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 후 처음으로 내리는 눈이다. 망장포는 제주도에서도 가장 따뜻한 마을에 속한다. 제주도에 대설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동장군이 찾아와도 망장포는 좀체 눈 구경을 할 수 없는 마을이다. 그런데 12월 30일부터 3일간 눈이 내렸다. 이 마을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마당에 자라는 무와 배추는 흰 눈에 파묻혔다. 빨간 지붕은 감쪽깥이 사라졌고, 지붕 아래로 길게 자란 고드름은 영롱한 빛을 발했다. 큰 길로 나가는 올레의 검은 돌담에 하얀 눈이 소복이 덮이니 흑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뤘다. 가슴속에는 멀리서 반가운 손님이 저 돌담을 따라 걸어올 것만 같은 설렘이 일었다.
흰 눈은 포구도 덮었다. 검은 바위로 만든 방파제도 포구 주변의 소나무도 모두 눈을 뒤집어썼다. 포구는 동화에 등장할 만한 설국(雪國)의 성(城)이 되어 버렸다. 그 성을 넘보는 바다의 푸른빛과 대비를 이뤄 한껏 아름다움을 뽐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노랗게 피어 포구에서 가을을 붙들고 있던 국화는 눈과 함께 찾아온 추위에 바짝 얼어붙었다. 이제 세월에 자신을 양보할 수밖에.
기상청에서는 서귀포시 기상 관측으로는 10여년 만에 찾아온 12월 추위라고 했다. 방송에서는 "집 주변과 농작물 관리에 주의하라"고 하는데 주민들은 별로 싫지 않는 표정이다.
올레 입구에 사시는 삼촌(제주에서는 이웃 어르신을 그냥 삼촌이라고 부른다) 내외는 옷을 잔뜩 챙겨 입으시고는 동네 한 바퀴 눈 구경을 하고 오겠다며 대문을 나선다. 오랜만에 찾아온 폭설에 어른들까지 신이난 모양이다. 옆집 젊은 가장은 승용차 바퀴에 스노우체인을 장착하면서 "몇 해만에 꺼내보는 체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눈이 내리면 가장 신나는 건 아이들이다. 올레 안에 사는 아이들이 집집마다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들 우진이와 같이 눈사람을 만들어 봤는데, 다른 집들의 작품에 비해 너무 졸작이라 차마 보여줄 수가 없다.
눈이 내리면 동물들 중에는 강아지가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길가에 강아지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데,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어쩌면 이 강아지가 태어나서 처음 구경하는 눈일지도 모른다.
망장포에서는 해마다 신년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작년과 재작년 두 해 연속으로 구름이 끼어 신년에 해 돋는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주민들은 금년에 장관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던 터인데, 폭설이 내려 해맞이 행사는 그만 취소되고 말았다.
비록 행사가 취소되었다고는 해도 해맞이를 보기 위해 새해 아침 포구로 나갔다. 마을 청년회장을 비롯한 청년회원들이 포구에서 장작불을 지피고 있었다. 혹시 행사가 취소된 줄을 모르고 나온 주민들이 추위에 떨지나 않을 지 걱정이 되어 미리 나와 장작불을 지핀 것이라고 했다. 장작불의 온기와 함께 청년회원들의 따스한 배려가 전해졌다. 그 따스한 온기를 찾아왔는지 포구에 갈매기 무리가 날아들어 소란을 피웠다.
오전 7시 35분쯤에 나타나기로 한 해는 구름에 가려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8시 20분쯤 되지 구름사이로 섬광이 비치지 시작했다.
"새해 해돋이를 9시 이전에 보기는 처음입니다. 멋있네요."
늦게나마 새해 아침에 태양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반응이다. 느긋하고 낙천적인 이 마을 사람들의 정서가 드러나는 말이다.
태양이 구름을 뚫고 제 모습을 드러내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장관이었다. 눈 덮인 하얀 포구에 뿌려진 신년의 황금빛 햇살과 청년들의 따스한 배려, 망장포가 전해준 고귀한 새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