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자기 인생을 멋지게 살고 싶지 않을까. 누군들 우리 사회에서 소위 '불우이웃'이 되고 싶을까.
부도와 사기로 인해 얼룩진 기춘씨의 인생한때 사회적인 잣대로 보면 '불우이웃'이었던 이가 있다. 바로 이기춘(54)씨. 그는 한때 노숙자였고, 알코올 중독자였고, 보살핌의 대상자였다.
수 년 전 그는 안경테 제조 공장을 했다. 공장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졸지에 알거지 신세가 됐다. 여러 번 죽으려고 했지만, 모진 목숨을 부지했다. 이때부터 그는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술 아니면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재기를 노렸다. 자동차 매매업을 지인과 함께 시작했다. 그가 사장이었고, 지인은 실질적인 업무 담당자였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일명 바지사장이었던 것. 기춘씨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고 한몫 챙긴 동업자는 날라 버렸다. 엎친데 덮쳤다. 잘해 보려다가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이젠 삶의 희망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잠시 중단했던 술이 친구가 되었다.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가족마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서울 천호동 근처에서 자그마치 1년 반을 노숙자 생활을 했다. 겨울에 바깥에서 자다가 밤새 내린 눈더미에 깔린 적도 있었다. 빈속에 깡 소주가 그의 속을 헤집어 피를 토하게 했다. 병원에서도 그는 이제 죽는다고 선고했다. 모진 목숨, 죽지 못해 살던 것도 이제 끝이려니 했다.
그러다가 조계사에서 실시하는 '다시 서기 센터' 프로그램을 만나 재기를 꿈꾸었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센터에서 소개한 노숙자 쉼터가 안성 일죽에 있었다. 거기로 와서 당분간은 술과 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동료의 순간 꾐에 넘어가 다시 술을 입에 댔다. 이제 그에게 희망의 불씨는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다. 조그만 술병 앞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자신을 추스를 건더기는 남지 않았다.
운명적인 만남이 그를 바꿔 놓다그날도 술에 만취돼 안성의료원에 실려 갔다.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새삼스럽지 않은 불우한 인생에 파문을 던진 것은 안성 '동부무한돌봄네트워크팀(팀장 이혜주)'이었다. 복지사 장은영씨와 현바울씨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자신에게, 그것도 살 가치가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초라한 자신에게 지극정성으로 다가왔다. 물을 건네고, 힘을 내자고 하고, 다시는 술을 먹지 말기로 손가락 걸고 약속도 하고.
고마운 마음에 바꾸려 했지만, 오랜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이때 신기한 일이 생겼다. 일하러 나간 이기춘씨의 귀에 자꾸만 '초상집 상여 메고 가며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그만의 경험이었다. '순간 이제 정말 내가 죽으려나 보다. 죽음이 나를 부르는 구나'싶어 두려웠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이제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의지가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개과천선한 그는 당장 인력사무실을 통해 막노동을 시작했다. 막노동을 하면서 소개 받은 공장에 취직했다. 현재 다니는 안성 일죽의 건축외장재 생산 공장 'KTC'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반장으로 승진도 했다. 그가 보여준 성실성이 공장 사장의 맘에 들었다.
그에게도 살 이유가 생겼다요즘 그는 바쁘다. 야근도 자주 한다. 그가 관리하고 보살펴야 할 직원들이 있다. 그들은 외국인 근로자들이다. 고생해본 그는 한국 땅에서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잘 대해 줄 수밖에. 덕분에 밥도 꿀맛이다. 누우면 바로 잠이 든다. 전엔 술 없으면 잠도 오지 않았었다. 몸도 훨씬 가벼워졌다. 공장도 특허제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전망이 밝은 곳이다.
기자가 기춘씨를 찾아간 날(21일), 그는 하루 작업을 마치고 야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부무한돌봄네트워크팀' 현바울씨와 함께 만났다. 기춘씨가 현바울씨에게 시멘트 봉지를 건넸다. 팀에서 섬기는 다른 대상자의 집에 시멘트를 발라 줄 일이 있어 그에게서 시멘트를 받아간다고 했다.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해주었던 그들이 고마워 기춘씨는 뭐라도 도우고 싶었다. 이제 그는 '불우이웃'에서 '장한이웃', 나아가 '나누는 이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보람은 이 세상에서 복지를 실현하고자 애쓰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그에게도 살 이유가 생겼다. 바로 자신의 가족(아내와 자녀들)과의 재회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 때문에 등을 돌렸던,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가족들과 같이 살아갈 날을 꿈꾼다. 그러려면 자신의 몸이 건강해야 함을 절감한 그는 몸 관리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다. 어느 정도 경제적 뒷받침도 있어야겠기에 야근도 마다 않고 있다. 오늘 밤에도 기춘씨의 공장엔 불이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