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인가, 맞잡은 두 손인가.
아프리카 최대 국가인 수단(인구 4000여 만 명)이 다시 기로에 섰다. 9일(현지 시각)부터 1주일간 수단에서는 남부의 분리독립 여부를 결정할 국민투표가 실시된다. 이 기간 동안 393만 명의 남부 유권자 앞에는 '한 손'(분리독립)과 '맞잡은 두 손'(북부와 통합 상태 유지) 그림이 그려진 투표용지가 놓인다. 투표용지에 그림이 담긴 이유는 85%에 이르는 남부 수단의 높은 문맹률 때문이다. 투표율이 60%를 넘고 그중 절반 이상이 '한 손'을 택하면 수단은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진다.
국제사회는 투표를 앞둔 수단을 걱정 어린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이번 투표를 계기로 다시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단의 오늘날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먼저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손인가, 맞잡은 두 손인가... 기로에 선 수단
파쇼다 사건 |
19세기 말 영국은 이집트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세로로 이어진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자 종단 정책을 폈다. 라이벌 프랑스는 대서양에 접한 사하라사막 서쪽부터 아프리카 대륙 동쪽까지 가로로 이어진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자 횡단 정책을 추진했다.
두 나라는 1898년 수단 파쇼다에서 맞닥뜨렸다.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으나, 프랑스가 한 발 물러나면서 영국이 수단을 차지했다. |
이집트가 위용을 떨치던 고대에 수단 북부 지역은 파라오(이집트 최고 통치자)의 땅이었다. 19세기 초 다시 이집트에 정복됐던 수단은 19세기 말엔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아프리카 대륙 땅따먹기'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인 파쇼다 사건이 일어난 곳도 수단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단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왔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아프리카에서는 독립국이 속속 생겼는데(이 중 17개 나라가 독립한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로 불린다), 수단도 195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아프리카를 갈가리 찢어놓은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하나로 뭉쳐 아프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frica, USA)을 건설하자'(가나의 초대 대통령인 은크루마)는 담대한 제안이 나올 정도로 아프리카에 희망이 넘치던 때로 기록된다.
그러나 아프리카합중국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고, 신생 아프리카 국가들 중 상당수는 '연이은 쿠데타'와 '독립 후 내전'이라는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수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쿠데타가 이어졌고, 종족·종교 갈등도 심해졌다. 수단은 다수인 북부의 아랍계와 소수인 남부의 비아랍계(흑인 원주민)로 이뤄져 있다.
종교적으로는 북부 아랍계가 신봉하는 수니파 이슬람이 다수이지만, 남부에는 기독교를 믿는 이들이 많다(수단 주재 한국대사관 자료에 따르면 수단의 종교 분포 현황은 이슬람이 64%, 기독교 27%, 토속종교 등 9%다). 또한 사하라사막에 인접한 북부와 달리, 남부는 수자원이 풍부하고 땅도 기름진 편이다.
식민 지배의 유산, 종족·종교 갈등에 석유 문제까지... 남북 내전만 39년
남북 갈등에는 식민 지배의 유산이 한몫했다. 북부와 남부를 분리 통치하던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북부를 중심으로 해 수단을 한 묶음으로 통치하면서, 남부의 불만이 커진 것이다.
아랍계는 독립 후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비아랍계를 배제했다. 이에 남부는 북부의 그러한 움직임이 뚜렷해진 1955년(독립 전해)부터 무장투쟁으로 이에 맞섰다(1차 내전). 1972년 양측이 '남부의 광범위한 자치'에 합의하면서 총성이 멎을 때까지 약 50만 명이 사망했는데, 사망자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남북 간의 갈등에 다시 불을 붙인 건 석유였다. 1978년 미국 기업 셰브런은 수단 남부에서 매장량이 상당한 유전을 발견했다. 그러자 기존의 종족·종교 갈등에 더해, 이 '검은 황금'을 누가 통제하고 어느 쪽에서 그 수익을 가져갈지를 놓고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1983년 결국 더 큰 규모의 2차 내전이 터졌다. 북부 중앙정부가 남부 자치정부를 해산하고 수단 전역의 이슬람화를 추진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배후에는 석유를 비롯한 자원을 독점하려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수단 석유의 70%는 남부에 매장돼 있다.
정부군과 남부 반군(수단인민해방운동) 간의 내전은 길고도 치열했다. 22년 동안 이어진 내전으로 사망한 사람만 200만 명에 달하며, 400만 명이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땅을 떠돌아야 했다.
열 살도 안 된 소년들을 납치해 총알받이로 세우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이런 식으로 가족과 헤어져야 했던 '잃어버린 소년(lost boy)'은 18000여 명에 달한다.
또 다른 비극, '인종 청소' 다르푸르
끔찍한 내전은 2005년 1월 9일 양측이 포괄적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멈춘다. 협정의 핵심은 6년 후(2011년 1월 9일) 남부 주민들의 투표를 통해 분리독립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양측은 그때까지 남부의 자치를 인정하고, 이슬람법 적용을 북부로 한정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통해 남과 북의 내전은 멈췄지만, 수단의 비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남북 간 내전이 진행 중이던 2003년 서부 다르푸르 주에서 또 피바람이 불었다. 유목 중심인 아랍계와 농경 중심인 비아랍계가 물과 목초지 등을 놓고 갈등하다가 결국 무력 충돌로 번진 것이다.
내전 발발 후 다르푸르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유엔은 다르푸르 내전으로 30만 명이 사망하고 27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히 악명 높은 아랍계 민병대 잔자위드는 중앙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학살, 납치, 강간, 인신매매 등 이름만 들어도 역겨운 범죄가 이어졌다. 2010년 2월 수단 정부와 다르푸르 반군이 기본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이 협정 이행을 위한 협상을 계속하고 있지만, 최종적인 평화협정은 아직 체결되지 않은 상태다.
사그라지지 않는 내전 재발 우려... 분리독립 결정돼도 석유·국경 등 문제 산적
남부 수단 국민투표는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치러지는 것이다. 외신들은 내전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이 투표를 앞두고 대거 남부로 돌아왔으며, 주민들이 '맞잡은 두 손'이 아니라 '한 손'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투표가 무사히 치러지고 그 결과에 따라 수단이 다음 단계로 평화적으로 이행할 것이라고 안심하기는 이르다.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지 <포린폴리시>가 최근호에서 이번 국민투표가 또 다른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 것처럼, 내전 재발을 우려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남북 간의 내전과 다르푸르 내전이 동시에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도 있다.
체포영장 발부된 바시르 수단 대통령 |
바시르는 1989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후 22년 동안 수단을 통치하고 있다. 바시르의 쿠데타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바시르는 다르푸르 내전과 관련한 전쟁 범죄 혐의 및 인종 대량학살 혐의(다르푸르 학살을 주도하고 희생자 중 35000명의 죽음에 직접 관여한 혐의)로 2009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또한 '바시르가 국고에서 90억 달러(수단 국내총생산의 10분의 1 수준)를 빼돌려 영국 은행에 숨겨둔 혐의가 있다'는 내용을 담은 미국 외교전문이 위키리크스에 의해 공개돼 곤욕을 치렀다. |
물론 북부와 남부의 지도자들은 내전 재발 우려를 공식 부인하고 있다. 북부를 대표하는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은 4일 남부 자치정부의 수도인 주바를 방문해 "통합을 원하지만 남부 주민의 뜻을 거역할 생각은 없다"며 "힘으로 통합을 유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부통령이자 남부 자치정부를 이끄는 실바 키르도 "더 이상 분쟁은 없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내전 재발 우려가 사그라지지 않는 것은 갈등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핵심은 석유 문제다. 수단 석유의 70%를 보유한 남부와, 그 석유를 수출하는 데 필요한 송유관과 항구를 갖고 있는 북부가 남부의 분리독립이 결정될 경우 석유 이권을 사이좋게 나눌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다. 아울러 두 나라로 쪼개질 경우 국경선을 어떻게 정할지도 만만찮은 문제다.
이 문제의 시금석은 북부와 남부가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는 아비에이 지역이다. 내전 기간 동안 양측은 석유와 목초지가 풍부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격전을 치렀다. 현재 양측은 이곳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남부 분리독립이 결정될 경우 이 지역 영유권 문제는 다시 뇌관이 될 수 있다.
아비에이 지역은 북부를 따르는 미세리야 부족(아랍계)과 분리독립에 찬성하는 딘카 부족이 양분하고 있다. 이 중 미세리야 부족장은 4일 <알 자지라>와 한 인터뷰에서 "딘카 부족이 아비에이를 남부에 합병하려 하면 즉각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르푸르 내전과 중국 |
다르푸르에서 학살이 한창이던 때, 유엔과 미국 등 국제사회는 학살을 방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중에서도 중국은 다르푸르와 관련해 특히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2005년 유엔이 다르푸르의 인명 피해를 줄이고자 이 지역에 대한 무기 판매를 금지했지만, 중국이 이를 위반한 것 아니냐는 의혹 때문이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2008년 다르푸르 내전에서 중국제 전투기가 사용됐다고 보도했다. 2010년 10월엔 다르푸르에서 유엔과 아프리카연합 평화유지군이 공격받은 현장에서 발견된 탄환 중 절반 이상이 중국산이라는 보고서 발표를 중국이 막으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었다.
이 때문에 1990년대 이후 자원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에 적극 진출, 차이나프리카(China+Africa)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향력을 확대한 중국이 아프리카에 평화가 정착하는 데 더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고 있다.
이와 달리, 중국만 탓할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노르웨이 학자인 폴 미드포드와 인드라 드 소이사는 2001~2008년 사이에 수단에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한 건 중국이 아닌 러시아라고 주장했다. 또 1989~2006년에 또 다른 독재국가로 꼽히는 이집트에 가장 많은 무기를 판 것도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덧붙였다. |
이처럼 투표 결과 분리독립으로 결정되더라도 석유 수익 분배, 국경선 획정 등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와 관련, 중국과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국제 사회 전반의 관심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프리카에 적극 진출해온 중국은 수단에서 송유관을 비롯한 주요 석유 기반 시설을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은 수단 석유 수출량의 3분의 2를 수입하는 대가로 다르푸르 학살에 쓰인 무기를 공급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받아줬던 수단을 1993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고 1997년부터 경제 제재를 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9월, 수단에서 평화협정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분리독립 투표 후에도 상황이 악화될 경우 추가 제재를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와 관련, 미국이 그렇잖아도 바닥 수준인 수단을 압박하고 있는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고 경제 제재도 풀어 평화협정 이행 및 분리독립 이후 재건에 실질적 도움을 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아이들이 다시 총 드는 일 없어야
유엔은 수단 남부 중 에티오피아와 인접한 지역을 "지구에서 가장 배고픈 곳"으로 규정했었다(이 지역 아이들 중 46%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한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를 다룬 영화 <울지 마 톤즈>가 지난해 9월 개봉해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관객 20만 명을 넘기며 잔잔한 감동을 전했다. <울지 마 톤즈>는 그곳에서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한 고 이태석 신부와 톤즈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 이태석 신부는 거친 역사에 휘말려 총을 들어야 했던 수단 어린이들의 손에 악기를 쥐어줬다.
제국주의의 잘못된 유산과 석유에 대한 탐욕, 종족·종교 갈등 등이 얽히면서 내전, 학살, 빈곤의 악순환을 겪어온 수단. 그곳 아이들이 악기 대신 다시 총을 들어야 하는 비극이 없기를 바라는 세계인들이 수단을 주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