <경향신문>조차 폐간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앉아서 외신부 일이나 하면서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선생은 한국의 사정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창구로 외신을 지목하고는 미국의 유력지 <워싱턴포스트>에 '서울통신원'이라는 익명으로 한국소식을 전했습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데는 선생도 한몫을 한 셈입니다. 평전에 실린 W.P 기사 사진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입니다. 

한편 당시 미국은 선생을 한국의 유망한 언론인으로 보고 여비와 활동비를 부담하면서 미국에 초대하였습니다. 1959년 선생은 '풀브라이트 장학계획'의 일환으로 선발돼 처음으로 미국땅을 밟았습니다. 6개월간의 연수를 마친 후에는 하와이에 들러 미국동포사회의 실상을 접하였으며, 귀국길에 일본에 들러서는 대형서점을 보고 충격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때 산더미 같은 책 속에서 '아리랑'이란 반가운 낱말이 눈에 띄어 산 책이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선생은 <아리랑>을 국내에 번역, 출간하였는데, <아리랑>이 민족주의 지성인인 선생의 눈에 띈 것은 우연치고는 놀랍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신나는 경험은 내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생은 현직기자 신분으로 거리로 나섰습니다. 4월 19일 학생시위대가 광화문에서 경무대(현 청와대)로 돌진할 때 선생은 취재목적이 아니라 시위대의 일원으로 그 속에 끼어 있었습니다. 지난 8월 <오마이뉴스>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청와대까지 파이프를 굴렸고, 저쪽에서 총을 쏘는 데 파이프 뒤에 숨어서 밀고 올라갔다"며 그때를 회고했습니다.

그 무렵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가 시위현장을 취재하자 선생은 마치 내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었는데, 이를 두고 "그렇게 신나는 경험은 내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선생은 옳고, 그래서 가야 할 길이라면 입장과 상황을 떠나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파였습니다.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는 선생에게 청천벽력이자 가시밭길의 시작이었습니다. 정치권의 쟁쟁한 투사들조차도 다들 숨죽이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을 때 선생은 편집국 기자들 앞에서 "개혁과 숙정의 대상이 돼야 할 군대가 무엇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냐, 군대의 정권탈취에 반대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용기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권력의 풍향계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4월 혁명 당시 선생에게 고급술집으로 초청하여 술을 사며 호감을 보이던 기자들은 어느새 표변한 채 거리감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인들의 기회주의가 다시 한번 도진 것입니다. 

박정희와의 첫 인연은 쿠데타 그해 박정희-케네디 정상회담 취재기자로 동행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동아>, <조선> 기자들은 정부의 공식발표 자료를 참고로 친정부적인 기사를 썼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친분을 쌓아둔 <워싱턴포스트>의 주필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회담에서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조속한 민정이양, 군의 원대복귀, 한일국교정상화 조속 재개 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본사(합동통신)로 긴급 타전돼 각 언론매체에 보도되면서 큰 파장을 낳았습니다. 결국 선생은 취재 도중 '본사 귀환' 명령을 받았고, 박 정권에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박정희를 수행했던 <동아>, <조선> 기자들은 나중에 국회의원, 부총리, 국회의장이 되었지요. 

<조선일보> 외신부장 때 생애 첫 감옥살이

1964년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선생의 특종 행진은 계속 이어졌고, 반면 탄압도 가중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11월, 선생은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문제를 기사로 썼습니다. 이는 선생이 외신기자의 감각으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쓴 것으로, 이 기사로 인해 그날 밤 반공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모진 고문을 받고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는데, 생애 첫 감옥살이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선생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제안을 하나 받았습니다. 당시 선생은 베트남 전쟁(파병 등)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써 왔는데, 반대로 베트남 전쟁에 호의적인 기사를 몇 번 써주면 보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보답'이란 월급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 박 정권과의 화해, 그리고 반공법 기소 취하가 그것이었습니다. 단꿀 같은 제안을 받고서 선생도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거짓은 쓰지 못하겠다"며 제안을 거절하였고, 이 일로 <조선일보>도 그만둬야만 했습니다.

졸지에 백수가 된 선생은 살아갈 날이 캄캄했습니다. 몇 년 전 제기동 미나리밭 가운데 마련한 13평짜리 집 하나가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부모님과 아내, 3남매 등 가족은 여섯이나 됐습니다. 궁리 끝에 선생은 펜과 지식 대신 육체노동을 하기로 정했습니다. 처음엔 양계장을 해볼까 생각했는데 뒷돈 부족으로 접고, 다음엔 택시운전을 해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노모의 반대로 그만두었으며, 얼마 뒤 우연히 만난 소설가 이병주의 소개로 그가 운영하는 출판사의 서적 외판원 노릇을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선생은 통신사의 한낱 기자로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글을 통해 사회를 향해 발언하기 시작했는데, 국내문제는 물론 비중 있는 국제 관계 평론을 잇달아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 1월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옮긴 선생은 당시의 시국상황을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지식인이 사회문제를 외면한 채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것은 올바른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봤습니다. 선생은 전공 분야 공부보다도 대중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습니다. 우선 향후 동양의 국제정세에 큰 변수가 될 중국연구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이 해 한양대는 중국문제연구소를 설립, 선생에게 책임을 맡겼습니다. 이로써 더없이 좋은 기회를 얻은 선생은 범공산권 문제를 포함해 한반도 주변국가들의 문제를 천착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박 정권은 '교수임용제도'라는 걸 만들어 이른바 '찍힌' 교수들을 솎아냈는데, 교수임용 4년 만에 선생은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역설이지만, 글쟁이에게 실업은 저술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앞서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창비)를 펴낸 선생은 1977년 후속편으로 <우상과 이성>을 한길사에서 펴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으로 선생은 뜻있는 청년들에게는 '사상의 은사'로, 유신정권에게는 '의식화의 원흉'이란 양극단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무렵 <우상과 이성>과 함께 <8억인과의 대화>도 출판되었는데, 곧바로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진 데 이어 선생은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돼 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해 12월 27일, 검찰 취조가 끝나고 기소가 확정되었는데 이날 모친의 부음 소식을 듣고는 감옥에서 나온 저녁식사로 어머님 제사를 지냈습니다. 모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선생은 이날 밤 감옥에서 어머님 영전에 바치는 회한의 글을 엽서에 썼는데, 엽서 위에는 눈물 자국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또 구속... 실직 따른 고통 가중되었으나 지적 활동은 다시 황금기 맞아

 1980년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반공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살고 만기 출옥하는 리영희 선생의 모습. <르몽드>는 당시 이 일을 전하면서 리영희 선생을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 일컬음.
1980년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반공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살고 만기 출옥하는 리영희 선생의 모습. <르몽드>는 당시 이 일을 전하면서 리영희 선생을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 일컬음. ⓒ 한겨레 제공

10.26사태 후 선생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옥고로 지친 심신의 휴식도 필요했지만 내내 침묵하던 지식인, 언론인들이 쏟아내는 백화제방에 굳이 보탤 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초기에는 선생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처럼 정세를 낙관하였습니다. 적어도 1~2월경까지는. 그러나 선생은 이내 '안개정국'에서 음습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직감했습니다.

결국 전두환 신군부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제물'이 필요했고, 선생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다시 구속되었고, 7월에 석방되면서 다시 대학에서 해직됐습니다. (훗날 선생은 "광주에 한 번 간 적도 없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실직에 따른 고통은 가중되었으나 지적 활동은 다시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2차 해직기간 중에 <중국백서> 등 3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언로가 막힌 그 시절 선생은 중국의 지식인 루쉰을 통해 할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왔다[來了]!'가 그것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3년 차인 1983년 2월 정치활동 규제자 555명 중 250명의 규제를 해제하고 해직교수 35명을 복직시켰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여기서 제외됐습니다. 1년 뒤인 1984년 7월에야 대학으로 돌아온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저술작업에 다시 매달렸습니다. 그해 9월 <신동아>에 '일본의 한국문화 침투를 경계한다'를 기고한 이후 한일관계 관련 글을 쓴 것이 계기가 돼 1985년에 도쿄 아시아문제연구소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권이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있다가 일본 정부의 도움으로 23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를 나섰습니다. 이어 독일 하이델베르크 소재 독일연방교회 사회과학연구소 초청으로 독일도 다녀왔으며, 두 곳에서 각각 초빙 교수로 한 학기씩 강의를 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미국 버클리대학교 아시아학과 부교수로 임용돼 한민족 현대정치운동사를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은 쟁취했지만 대선 과정에서 수구신문과 관제방송의 패악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 무렵 선생은 임재경, 정태기 등과 강남의 한 사우나에서 대안언론 창간을 구상한 후 미국에서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준비에 나섰습니다. 1988년 5월 15일 <한겨레>가 창간되었는데, 선생은 논설고문과 이사직을 맡았습니다. 이듬해 <한겨레> 창간 1주년 기념 방북 기획취재를 준비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그야말로 국가보안법의 '단골손님'이었습니다.

 1989년 한겨레신문 북한취재 기획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리영희 선생의 모습.
1989년 한겨레신문 북한취재 기획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리영희 선생의 모습. ⓒ 한겨레 제공

선생이 회갑을 맞은 1989년은 세계사적 변혁기라고 할 만큼 국내외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었습니다. 한국의 극우반공주의자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선생을 공격하였습니다. 마치 선생이 공산주의 전도사 노릇이나 해온 것처럼. 그러나 선생은 '자본주의의 암'을 치유하는 항생제로서 사회주의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지 그들의 억지비판처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과신하거나 숭배한 적은 없었습니다. 선생은 동유럽과 소련의 사회주의는 실패했다고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1994년 선생은 다시 책 한 권을 선보였는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가 그것입니다. 이 책에서 선생은 북한 핵문제, 통일론, 한미관계, 역사 재정립, 언론 문제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뤘습니다. 이 책에서 선생은 자신의 역할이 이제 끝나고 있음을 처음으로 언급했습니다.

고난의 일생은 산 선생이었지만 하늘은 공평했다고 하겠습니다. 1995년 한양대를 정년퇴직하면서 단재상을 수상한 이후 뒤늦게 상복이 터졌습니다. 1999년 늦봄통일상, 2000년 만해상, 2007년 한겨레통일문화상, 2008년 김대중 학술상을 각각 수상했습니다. 1996년 결혼 40주년을 맞아 인세로 부부동반으로 지중해 여행을 다녀왔으며, 2005년엔 투병 와중에 자서전 <대화>를 대담형식으로 펴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노년의 육신은 이미 병마 앞에 약해져 있었습니다. 2000년 11월 집필 중 뇌출혈로 쓰러진 후 우측 반신 마비로 오랫동안 고생하였으며, 2010년 3월에는 간경화에 신장 기능마저 약해져 복수가 차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집과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하였으나 호전되기는커녕 날로 악화돼 81세 생신 3일 뒤인 12월 5일 선생은 결국 타계하였습니다. 비록 의식은 없었지만 생신날 <평전>이 출간돼 날짜로는 선생 생전에 출간된 것입니다.

이제 후학들의 몫으로 남게 됐습니다

 고 리영희 선생 민주사회장이 8일 오전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고 리영희 선생 민주사회장이 8일 오전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 권우성

이상이 간추려본 <리영희평전>의 대강입니다. 전체적으로 연대기식으로 써내려간 <평전>은 선생의 고난의 삶과 다양양한 면모를 증언과 자료로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선생이 별세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저자가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점에서 어느 평전보다도 생생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에 나온 대부분의 평전이 전(傳)에 치우친 나머지 평(評)에 소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 교훈삼아 저자는 선생의 삶 가운데 비판적 요소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으나 별다른 내용을 찾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선생의 삶이 한 치의 오류나 흐트러짐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평자의 입장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선생의 방대한 독서편력에 대한 소개가 부족해 보입니다. 또 역사에 남을 선생의 명문(名文) 목록 같은 것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들은 이제 후학들의 몫으로 남게 된 셈입니다.


#리영희 리영희평전 김삼웅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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