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1월 15일(월)


 읍천항 입구
읍천항 입구 ⓒ 성낙선

읍천항에서 한반도의 꼬리라고 할 수 있는 호미곶까지 거의 일직선에 가까운 길을 달린다. 그 바람에 바닷가 풍경이 마치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뒤로 물러나 앉는다. 풍경이 머리에 잔상으로 남아 있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이 구간은 바닷가 도로가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도로가 해안선과 거의 같은 형태의 굴곡을 그리고 있다. 도로가 바닷가에서 멀리 벗어나는 걸 보기가 힘들다. 그 도로가 때로는 바닷가 언덕을 지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한 바닷가 마을 앞을 지나가기도 한다.

 바닷가 마을 풍경. 담장 그림이 무척 서정적이다.
바닷가 마을 풍경. 담장 그림이 무척 서정적이다. ⓒ 성낙선

바닷가 언덕은 조금 다르지만, 마을 앞길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경은 어디나 조금씩 엇비슷한 데가 있다. 일종의 전형 같은 것이 있는 셈이다. '바닷가 마을이 다 이렇지'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수 있다. 해안선이 단조로운 만큼, 그 해안선을 따라 생겨난 마을 또한 그에 못지않게 단순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역시 해안선이 복잡한 서해나 남해하고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고 뭐, 불만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동해안이 단조롭다고 해서, 동해가 아닌 서해나 남해 같은 복잡한 해안선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은 거냐면 그건 또 아니기 때문이다.

 방파제를 넘는 파도
방파제를 넘는 파도 ⓒ 성낙선

오늘 아침, 바다에서 바람이 조금 심하게 불어온다. 바람에 떠밀려온 파도가 바닷가 바위와 방파제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마치 방파제를 넘지 못해 사납게 울부짖는 형상이다. 때로는 그 파도가 도로가에 세워놓은 시멘트벽을 넘어,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하얗게 말라 있는 아스팔트를 적신다.

그 아스팔트 길을 지나가는 동안 시간을 잘못 맞추면 내가 그 파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다. 아스팔트가 유난히 검게 물든 부분은 바닷물이 방파제를 넘어와 쏟아진 곳이다. 자동차가 없으니, 이제는 파도를 피해 다녀야 하는 일이 생긴다. 찬바람이 불어 바닷가 도로 위에서 사람 그림자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항구나 포구가 있는 곳이 아니면, 사람의 온기를 느끼기 힘들다.

 문무대왕 수중릉, 겉으로 봐서는 이곳이 수중릉이라는 걸 알 수 없다.
문무대왕 수중릉, 겉으로 봐서는 이곳이 수중릉이라는 걸 알 수 없다. ⓒ 성낙선

이름과는 달리 초라한 모습의 문무대왕 수중릉

읍천항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문무대왕 수중릉이 나온다. 이미 울산의 대왕암공원에서 상당히 큰 규모의 대왕암을 보고 온 터라, 진짜 문무대왕 수중릉이라고 하면 울산의 대왕암을 뛰어넘는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갯바위나 바위섬이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수중릉이 바라다 보인다는 바닷가에 서고 보니, 도대체 무엇을 두고 수중릉이라고 하는 건지 분간조차 하기 힘들다. 바닷가에서 2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곳 바다 한가운데에 나지막하게 엎드려 있는 작은 바위섬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 섬이 문무대왕 수중릉이란 걸 알게 된 건 바닷가 한 쪽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보고 나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왕의 '릉'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작고 초라한 모습이다. 사실 왕이 잠든 능을 단지 그 규모로 재단하는 내가 생각이 모자란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울산의 대왕암을 문무대왕 수중릉으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울산의 대왕암과 문무대왕 수중릉을 모두 '대왕암'이라고 부르고 있는 마당에,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짜 문무대왕 수중릉인지를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다.

문무대왕 수중릉에도, 앞서 보고 온 울산의 대왕암과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울산의 대왕암과 달리 이곳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로 보기 어렵다. 그 내용이 비교적 구체적이다. 삼국사기에 '문무대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을 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바닷가에서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바위섬 한 가운데에 관 모양의 바위가 들어앉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위섬에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힘을 가한 흔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이 삼국사기에 전해져 내려오는 문무대왕의 수중릉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하지만 바위섬 어디에도 유골이나 부장품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곳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역시 100%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도로가에서 해풍을 맞으며 말라가는 과메기
도로가에서 해풍을 맞으며 말라가는 과메기 ⓒ 성낙선

제철 맞아 해풍에 꾸들꾸들 말라가는 구룡포 과메기

 호미곶 가는 길가의 '해국' 자생지.
호미곶 가는 길가의 '해국' 자생지. ⓒ 성낙선
문무대왕 수중릉을 떠난 이후로는 달리 오랜 시간 머무르는 곳 없이, 이러저러한 이름의 항구와 해수욕장들을 번갈아 드나들면서, 줄곧 포항시까지 달려간다. 오류해수욕장을 지나면, 그때부터는 포항시다. 그러더니 구룡포가 가까워지면서 길가에 과메기를 말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구룡포는 과메기 주산지다. 구룡포를 지나가면서 과메기를 한번 살짝 '맛'보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 과메기는 단순한 음식물이 아니다. 이제 과메기 없는 구룡포와 포항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구룡포 과메기가 포항 경제를 살리는 효자 상품 중에 하나라는 말이 있다. 포항시 지역 전체의 과메기 매출액이 700억 원에 달한다고 하니까, 그게 결코 빈 말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판매와 운송 등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액까지 모두 포함하면, 그 수치는 3000억 원까지도 늘어난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수치다.

올해 1월 한라산 어리목 등산로로 윗세오름까지 올라갔을 때다. 뜨거운 컵라면을 먹고 있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이 산장이 북적이는데, 그 틈바구니에서 차가운 과메기를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과메기가 전국으로 팔려나가 가정집의 식탁에까지 오르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 과메기가 등산객 가방에 실려 한라산에까지 올라오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한겨울 눈덮인 한라산 백록담 아래에서 먹는 과메기 맛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런데 그 과메기가 요즘엔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에까지 수출된다고 한다. 과메기가 한라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해외로까지 팔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계속해서 더 큰 소득을 불러들일 게 틀림없다. 철강 못지않은 효자 상품이라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그게 다 과메기의 '힘'이다. 과메기는 11월에서 2월까지가 제철이다.

바닷가에서 차가운 바닷 바람을 맞으며 꾸들꾸들 말라가는 과메기를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식욕이 돋는다. 하지만 지금은 과메기에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 다시 숨가쁘게 달려간다. 시간이 조금 애매모호해서다. 호미곶에서 하루를 묵게 되면 별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동해면 약전리까지는 달려가야 한다.

구룡포항에서 동해면 약전리까지 직선거리로 10㎞에 불과하다. 하지만 호미곶을 돌아서 가려면 그 길이가 3배 가까이 길어진다.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현재는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이제 겨우 2시간도 남지 않았다.

 호미곶, 상생의 손.
호미곶, 상생의 손. ⓒ 성낙선

푸르스름한 달빛이 길을 밝혀주는 밤길 자전거여행

 호미곶 독수리바위.
호미곶 독수리바위. ⓒ 성낙선
호미곶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갔지만, 그곳에서 딱히 오늘밤을 머물렀다 갈 만한 곳을 찾지 못한다. 이름이 잘 알려진 관광지인데도 불구하고, 포장마차나 찻집 외에 이렇다 할 숙박업소나 식당을 찾아볼 수 없다.

별 수 없이 바로 약전리로 직행한다. 머뭇거리거나 다른 대안을 찾아볼 여유가 없다. 대안을 찾는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이럴 때 다른 대안을 찾는다는 게 시간 낭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다. 조금 무식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생각은 나중에 행동이 먼저다.

호미곶을 떠나 울기재라는 이름의 높고 긴 고개를 넘어가는 사이에 해가 똑 떨어진다. 동해로 들어서면서 해지는 시간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어둠이 깔린 바닷가 길을 1시간 가량 달린다. 다행히 달이 밝아, 사물을 분간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이제는 자전거를 타고 밤길을 달리는 데도 꽤 익숙해진 모양이다. 갈 길이 급한데도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차분하다. 어둠 속, 바닷가를 지나가는 높은 언덕 길 위에서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아 차갑게 번득이는 바다를 내려다본다. 검은 물결 출렁이는 바다 너머로 멀리 포항 시내를 밝히는 붉은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93㎞, 총누적거리는 4254㎞다.

 계원리 바닷가 풍경
계원리 바닷가 풍경 ⓒ 성낙선

 현대적인 분위기의 양포항
현대적인 분위기의 양포항 ⓒ 성낙선


#호미곶#대왕암#문무대왕 수중릉#과메기#구룡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