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색채의 마술사로 샤갈과 마티스(1869~1954)를 꼽았는데, 샤갈은 자신보다 반 연배 정도 앞선(거의 동년배나 마찬가지인) 마티스에 견주자면 밝은 색채를 표현하는 데에 뛰어났다. 그런 탓인지 샤갈의 작품은 심심하다. 색채의 마술사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게 색감과 표현력은 탁월하지만 다소 밋밋하다.
오해는 말라. 샤갈도 분명 빨강·보라 같은 강한 색감을 자주 썼고 <바바의 초상>(1953-1956) 같은 그림의 임팩트에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샤갈이 대표작에 많이 사용한 흰 색채는 흰색 본래의 무미건조할 수 있는 음영(陰影)이 오히려 다양한 질감과 형상을 자아내며 시각을 풍성히 자극한다. 샤갈처럼 흰색을 유려하게 변형시킨 예술가를 찾기 힘들고, 그래서 밝은 톤의 색채를 활용하는 불리함(?)을 극복하며 오감을 휘감는 능력에 탄복한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샤갈 작품의 정수(精髓)는 화사한 색채와 초현실주의의 거장 마그리트와 비견되는, 초자연주의(surrealism)에 바탕을 둔 샤갈 특유의 환상적인 화풍이라고 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당대 최고를 다투었던 샤갈의 독창적인 색채감과 상상력은 어디서 비롯했을까. 흔히 샤갈이 유년을 보냈던 러시아(현 벨라루스) 비테프스크 시절과 유대교가 그의 작품에 끼친 영향을 첫손으로 꼽는다(샤갈도 자서전에서 비테프스크에서 얻은 영감들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전시 중인 샤갈의 작품을 직접 보았을 때 이런 설명에 미심쩍었다.
러시아 출생의 유대인이었던 샤갈은 죽을 때까지 유대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성경을 모티로 한 작품들도 다수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에 선보인 총 일곱 점의 <유대인 예술극작 장식화>(1920)는 샤갈이 가진 유대인의 정체성과 유대인 문화를 빼곡히 드러낸다. 특히 <문학>(1920)은 다른 문화권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유대인 문자체계를 알려주려는 세심함도 묻어있다. 샤갈도 자기 민족을 사랑한 영락없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교나 유대인 의식이 그의 작품 전반에 걸친 파급력은 예상보다 미미한 듯 보였다.
꼭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이정도 애착을 갖는 일이 유별난 퍼포먼스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샤갈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작품에 유대교 요소를 반영했다는 인상이 든다. 즉,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거기에 압도당하지 않고 이를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랄까.
샤갈은 1, 2차 세계대전과 나치가 일으킨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전쟁의 참상과 동족의 아비규환을 목도했던 사람이다. 정상적이라면 이런 세태에 분노를 품고 작품에도 시대의 침전물이 스며들지 않았을까. 이번 전시에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의 작품은 많지 않고 샤갈의 다른 작품에서도 전쟁이나 홀로코스트의 잔상은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이랄까, 샤갈의 걸작이 집중적으로 나온 1910~1920년대는 광포한 시대가 닥치기 전이라 샤갈에게 외부의 불순물이 접근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샤갈은 모범생처럼 규칙적으로 살고 정치적인 사안을 작품에 끌어들이는 것을 자제하며 예술만의 고유 생태계를 지키려했나. 의외로 그의 작품에는 마티스와 마그리트와 달리 분노가 담겨있다. 하지만 그 분노는 감정적으로 직접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어둑하고 몽환적인 색채에 몽글하게 잠겨있다. 서커스 시리즈 <하얀 곡마사와 광대>(1965)가 그러하다. 친구였던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가 서커스 연작에서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의 비애에 성큼 다가갔다면 샤갈은 몇 발자국 벗어나 있다.
한편으론 이렇게 온건한 거리두기가 못마땅하기도 하고 샤갈이 더 일찍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체험했거나 더 늦게 태어났다면 그의 작품도 상당히 달라졌으리라는 상상도 해본다. 위대한 예술작품이 위대하지 않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는 없기에, 샤갈도 처참했던 시대와 세계를 조망하며 작품에 응축시켰어야 진정 위대한 예술가가 아닐까. 하지만 역사의 뒤편에서, 과거사를 속속들이 아는 유리한 입장에서 한 인물과 시대를 재단(裁斷)하고 거기다 역사적인 가정까지 삽입하는 것은 심각한 반칙행위 같다.
착각을 하나 했다. 기독교나 유대교에서는 펄쩍 뛰겠지만 피조물이 창조주보다 뛰어날 수 있다. 어떤 인생을 살았건 특정한 시기에 가진 재능을 집중적으로 연마하면 창작자의 이름보다 더 오래가는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공적 인생은 별 볼일 없는 예술가도 후세를 경탄시킬 명작을 충분하리만치 빚어낼 수 있다.
<귀촉도>를 쓴 미당 서정주가 그러했고, <에덴의 동쪽>의 감독 엘리아 카잔(Elia Kazan, 1909~2003)도 그 선상에 있었다. 그들의 공적 인생은 참으로 비루했지만 그들의 작품은 후대까지 광채를 발하고 있기에. 그래서 샤갈의 작품을 정치적이거나 공적인 태도와 결부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고 그 자체로, 특히 유대인이나 시대상황과도 별개인 샤갈만의 세계관을 살펴야 하리라.
이것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유대인들을 떠올리면 더욱 선명해진다. 러시아 혁명으로 재산을 몰수당한 경험을 한 아인 랜드(Ayn Rand, 1905~1982)는 공산주의를 혐오한 나머지 <아틀라스(Atlas shrugged)>에서 평등주의의 폐해를 과대포장했고, 부패한 공리주의가 도래할 것 마냥 가상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애처롭게 헛발질을 해댔다.
한나 아렌트는 외과의 같은 담담한 시선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함을 끄집어서 폭력의 일상성을 고발하며 인류 전체의 문제로 환기시켰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자 유대인이었던 트로츠키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점을 비난하며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우리가 테러라고 일컫는 행위까지 포함해서)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이렇듯 동시대 동일한 사건을 겪더라도 이를 흡수하고 응전하는 방식은 제각기이다. 따라서 샤갈도 시대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이들처럼 자신만의 프리즘을 통해 반응했을 것이다. 그것이 뭘까. 어른어른 그 실체가 잡힐듯하면서 삼각형, 구형 등의 도형 형상을 슬쩍 지나가듯 애매하게 남긴 <산책>(1917~1918)처럼 뚜렷이 다가오지 않았다.
관람을 마치고 시립미술관 로비에서부터 길게 걸린 <도시 위에서>(1914~1918) 대형 브로마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샤갈의 대표작이라 수 차례 눈길을 보냈던 터인데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렸다. 창백한 표정으로 연인을 안고 하늘에서,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인지 잠시나마 부유(浮游)하며 못 이룬 사랑의 해갈을 다른 공간에서라도 풀어보겠다는 처절함인지. 그림 아래에서 응가하는 사람을 그린 것은 샤갈의 유머일수도, 어쩌면 인간의 본능적인 생리작용 속에서도 공중의 연인처럼 뿌듯한 사랑을 꿈꿔보는 여유와 아련함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아닐까.
샤갈의 세계가 가찹게 느껴졌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권력과 금력이 아닌 사랑이다. 마을 위를 굽어보는, 더 나아가 이 세상을 굽어보는 사랑 말이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휠훨 세계를 주유하며 둥둥 떠다닐 수 있는 사랑, 그게 샤갈이 필사적으로 표현하려던 메시지와 심상(心象)이 아니겠는가. 현실에선 꿈꿀 수 없다고, 환상과 이상으로 방치했던, 고작 예술작품을 볼 때만 잠깐 고개를 치켜드는 그 사랑을 샤갈은 현실에 밀어 넣고 싶었으리라.
색채의 마술사, 샤갈을 나타내는 적당한 문구이지만 적합하지는 않은 것 같다. 심상의 마술사라 불러야 제격으로 본다. 마음으로 심상을 느낄 수 있다면 가슴은 뜨거워진다. 그림을 보며 심장을 가열해서 지펴오는 감성이 우리에게 인류에게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꿈만이 아니라 생활이 될 수 있고 일상에서 시큰한 벅참으로 실현되지 않을까. 거기에는 전쟁도 극복하고 인간세계의 온갖 불화를 종식시킬 힘이 담겨 있기에. 샤갈의 동화 같은 사랑, 조금은 이해하겠다.(
http://www.chagall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