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양 카이스트 교수는 <조선일보> 12월 16일자 기고문('출산 기피 부담금')에서 '경제력이 있으면서도 출산을 기피하는 이들에게 출산 기피 부담금을 물리자'고 제안했다. 나는 처음에 이 기사가 패러디 기사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와 유사한 장난 기사를 패러디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풍자신문 <어니언(The Onion)>은 2년 전 이런 표제기사를 실었다.
"적자에 허덕이던 미국 항공사가 여행을 안 하는 사람들에게 '여행기피 부담금'을 지우기로 했다." 기사가 나오기 전, 항공사들은 승객들의 수화물에 일괄적으로 부담금을 지우기로 결정했었다. 경영실패를 거듭하던 항공사들이 파산과 합병을 반복하다 내놓은 '수화물 부담금'을 조롱하는 기사였다.
이창양 교수가 글을 쓰기 전, 한나라당은 야당이 반대하던 예산안을 강행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영유아 필수예방접종비, 장애여성 출산 장려금, 방학 중 결식아동 급식비, 청소년 공부방 예산 등 출산 장려 관련 복지예산이 무더기로 잘려 나갔다.
예산안 처리 직후에는 진수희 복지부 장관이 '담뱃값 인상 필요성'을 역설했다. (복지예산 삭감에 상심한 나머지 줄담배를 피울 서민들의 건강을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연히 이창양 교수가 이런 정부여당의 부조리한 행태를 조롱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글을 읽다보니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옳은 문제제기, 엉뚱한 대안 나는 이창양 교수가 나름대로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기사 후반부의 '출산 기피 부담금' 제안과, 그런 결론을 도출하게 만든 경제학적 오류를 빼면 말이다. 이창양 교수는 한국이 "OECD 국가 중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고 고령화의 진행 속도는 가장 빠른 나라"라며, 저출산 문제가 한국의 미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말로 기사를 시작한다. 타당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어 "만만찮은 보육 및 교육 비용에 직장여성의 경력 손실이라는 기회비용까지 더하면 출산에 대한 비용은 매우 많이 든다"고 지적한다. "저출산은 지극히 합리적인 개인의 선택"으로, 비용에 비해 얻을 수 있는 편익이 적기 때문에 출산을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교수는 훌륭한 대안까지 덧붙인다.
"따라서 개인의 선택에만 맡겨두면 저출산의 가속화는 피할 수 없다. 국가가 장려금과 보육비 지원, 각종 세제 혜택 등으로 개인의 출산 선택에 개입해야 한다. 이는 출산 행위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이로운 외부효과(positive externality)를 갖기 때문이다." (이창양, "출산기피 부담금", <조선일보> ) 이창양 교수는 여기서 글을 끝맺었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논리적 결론을 덧붙이는 '비합리적 선택'을 한다.
"경제학적으로 접근한다면 경제력이 있으면서도 출산을 기피하는 데 대해 부담금을 도입하는 것이 의미 있는 정책대안이 될 수 있다. 즉 건강이나 경제 사정 등 불가피한 경우 이외에 출산을 기피하는 세대에게 일종의 부담금을 물리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출산 기피 행위가 사회적으로 해로운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ity)를 갖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신은 출산을 기피하여 출산에 따른 부담을 지지 않으면서 출산 가정의 자녀들에게 노후 복지 등을 의존하기 때문이다." 담뱃세를 징수해 몸에 해로운 흡연을 억제하듯(즉 '외부효과'를 '내재화'하듯), 아기를 낳을 수 있으면서도 낳지 않는 '미래 파괴세력'에게 세금 또는 벌금을 물려 출산율도 높이고 세수도 늘리자는 것이다. 주장의 오류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실현이 불가능한 발상이라는 데 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이 교수는 '건강'과 '경제사정'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출산 기피 부담금' 납부 대상자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신체검사를 벌여 '출산 가능/불가능' 여부 먼저 가려야 할 것이다.
'경제사정' 문제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출산 가능/불가능 계층'을 어떻게 산정할까? 한국의 살인적인 사교육비와 형편없는 공공복지를 감안하면, 경제적으로 출산가능하려면 비교적 고소득자들이어야 할 것이다. 즉 '부자'들이 대상일 텐데, 한국 부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기본 의무인 국방과 납세 의무마저 피해가는 사람들 아닌가. 부담금 기피자들에게는 '출산 기피 부담금 기피 부담금'을 물리면 될까?
돈만의 문제일까 별 탈 없이 징수대상을 선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어느 정도의 부담금을 물릴 것인가? 아기를 원하지 않는 부유층에게 출산의 동기를 제공하려면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지워야 한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출산기피 비용이 편익을 넘어서는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경제적 부담은 개인의 수입규모에 따라 달라지므로, '출산 기피 부담금'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수입에 따라 차등부과하는 누진세 성격을 띠어야 한다. 부자일수록 많은 부담금을 물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낼 수 없는 사람들만 아기를 낳아 바쳐야 하는 '출산 양극화' 현상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부유세' 성격을 띠는 이런 부담방식을 (이 교수가 글을 실은) <조선일보>가 좋아할까?
사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창양 교수의 주장은 잘못된 전제에 근거해 있으니 말이다. 그는 출산과 관련해 '돈'과 '건강'의 두 가지 요인을 들었지만, 한국의 낮은 출산율은 이 두 가지 때문만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원인은 따로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서울이 다른 도시들에 비해 출산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현상, 그중에서도 강남구와 서초구가 가장 출산율이 낮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곳에 특별히 병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그래서 군 면제자가 그렇게 많은지 모르지만).
학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는 자신이 익힌 이론적 틀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창양 교수는 '비용'과 '편익'이라는 두 가지 틀로 출산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한 신념 및 정서적 요인들이 결부된 과정이다.
다 떠나서, 개인의 자유는 어떻게 할 것인가? 출산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이가 있는 반면, 아기만은 갖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출산은커녕 결혼조차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정부가 정한 '결혼 적령기'부터 벌금을 물리면서 정부주도로 집단 맞선이라도 보게 해야 하는가? 개인을 사회의 부속물로 여기지 않는 한, 이들에게 선택을 강제할 수는 없다.
저출산, 경쟁사회가 초래한 재앙
한국 출산율이 낮은 가장 큰 원인은 비인간적 경쟁체제다. 경쟁체제는 필연적으로 사교육시장을 강화해 공교육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심각한 윤리적 상실을 초래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시절 다섯 차례의 위장전입 사실에 대해 '자녀교육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자식의 경쟁력 때문이라면 어떤 범법행위도 '맹모삼천지교'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사회에 도덕과 윤리가 서기는 어렵다. '탈법'을 '사랑'으로 알고 자라는 자식들의 정신이 건강하겠는가.
경쟁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나'와 '남'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보도록 한다. '남'이 '강자'인 경우는 굴복의 대상이지만, '약자'인 경우는 존중과 배려가 아닌 착취의 대상이 된다.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밟고 밟히기만 하는 정글사회에서 누가 자식을 키우고 싶겠는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약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과 성범죄가 급등하고, 청소년, 여성, 노인들의 자살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깨달아야 할 점은, 이런 경쟁체제에서 피해를 보는 것이 약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안전하고 안락한 '타워'와 '캐슬'에 거주하는 특권층일지라도 가끔씩은 '험한 세상'에 발을 디뎌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기사
"우리는 '이런 거' 왜 못 만드느냐고?"에서 지적했듯, 이제 배타와 경쟁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배려와 협력이 미래사회의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왜 서로 괴롭히며 함께 망하는 바보짓을 하는가.
기업으로부터 '고용 기피 부담금'을 걷어야 할까?
이창양 교수가 놓친 게 또 하나 있다. 한국은 출산율만 최저가 아니라, 복지예산도 최저수준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사회복지 지출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가운데 29위로, 꼴찌에서 두 번째다. 국민 의료비 지출은 꼴찌에서 세 번째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하는 나라 국민들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열악한 복지수준과 낮은 출산율,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를 보지 못하는가?
무리는 아니다. 이창양 교수는 2008년 <머니위크> 기고문에서 '노무현 정부의 분배 중심 정책이 소득 양극화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경제규모가 OECD 10위권인 나라가 사회복지 수준은 29위인데도 '분배 중심 정책이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안전망도 없는 나라에서 최장시간 일하는 국민들에게 출산의무까지 지워야 한다는 게 이 교수의 논리다.
이명박 정부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5년간 100조에 달하는 세금 감면 혜택을 주고 있다. 감세정책이 일자리 창출이나 재투자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점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행의 2009년 국민계정을 보면 기업들의 영업잉여는 5.9%나 상승했지만, 임금, 복리후생비 등 피용자보수 증가는 3.3%에 그쳤다. 기억이 막대한 이익을 고용이나 재투자에 쓰지 않고 주머니에 쌓아놓고 있는 것이다.
이창양 교수 역시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에 반대한다. 그는 <매경> 인터뷰에서 "기업들이 감세를 통해 얻는 수익은 새로운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는 '출산기피 부담금'을 주장할 게 아니라, 감세 정책을 철폐하고 그 몫을 복지로 돌리라고 요구할 일이다. (물론 이 교수의 논리에 따라, 고용할 여력이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기업들에게 '고용기피 부담금'을 물리는 것도 가능하겠다.)
출산도 좋지만, 태어난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의 행복지수는 OECD 국가들 가운데 최하위다. 자신의 몸 하나 추스르기 어려운 곳에서 누가 자손을 만들고 싶어 하겠는가.
한국사회의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간단하다. 나도 불행하고, 내 자식 역시 불행해질 거라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 어른만 불행한 게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 역시 세계 최하위다. 국민에게 또 한 명의 불행한 국민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면, 태어난 자식이 이 사회에서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을 먼저 심어줄 일이다.
이창양 교수 말대로, 출산이 한 사회의 생존문제라면, 태어난 아기를 돌봐야 할 책임도 사회에 있다. 하지만 집권 여당은 예산안을 강행 처리하면서, 이미 약속했던 (그나마 몇 푼 되지도 않는) 영유아 예방접종, 결식아동, 청소년 공부방 지원 등의 예산마저 끊어버렸다. 이미 태어난 아이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정부가 무슨 낯으로 아기를 더 낳으라 주장하는가.
한국의 출산율과 행복지수는 바닥이지만,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고,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주말에만 30대 여성 두 명이 목숨을 끊었다. 이창양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지 궁금하다. '생존 기피 부담금'이 답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