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희생은 저 조광현 하나로 족합니다. 정말 다시는 저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대한민국 정부에서 최소한의 국민보호 의무를 이행해 주길 기원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억울한 희생은 저 하나로 족합니다."2005년 필리핀에서 발생한 '가정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5년간 필리핀 마닐라 교도소에 수감됐던 조광현(35)씨가 50여 차례의 재판 끝에 지난 15일 마침내 무죄판결을 받고 쓴 글이다.
필리핀 교도소에 또 한 명의 '조광현 중사' 있다
8년간 프랑스 외인부대 중사로 복무한 뒤 전역한 조씨는 필리핀 현지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는 한국인 사장의 경호원으로 2005년 8월부터 일했다. 그는 사장 집에서 발생한 가정부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미결수 신분으로 필리핀 마닐라 교도소에 수감됐다.
하지만 지난해 7월 필리핀 현지 교민들에게 조씨의 수사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후 필리핀과 한국에서 '조중사 구하기' 운동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현지 대사관의 부절적한 대응이 도마 위에 올랐다.
조씨가 쓴 글에도 "저는 억울한 누명을 썼음에도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2006년~2007년 1년 동안 어처구니없게도 통역이 없어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다", "대사관은 1년 중 추석, 설 명절에만 단 2회 면회를 와서 라면 1박스만 내려놓은 채 귀찮다는 듯 길면 10분 정도 면담하고 돌아갔다, 애로사항을 말하면 (대사관 직원은) 노트에 적기는 하나 다음에 아무런 후속대책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조씨는 "물질적으로도 안 도와주고, 사건에 휘말려 도움을 달라 해도 소용이 없는데, 그럼 대사관은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라며 "국민을 보호해주지 않는 대사관의 존재 이유를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살인누명을 쓰고 5년간 감옥에 있어야 했던 조씨의 석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한국대사관이 아닌 필리핀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는 한인 구정서(32)씨였다. 지난 7월부터 조씨를 돕기 시작했다는 구씨는 "영양실조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조씨에게 음식과 생필품을 지원했고, 보석금 60만 페소(약 1550만원)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구씨는 25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나와 나이가 비슷한 청년이 5년 가까이 감옥에서 생활하는 걸 보고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다시는 이런 사건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조씨를 도왔다"고 말했다. 조씨는 무죄판결을 받기에 앞서 지난 10월 8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돈 없으면 죽는 필리핀 교도소...이빨 세 개 손으로 뽑아" 그런데 지난 23일, 구정서씨는 마닐라 교도소에 조씨와 비슷한 사연을 지닌 또 한 명의 한국인이 수감되어 있다고 제보를 해왔다.
구씨는 "한국인 김규열씨가 억울하게 1년째 수감 중인데, 제대로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며 "한국 대사관에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있어, 김씨는 통역이나 생필품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구씨는 "조광현씨 사건을 비롯해 우리나라 대사관의 행위에 치가 떨린다"고 성토했다.
"김규열씨는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필리핀 교도소에서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있습니다. 필리핀 교도소는 우리나라 교도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해 비누, 옷, 치약, 칫솔, 약 등 기본 생필품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제대로 된 잠자리도 제공되지 않아요. 밥은 먹으면 구토가 나올 만큼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대한민국 교민이 이런 교도소에서 인권을 짓밟히고 있습니다."
25년간 배를 타며 '선장'으로 일하던 김규열(50)씨가 '마약소지' 혐의로 필리핀에서 체포된 것은 2009년 12월 17일. 김씨가 구정서씨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김씨는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필리핀 사복경찰 6명에게 끌려갔다. 김씨가 도착한 곳은 필리핀 마약단속청.
김씨는 "(필리핀 경찰은 나를 잡아간) 이후 마약과 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며 "'왜 이런 거짓으로, 가지고 있지도 않은 물품을 갖다 놓고 죄를 만드느냐'고 반항하자 나를 계속 구타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강제연행 뒤 1개월여 지난 2010년 1월 27일 마닐라 교도소에 수감됐다.
"돈이 없으면 죽는 곳"이라는 필리핀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참혹했다. 구씨는 "김 선장이 가족이나 친척 없이 혼자 생활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사업한다고 돈을 날려 도와줄 사람도 없다"라고 전했다. 참혹한 교도소 생활은 김씨의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곳 감옥소에서 아침식사는 고양이 죽, 점심·저녁으로는 개밥을 먹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사람 거지(거렁뱅이)들도 거저주어도 못 먹는 음식입니다. 본인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굶어 죽을 수는 없어 밥을 꾸역꾸역 입안에 집어넣으며 두 눈 꼭 감고 정말 피눈물 흘리면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본인 몸무게가 95kg(별명 :뚱보선장, 도구통 선장)이었는데 현재는 65kg정도 나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허리는 42인치였는데 지금 감방에서 34인치 반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정말 자살해서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몇 번씩이나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억울하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삶을 연명하며 숨을 쉬고 있습니다. (중략) 생필품이 없어 맹물에 세수와 빨래를 하고, 치약이 없어 당연히 칫솔(질)도 못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감방에 들어와서 이빨 세 개를 손으로 뽑았는데 생각하면 치가 떨립니다."
김규열씨의 마약소지 혐의에 대해서는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김씨는 지금까지 두 번째 재판을 받았지만 변호사와 통역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구정서씨는 "설이나 추석 때 대사관에서 면회를 와 라면 같은 걸 주고 상담도 했는데, 당시 김 선장이 '억울하다', '도와 달라'고 했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 구씨는 "김씨는 옷이 없어서 옷 한 벌로 1년을 지냈다"며 "얼마 전에는 나한테 전화해서 '간장하고 소금 좀 갖다 달라'고 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26일에도 김규열씨 면회를 다녀왔다는 구씨는 27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제가 훈제치킨을 사갔더니 허겁지겁 손으로 먹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며 "(김씨가) 제 손을 붙잡고 '살려 달라' '나는 정말로 억울하다' '대한민국 품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미국인이나 일본인에게 같은 일 일어났다면"...외통부에 성토 글 이어져 한편, 김규열씨의 사연이 <딴지일보> 등을 통해 보도되면서 현재 외교통상부 자유게시판, 필리핀 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는 김규열씨 사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촉구하는 글이 이어지고 있다. <다음> 아고라에서 진행되는 '필리핀 교도소 불법 감금 김규열 선장 석방'을 위한 서명에는 현재까지 약 3000명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외통부 게시판에 글을 올린 김찬주씨는 "과연 같은 일이 미국인이나 일본인에게 일어났다면 이들 대사관들이 어떻게 움직였을지 생각해 본다"며 "정말 서글프고 화가 난다"고 개탄했다.
이어 김씨는 "본인의 주장과 달리 정말 죄가 있을 수 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김씨가 지금과 같이 조국도 없는 사람처럼 대접받아서는 안 된다"며 "이 분은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고, 대한민국은 낯선 외국땅에서 위험에 처한 자국민을 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일에 대해 외통부 재국민보호과는 홈페이지를 통해 "주필리핀 대사관은 이 사건과 관련 필리핀 사법당국을 접촉,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진행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며 "주필리핀 대사관 영사는 교도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해 김씨를 면담하고 건강상태, 애로사항 및 인권침해 여부 등을 점검해 오고 있으며, 생필품(치약, 라면, 비누 등)도 지원해 오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외통부는 "담당 영사는 금년 9월에도 추석을 앞두고 김씨를 면담, 의약품 등 필요한 물품이 있는지 문의했으나 김씨가 '필요한 것이 없다'고 했다"며 "담당 영사는 추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대사관에 연락하라고 했고, 교도소 간수장에게도 김씨가 요청할 때 대사관과 자유롭게 연락할 수 있도록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구정서씨는 "지금까지 생필품 지원은 설날과 추석에 한 번씩, 총 두 번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라면 두 박스로 1년을 어떻게 사느냐"며 "대사관측의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변호사·통역 지원과 관련해 외통부 재외국민보호과의 한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정부에서 변호인을 지원해 주면 외국정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법절차에 타국 정부가 개입하는 형국이 되고, 형평성의 원칙에도 맞지 않다"며 "자비로 변호인을 구할 수 없을 경우 그 나라 국선변호인을 구할 수 있고, 이 역시 어렵다면 한인사회와의 협의를 통해 변호사를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통역 역시 정부가 대주는 건 어렵고, 한인사회 등을 통해 측면에서 지원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김씨에게도 그런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질문에 "현재 국선변호사가 선임이 되어 있고, 김씨가 요청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한인사회와 협의해서 통역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김씨의 혐의 내용과 관련 "필리핀 당국의 사법권을 침해할 수 있고, 개인적인 내용이라 밝힐 수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