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가 출간되고 이 책에 대한 사랑은 충만했다. 대중도 대체적으로 좋은 반응을 보였고, 평단에서도 이 소설을 두고 평론들이 몇 편이나 쏟아질 만큼 괜찮은 반응들이 나왔다. 이를테면 21세기 문학블루칩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반응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은 말한다. 김연수가 1930년대 묻힐 뻔한 민생단 사건을 소설로 잘 그려냈다고 말이다. 팩트와 픽션이라는 줄타기에서 균형을 가지고 이를 잘 엮어냈노라 평한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 과연 우리는 이 소설을 단지 1930년대 민생단을 그리는 소설로 덮고 넘겨야 하는 것일까?
소설을 읽다보면 아주 당연히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만주의 그 가혹한 세계가 2010년 한반도 남쪽에서도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김연수는 1930년대 민생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그린다. 그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 조국의 독립과 사회주의라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걸음을 내딛었던 젊은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죽이고 배신하며 좌절하는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연수는 다음의 몇 줄을 통해 당시의 상황과 젊은이들을 그려낸다.
"1933년 간도의 유격구에서 죽어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간도의 조선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객관주의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주관으로 결정되는 가혹한 세계뿐이었다." (213쪽)
"죽음이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듯, 죽음이 지척에 있는 곳에서 청춘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죽음이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인 곳에서는 누구나 임종을 앞둔 노인일 뿐이다. 총성이 그치지 않는 만주에서 우리는 누구나 노인일 뿐이다.
이 세계가 청년들에게 가혹한 세계라면, 죽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청년들마저도 노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세계라면, 내가 몇 명을 조금 일찍 죽인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반쯤 죽은 자들과 반쯤 살아있는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라면, 삶과 죽음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이뤄내는 세계라면 인간을 죽인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계가 가짜일 때 그리고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반쯤 죽어 있을 때 폭력만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누구도 주인이 아닌, 노예만의 세상에서 폭력은 예술이다." (291쪽)
객관적인 것이 상실되어 버린 주관의 세계, 그리고 청년이 청년이길 포기해야 하는 노인의 세계, 그리하여 폭력이 난무하는 가짜 세계, 그가 그리는 세상은 이렇게 가혹하다. 물론 이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사실이었을 것이다. 다시, 문장을 곱씹어본다.
언뜻 스쳐가는 그림들이 있다. 청년이 청년이길 포기한 채 돈 버는 기계가 몸소 되고자, 혹은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이란 노래의 가사처럼 팔려가기 위해 시장에 내몰린 오늘날의 청춘도 노인스럽긴 매한가지이고, 분명히 가짜 세상이 아닐진데 포탄이 날아다니고 그 포탄에 사격훈련으로 대응하겠다는 폭력만이 최고의 가치인 듯 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굶주린 배를 위해 밥 한 끼 먹이자는 이들에게 합성까지 하며 가짜 광고를 서슴없이 만들어내는 시장도 말이다.
결국 무엇인가? 1930년대의 가혹한 세계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이곳은 객관주의보다는 주관주의로 판단되고 젊은이들에게 빨리 늙을 것을 강요하며 대화나 협력보다는 폭력이 앞서는 세계인 것이다.
상황은 다르되 몰리는 방식은 동일하다. 객관적인 정황은 다르되 추상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고 나면 뒷맛이 씁쓸하다. 지난주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의 머리를 수차례 폭행했고, 이번 주 화요일 어린이 집에서 성인 여성이 어린 아이를 폭행했고, 편의점 손님이 편의점 직원을 때렸고, 마침내 어린 아이들이 서로에게 집단 폭행을 가했단다. 가짜 세계에서는 폭력만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다는데….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아침은 그럼 진짜 세계인가? 가짜 세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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