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자연인이건 법인이건 지난 1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간이다. 권력과 정부에 대한 비판을 업으로 삼는 언론도 예외일 수 없다.
엊그제(28일)는 두 신문의 반성문이 눈길을 끌었다. 해마다 오보에 대해 '반성문'을 쓰는 전통을 세워온 <중앙일보>는 올해도
"지방선거 물밑 민심 감 못 잡아…단체장 판세 예측 실패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반성문을 썼다. 지방선거 6일 전인 지난 5월 27일 자체 여론조사팀의 여론조사를 토대로 지방선거 판세를 분석했으나 결과적으로 오보가 됐다는 것.
이 신문은 또 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스마트폰 시장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반성했다. 연초(1월 13일)에만 해도
'옴니아2, 아이폰 따라잡았다' 기사에서 시장조사업체 보고서를 인용해 국내 스마트폰 출하량을 185만 대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으나, 12월 6일에는
'스마트폰 판매 올 700만대 넘어설 듯' 기사를 냈다는 것.
언론의 진정성 없는 찜찜한 반성문그러나 반성문을 읽어도 찜찜하고 허전하다. 진정성이 담겨 있지 않아서다. 오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반성하지 않거나, 오보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해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이 신문은 '옴니아2' 기사와 관련, '시장조사 예측이 정확하지 못한 것'만 반성했지 오보의 본질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이 오보의 1차적 원인은 스마트폰 시장을 뜨겁게 달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붐을 예측하지 못한 데 있다. 그러나 직접적 원인은 아이폰의 경쟁사이자 자사와 우호적 관계인 삼성전자측 시장조사 보고서에 의존한 탓이 크다.
알다시피 '옴니아2' 모델은 삼성전자가 아이폰에 시장을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묻어가기 전략'으로 급조한 '땜빵 모델'이다. 더구나 이 모델은 많이 팔기만 했을 뿐, 사후 관리 및 업데이트 외면으로 대다수 소비자들이 땅을 치고 후회하는 '올해 최악의 스마트폰'으로 꼽힌다. 그 상당수는 '옴니아2, 아이폰 따라잡았다'는 오보를 믿고 산 사람들이다.
<중앙일보>가 그 '과장광고성 기사'를 보고 옴니아2를 샀다가 땅을 치고 후회하는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려면 이렇게 써야 했다.
"처남(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좋고 매부(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좋으라고 쓴 기사가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남한테 반성 강요하며 윽박지르기 일쑤
요즘 이 신문은 정작 제눈의 들보는 외면하면서 남한테는 반성을 강요하며 윽박지르기 일쑤다. 길길이 날뛰는 강요와 윽박의 앞줄에는 늘 정치 분야의 '대기자 문창극'과 '전문기자 김진'이 서 있다. 이날도 문창극 대기자는 북한 체제를 '악의 시스템'과 '악의 덫'으로 규정하고 '햇볕정책 실패를 선언하라'(28일, 문창극 칼럼)고 강요한다.
"힘의 뒷받침 없는 평화는 굴복이다. 햇볕정책은 평화를 구걸한 것이었다. 지금도 평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북한의 위협에 굴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발로 악의 시스템으로 걸어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중략)…이제는 햇볕정책의 실패를 선언해야 한다. 평화는 햇볕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바탕으로 지켜진다."'힘의 뒷받침 없는 평화는 굴복'이라는 흑백논리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햇볕정책은 평화를 구걸한 것'이라는 논리는 궤변이자 비약이다. '구걸'은 약자가 강자에게 청하는 것이지, 강자가 약자에게 청하는 것이 아니다. 햇볕정책의 본질은 강자(튼튼한 안보)의 평화다. 설령 백보 양보하더라도, '햇볕정책은 평화를 돈(대북지원)으로 산 것'이지 '구걸'한 것은 아니다.
힘의 우위를 통해서만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은 전쟁은 인간의 사악한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세계질서와 평화는 외교와 힘에 의한 국가 간의 상호작용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공세적 현실주의 외교' 노선이다. 북한과 이라크 등을 '악의 축'(axis of evil)과 '불량국가'(rogue states)로 규정한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네오콘, 그리고 기독교 탈레반(근본주의자)을 떠올리게 한다.
설령 햇볕정책의 실패를 인정한들 문 기자의 강요와 윽박은 부질없는 허공에 삿대질이다. 아무리 칼럼을 구석구석 톺아도 누구더러 실패를 선언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햇볕정책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상징하는 표현이고 노무현 정부가 전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했음을 감안하면, 그의 실패 선언 강요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싸잡아 비판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을 '부관참시'라도 하자는 것인가그런데 어쩌라는 말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에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전임자를 잘 모시는 전통을 반드시 만들겠다"고 공언한 때가 바로 3년 전 엊그제(28일)인 것을. 그런데 문창극 대기자는 그로부터 채 2년도 안되어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뜬 것조차 잊을 만큼 '경도성 인지기억장애'를 안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하자는 것인가.
하기는 <중앙일보>가 참여정부 출범을 앞두고 뜬금없이 '예산 1% 대북지원'을 제안해 신선한 충격을 던진 때가 8년 전이고,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느닷없이 '통일세'를 주장한 지 한 달도 안되어 이 신문이 '예산 1% 통일기금 적립 실천할 때'라는 기획보도로 화답한 것이 불과 세 달 전이다. '경도성 인지기억장애'의 결과가 아니라면, '예산 1% 대북지원'은 단지 그때그때 다른 '정권 입 맞추기용'이었다는 것인가.
적어도 이런 선전선동 분야에서 '문창극 대기자'와 견주어 청출어람은 '김진 전문기자'다. 김진은 문 기자가 진보개혁 진영에 겨눈 재단의 칼날을 보수진영에까지 들이댄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칼럼(김진의 시시각각)에서
'김관진 국방은 혈서를 쓰라'(12월 6일)고 강요하더니, 이번에는
'김정일에 침묵하는 박근혜'(12월 27일)라는 칼럼에서 "박근혜는 김정일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지도자다"면서 김정일에게 '충격요법'을 주는 압박전선에 동참할 것을 박근혜에게 강요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행동을 자제하고 있는 지도자가 있다. 박근혜 전 대표다. 자유민주체제와 국가안보에 관한 한 박근혜는 정통파다. 그는 2004~2006년 한나라당 대표를 맡으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좌파세력을 상대로 국가정체성 수호 투쟁을 이끌었다. 천안함에 대해선 정부의 단호한 조치를 촉구했고 북한의 연평도 도발을 강력히 규탄했다. 그러나 그는 '악행(惡行)의 근원' 김정일에 대해선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중앙>의 '전쟁불사 코드'는 조갑제의 '전쟁 예찬론'
이런 강요와 윽박을 무기로 한 '전쟁불사 코드'는 <중앙> 지면에서는 처음 보지만 왠지 낯설지가 않다. 데자뷰(기시감)처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 '박정희 예찬론'으로 평생을 울궈먹는 조갑제식 선동이다. 조갑제는 일찍이 '전쟁에 대하여'(<조선노보>, 97년 6월 5일)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한반도의 통일은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의 전차가 사이공 독립궁의 철문을 밀어 버리면서 돌입했던 장면처럼 우리 국군이 평양의 주석궁에 탱크를 진주시킬 때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인물과 사상>, 99년 1월호에서 재인용)조갑제는 같은 글에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약 60만명이 전사했다"면서 "미국은 그러나 이 남북전쟁으로 해서 다음 세기에 세계 최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내부 통합과 국가 동원력을 갖추게 됐다"고 칭송할 만큼 '전쟁 예찬론자'다. 마침 김진 칼럼이 실린 날 <중앙일보> 오피니언 면 하단에는 '조갑제닷컴'에서 긴급 출판한 <우리시대의 妄言錄(망언록)> 책광고 카피가 실렸다.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는 소위 진보인사들(102명)의 말, 말, 말. 진실에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지고, 국민이 화를 내면 역사가 바뀐다!'6.25가 남침인지, 북침인지는 나중에 답하겠다'(이정희)'(연평도를 포격한 북에 대한) 우리의 응사에도 증오가 묻어 있다'(정동영)'김정은 세습, 북한에선 그게 상식'(박지원)'부시가 핵의혹 조작했다'(임동원)"이렇게 뽑아 놓으니 하나같이 '촌철살인'의 '명언'인데 '망언'이란다. 그러니 국민더러 화를 내란다. 심지어 '침묵하는 박근혜'한테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이정희에게는 "나중에 답하겠다"는데도 빨리 답변하라며 강짜를 부린다. 이런 조갑제식 선동을 '행동'으로 뒷받침해온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이 이 판국에 가만 있을 리 없다. 29일 <조선일보> 오피니언 면 하단에는 '2011년도 국민행동본부 출정식' 광고가 실렸다.
"2011년엔 '一戰不辭'(일전불사)의 자세로 '從北撲殺'(종북박살) 냅시다!1(금강산 관광객 피살)+6(임진강 水攻 피살)+46(천안함 폭침 전사자)+4(연평도 포격 전사자)=57명. 지난 3년간 김정일이 앗아간 57명의 한국인 목숨, 내년엔 반드시 이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민족의 원수를 편드는 민주당, 민노당, 박지원, 송영길 등 '전쟁유발세력'을 진압하지 않고는 主敵(주적)과 싸울 수가 없습니다."공통점은 '전쟁 예찬론'과 '박정희 예찬론'
'민주평화세력'을 '전쟁유발세력'이란다. 지난 참여정부에서는 단 한 명도 없었던 억울한 희생자가 이명박 정부 3년 동안 57명이나 생겼는데, 그게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때문이란다. 안보 위협에 대한 아무런 대안도 없이, 햇볕정책을 폐기처분한 안보무능 정권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목숨이 박지원과 송영길, 그리고 이정희 탓이란다. 이들이 한 '2010년의 명언'을 두고 '2010년 최악의 망언'이란다.
"연평 사태의 원인은 이명박 정부가 펼쳐온 대북 강경책 때문이지 햇볕정책 때문은 아닙니다."(송영길 인천시장)'2011년 일전불사'를 외치는 문창극과 김진, 조갑제와 서정갑의 공통점은 '전쟁 예찬론자'이자 '박정희 예찬론자'라는 점이다. 다른 점은, 전자는 예찬만 하지만 후자는 예찬을 넘어서 공세적으로 애국을 '끼워 판다'는 점이다. 이들의 '앵벌이' 수단은 <박정희 전기>(전13권)다. '나라가 걱정될 때는 <박정희 전기>'를 읽으란다. 그것도 "진정한 애국은 지갑과 손발로 표현됩니다!"라는 손발을 오그라들게 하는 감언이설로.
엊그제 쓴 <중앙>의 반성문에서 빠진 본질은 그날 <한겨레>가 1면에 쓴
"낙하산 권력이 접수한 방송, 정권옹호 '몰입' 종편-보도채널에 목맨 신문 비판정신 '거세'" 기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낙하산 권력이 접수한 방송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난 한해 종편에 목을 맨 조중동의 권력 아부성 보도는 독자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한다.
특히 <중앙일보>는 연초부터 벌거벗고 뛰었다. 이 신문은
'눈시울 붉힌 MB 왜?'(1월 8일, 3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대통령이 눈물을 닦는 사진과 함께 "(대통령이) 입술 부르튼 거 보고 용기 얻고 삽니다"로 시작하는, 이 대통령에게 도움받은 시민들의 사연을 친절하게 소개했다. 이 신문은 정녕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기' 마련인 세상 이치를 모르는 것일까? 그래서 대통령한테서 '도움받은 소수'의 사연만 소개할 가치고 있고 '버림받은 다수'의 원망은 소개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일까?
연말로 예정된 종편 선정 발표일(31일)이 다가올수록 이 신문의 권력에 대한 아부성 편집은 더 노골화되었다. 동계 합동화력훈련 사진과 함께 이 대통령이 북한군과 750m 떨어진 최전방부대를 방문해
"공격받으면 가차없이 대반격 가해야"라고 단호한 응징을 강조한 지난 24일자 4,5면은 '안보상업주의'로 위장한 '아부성 편집의 완결'을 보여준다.
이어 25일 성탄절에는 자원봉사자 200여 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이 대통령과 김윤옥씨가 이들의 사연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4, 5면에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1년을 마감하는 '수미상관 편집의 완결성'을 과시했다.
"수사 초기 제보자가 검찰에 찾아와 서울시장 이야기와 관련해 겁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허위 진술을 했습니다. 비겁한 저 때문에 한명숙 전 총리가 누명을 쓰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난 20일 열린 한명숙 전 총리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한아무개씨는 '겁박' 때문이었다며 검찰에서 한 진술을 완전히 뒤집었다. 신문에서는 오랜만에 본 '겁박'(劫迫)이라는 표현은 '으르고 협박한다'는 뜻이다. 2010년은 종편에 목맨 언론들이 '권력에 아첨하고 국민을 겁박한' 한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