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금요일 아침. 쿨쿨 단잠에 빠져 있는데, 엄마가 절 깨웠습니다.
"진성아, 눈이 정말 많이 오네. 눈 오면 깨워 달라고 했었지?"
눈!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창문을 열어서 하늘을 보니 정말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죠. 마음이 괜히 들뜨더라고요. 오늘은 마음 속의 '짐'을 덜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른 아침부터 따뜻한 이불을 속을 벗어나긴 싫었지만, 오늘 추위와 싸우며 해야 할 일이 있기에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 바로 눈 치우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늘상 해오던 당연한 '일'겠지만, 전 그렇지 못했습니다. 작년 겨울까지 저는 '눈 치우기' 같은 건 신경도 안쓰는 날라리 이웃(?)이었거든요.
하지만 올 겨울부터 달라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작년 겨울, 일이 있어 새벽에 집을 나섰다가 꽁꽁 언 눈을 닦아내고 계셨던 2층 아저씨와 옆집 아주머니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었죠. 땀이 송글송글 맺힌채 일하시던 이웃을 보며, 그동안 무신경했던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겨울철 빙판길에 넘어지지 않고 편안히 길을 갈 수 있던 것은 그런 이웃들 덕이라는 새삼 깨달았습니다. '내가 참 못된 이웃이었구나' 는 반성이 가슴을 슝슝 파고 들었죠. 그래서 였습니다. 올해에 눈이 내린다면 저도, 집 바깥의 눈을 치우는 착실한 이웃이 돼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그리고 드디어 16일, 대전 지역에는 눈이 펄펄 내렸고 전 곤히 자고 있던 동생을 깨웠습니다.
"야, 일어나..... 눈 온다 눈치우러 나가자!
착한 동생은 제 말에 졸린 눈으로 스르륵 일어나 점퍼를 챙깁니다. 저도 장갑을 끼고 눈을 치울 도구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땅한 장비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있는 것이라곤, 너덜너덜한 빗자루와 모종삽 뿐이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지요.
"야, 너가 빗자루 써"
"엥, 그럼 형은?"
"난 모종삽으로 얼어있는 눈을 깰게!"
그렇게 전 모종삽을, 동생은 다 떨어진 빗자루를 든 채 거리로 나섰지요. 밖에선 벌써 이웃집 아주머니가 눈을 대빗자루로 쓸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형제가 나오자 조금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이었죠. 그도 그럴만 했습니다. 눈치우는 데 있어선 날라리(?)였던 우리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으니, 이게 꿈은 아닌가 생각하셨을것 같습니다.
눈 치우기는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군 복무 시절, 엄청난 양의 눈을 치워본 이후, 몇년간이 공백이 있기 때문일까요? 오래 일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동네 눈을 다 치운 것 마냥 헥헥 거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하는 것에 의의가 있지!'라고 생각하며, 모종삽을 든 채 쭈그려 앉아 얼음을 열심히 깼습니다.
덕분에, 하얀 눈으로 뒤덮여있던 우리집 앞 거리가 말끔해졌습니다. 빙판길의 위험도 사라졌으니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다닐 것이란 안도가 들었지요. 괜히 그렇게 내게 주어진 소일(?)을 끝내자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기분 좋은 마음으로 일을 끝마치고 잠시 후, 밖으로 외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두블록쯤 떨어진 곳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눈 치우기에 한창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기를 들어, 정겨운 풍경을 찰칵찰칵 사진에 담았지요.
그런데 눈을 치우던 한 아저씨가 갑작스레 묻습니다.
"이봐요, 청년. 왜 사진을 찍나?"
"아......"
의아하다는 아저씨의 물음에 살짝 겁을 먹었습니다. 그분은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죠 그래서 사실대로 말을 했습니다.
"아, 전 이 동네 사람인데, 눈 치우는 동네 풍경이 정겨워서 찍고 있었어요"
"오호, 그래? 자, 나도 좀 멋지게 찍어주지 그래!"
그런데 이 아저씨 화를 내기는커녕, 제 대답에 웃으며 멋진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살짝 얼었던 마음이 따뜻하게 녹았습니다. 그래서 기분좋게 웃으며 사진을 찍어드릴 수 있었지요. 겨우 두 블럭 떨어진 거리인데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던 이웃아저씨와 처음 말도 했다는 사실은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었습니다.
매일 아침, 많은 사람들이 추위를 이기며 눈을 치우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 배려심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었던 것이죠. 그 배려심은 눈이 꽁꽁 언 겨울날의 난로처럼 따뜻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