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새벽에 깨어나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 곽재구 <새벽 편지> 새벽 편지사막의 낮은 황홀하다. 작은 가시 풀과 변색하는 가는 모래들, 같은 듯 다르게 사라질 듯 끝없이 나타나는 모래 언덕들.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 모든 아름다움이 어둠에 잠긴 순간부터 더 진한 미감이 피어오른다. 기다리지 않았으나 부지불식간 그 매혹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주인공은 하늘에 빼곡히 부유하는 별빛들이다.
달이 휘황한데 그 광량으로도 다 덮어 버리지 못하는 별빛, 모닥불의 일렁임으로도 몰아내지 못한 별빛의 아름다움에 영혼을 샤워하는 경험은 지난 며칠 반복되었던 일상이지만 일체의 조명이 사그라든 새벽의 별 앞에서 더욱 특별한 감정을 경험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영혼의 불과 별빛을 등가로 하여 읊었던 말이지만, 지금 내 상황에 이토록 절실한 말이 있을까 싶다. 삶의 지표를 잃은 현대인에겐 별이 필요하다. 위성으로 찍은 한국의 밤사진을 본 적이 있다. 도시지역이 온통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밤이되 밤이 아닌 세상, 현대인은 밤을 잃어가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밤을 빼앗기며 꿈도 잃어간 것은 아닌지. 저 수많은 별들을 매일 그냥 놓치며 살았다는 건 분명 불행한 일이다.
고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교과서를 통해 알퐁스 도데의 <별>을 접하고 가당찮은 이야기라 여겼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고, 캠핑을 시작하고, 별을 보게 되면서 별 아래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 끓는 젊음이 평소 흠모하던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옆에 두고도 아무 일 없이 산속 하룻밤을 지내는 일이, 별은 보름달이 주는 흥분과 설렘과는 또 다른 감정을 자아내게 하니까.
늑대인간으로의 환태도, 메밀꽃 필 무렵 물레방앗간에서 처녀와 로맨스를 쌓았던 허생원의 감정도 별 앞에서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니까. 일렁임이 아닌 차분한 격동이랄까, 조금은 이성적인, 그러면서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가슴 속 희망 같은 거.
특히 새벽에 일어나 일 보려 땅을 파며 보는 사막의 별은 더욱 그렇다. 고개를 들지 않고도 볼 수 있는 별무더기에 갇히면 세상은 온통 희망으로만 가득할 것 같다. 어디에 출렁이고 있을 희망의 샘 하나 생각하며 누구에게 새벽 편지라도 쓰고 싶어진다. 곽재구 시인처럼.
그 편지를 받을 수신자가 지금 막 텐트를 헤치고 나왔다. 더불어 새벽의 정적을 깨던 코골이 소리도 멎었다. 아내가 깬 것이다. 공기의 빛깔이 진청에서 담갈색으로 변할 무렵 텐트 밖으로 나온 최 감독도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아따 딩고가 왔다가, 이것이 무슨 짐승의 소리다냐 하고 도망 가겄소."아내의 코골이에 대해 최 감독이 농담을 던졌다. 사실 코 고는 소리라면 둘 다 막상막하다. 텐트 두 동이 바짝 붙어 있으니 숨소리까지 들릴 상황인데, 코 고는 소리는 청진기라도 댄 듯 선명하다. 두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사막의 밤에 접하는 유일한 소음이다. 바람도 짐승도 숨을 죽이는 사막의 적막을 찢고 전해지던 이 음향들을 꽤 오랜 세월 기억할 것 같다.
아내가 새벽 여명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 뒤를 향해 내가 소리를 질렀다.
"타이판 조심해!""그게 뭔데?"아내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묻는다.
"독뱀인데, 한 번 물 때마다 기니피그(모르모트) 1만2000마리를 죽일 독을 뿜어."겁을 주려 한 말이지만 농담은 아니다. 유명한 호주 악어사냥꾼이 만타에 쏘여 사망하면서도 화제가 됐지만 이 광막한 땅은 온통 조심해야 할 것 투성이다. 사자도 호랑이도 없이 야생들개인 딩고가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인간을 제외한다면)로 군림하는 호주가 지구상 위험한 동물들이 많은 곳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아이러니다. 벌이나 말벌에 쏘여 알레르기 반응으로 죽기도 하고 집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깔때기그물거미에 물려 한 시간 안에 사망할 수도 있다.
독에 쏘이거나 하는 것 이외도 140종 이상의 뱀이 살며, 그 중 20종은 인간에 매우 위험하다. 특히 타이판 같은 뱀은 경고 없이 바로 공격을 하고 여러 번 무는 경향이 있는데 한 번 물 때마다 기니피그 1만2000마리를 죽일 수 있는 독이 나온다. 쉽게 말해 1mg으로 쥐 100마리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인데 매년 수백 명이 공격을 받는다.
"..... 같이 가면 안 될까?"뱀이라는 말에 아내가 바짝 움츠린다.
"걱정 마. 여긴 없어."타이판은 호주 북부나 동부, 퀸즐랜드 남서부나 남호주에 주로 서식한다니 이곳 심슨사막에서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고 호주 북부지역의 악어나 바다 해파리 따위를 염려할 일도 없지만 내가 아내에서 경고한 건 무엇에 의해 어떤 위험에 빠질지 알 수 없으니 매사에 조심하란 뜻이었다. 힘들 텐데 내게 기대는 것 없이 제 몫을 해내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해 그냥 겁을 준 것이기도 하고.
크레이펜의 신기루아침을 지어먹고 이젠 일상이 된 모래 파도타기를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모래 언덕 사이로 크레이펜(claypan) 지대가 펼쳐진다. 단단한 평지 너머로 아지랑이 하나가 이글거린다. 신기루다. 저것은 현실이 아니다, 저것은 꿈이다, 꿈이지만 현실에서 보는 꿈이다, 환영이다 라고 읊조리지만 눈에 보이는 존재를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멀찍이 아주 멀찍이 현실의 잔영으로만 존재하며 나를 향해 손짓하는 그 무엇, 신기루를 옆으로 두고 달리고 있다. 만약 정면에 저 녀석이 위치해 있다면 나는 끝내 그 환영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실체 없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어쩜 이렇게 사막은 우리 삶과 닮아있는 것일까? 내 좌표가 있고 지향이 정해져 있기에 멀리 있는 저것이 시각적 환영이라 치부할 수 있고 나는 내 길을 계속 향할 수 있다. 꿈이 없는 삶은, 원칙이 없는 길은 매우 자주, 아주 많이 저 환영을 현실이라 믿고 방향을 틀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신기루는 돈이나 명예, 사회적 지위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측면이 아닌 정면에서 등장할 때 진위를 분별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노릇일까.
크레이펜이 끝나는 지점에 뜬금없이 만난 마운트 데어(Mt. Dare) 호텔의 이정표는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사막 한가운데서 만나는 호텔의 표지. 375Km만 가면 된다는. 약 700Km의 사막 여정 중 며칠을 달려 겨우 중간 지점에 왔는데, 뜬금없는 저 표지는 이제 끝이 보인다는 희망의 알림일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경고의 표식일까. 375Km라면 포장도로에서 한나절 움직일 거리지만 모래 언덕을 헤치고 넘어야 하는 사막에서 2, 3일은 족히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거리다. 저 표지는 왜 여기 서 있는 것일까? 이건 신기루인가 현실인가?
세상의 경계 포펠 코너점심이 되기 전 포펠 코너(Poeppel Corner. S 25°59'49" E137°59'58")에 닿았다. 퀸즐랜드(Queensland), 노던 테리토리(Northern Territory),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South Australia) 세 주가 만나는 경계다. 우리네 지리산의 삼도봉(三道峯) 같다고나 할까. 한 발을 디디면 다른 주의 땅에 속하게 된다. 이제까지 퀸즐랜드의 땅을 달려왔고 잠시 노던 테리토리를 거쳤으며, 지금부터는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게 된 것이다. 지경을 넘는다는 어쩐지 뭉클한 감흥을 준다. 이동에 대한 물리적 확인이자 일탈의 경험이다. 그런데 땅 빛깔도 그대로고 그 영역에 속한 사람도 만날 수 없는 이곳에서 기둥이 정한 경계를 넘는다는 것의 의미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강이나 산맥에 의한 그 어떤 경계도 느낄 수 없는 이곳에서 땅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1968년에 새로 만들어 현 위치에 세운 1.8m짜리 콘크리트 기둥이다. 그 옆으로 나무 기둥도 있다. 측량기사 포펠(Augustus Poppel)이 1880년, 여기서 92Km 떨어진 멀리 간(Mulligan) 강가에서 낙타로 운반한 지름 25Cm, 높이 2.1m 유칼립투스 나무다. 애초에 솔트 레이크 위에 세워졌던 것이나 측량 눈금의 1인치 오차가 확인되어 1883년 현재 위치로 표지가 옮겨졌다. 비록 오리지널은 애들레이드에 보관 중이고, 현재 내가 보고 있는 것은 1989년에 세운 복제품이라지만 100년 풍상을 겪은 모습 그대로다.
불모의 이곳을 측량하기 위해 엄청난 모험을 감행했을 그네들의 노고가 오롯이 느껴지는 이 경계표지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실체는 이제 내가 다른 세상에 들어선다는 감흥보다는 인간이 나눈 인위성에 대한 허망함이다. 이 자연 속에 들어와 말뚝을 박음으로써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는 인간들 삶의 유한함. 도심 속에선 땅 한 평도 누군가의 소유 아닌 게 없고 우린 모두 그 소유를 인정하며 지낸다.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이 광막한 사막에서 이것이 어느 주에 속한다느니, 누구의 소유라느니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야말로 이 사막에 주인이 없으니 천지간 자연을 함께 누린다는 마음이었다. 엄연히 주인이 있었음에도, 이렇게 여기 말뚝은 이 땅의 소속이 어디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헛꿈을 꾸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것은 없다.하나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 권정생, <밭 한 뙈기>권정생 선생의 시 한 편이 가슴이 와 닿는 순간이다. 포펠 코너의 경계표지 앞에 있으면서도 나는 이 땅이 어디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포펠 코너를 떠나기 철제함에 보관된 방명록에 메모를 남겼다. 어느 날 이 길을 지나는 이가 있어 한글로 쓰인 글을 읽는 이가 있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인생의 모래 언덕포펠 코너 이후부터 또 본격적으로 프렌치 라인(French Line)에 올랐다.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병렬 사구를 동에서 서로 끝없이 넘고 있다는 말이다. 넘어도 넘어도 다시 나타나는 모래 언덕의 연속. 가속페달을 밟아 한고비를 넘고 나면 눈앞에 또 다른 언덕이 기다리고 있다. 다시 하나를 넘으면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나는 바보인가? 휠하우스 가득 모래를 튀기며 언덕을 오를 땐 이게 마지막이겠지 하는 헛된 기대를 갖게 된다. 심슨 사막의 끝이 아니니 사구도 끝나지 않았으리라는 의연한 마음 같은 것은 간데없고 자꾸 지금이, 눈앞에 보이는 저 모래 둔덕이 마지막일 거라는 헛된 꿈을 꾼다.
앞서도 생각했던 바이지만 사막과 인생의 간극은 채 한 뼘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이 모래 언덕을 넘을 때면 사는 것도 그러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살면서 내 앞에 모래 언덕이 없었던 때가 있는가. 심호흡하고 정신을 모아 가속페달을 조절해야 하는 고난은 언제나 있었다. 어렸을 땐 숙제나 일기쓰기도 큰 모래 언덕이었고 고등학교나 대학의 입시, 취업과 승진, 사람 간의 관계, 그 어느 것도 결코 작은 고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고개만 끝나면 왠지 그 뒤는 평탄할 것이란 헛된 꿈을 꾸었다. 내 집 마련이 끝나면 물질로 인한 고통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러나 숨을 쉬는 한 거쳐야 할 인생의 모래 언덕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우회로는 없다. 멈추든가 넘든가 둘 중 하나다. 그렇다면 나는 넘을 것이다. 다만 넘을 때의 자세를 생각한다. 지금 이 고개가 내겐 소중하다. 다음 언덕의 높이가 어떠하든, 모래의 상태가 어떠하든 지금 이 언덕을 넘지 못하면 그건 무의미하니까.
숨을 고르고 가속페달을 밟아 토크를 조절해 미끄러짐 없이 모래 언덕을 향하듯 인생에서 내가 직면한 지금 당장의 현실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미래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켜켜이 쌓인 현재의 누적분을 다르게 이르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 이 언덕에.
"우리가 보기엔 독(돌)여 독!" 드디어 프렌치 라인에서 리그 로드(Rig Road) 접어든다. 동에서 서로의 진행 방향을 버리고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특한 형태의 돌무지 지반(Approdinna Attora Knolla)을 만났다. 독특한 지형이 어쩌고 하는 안내판이 있어 차를 세웠더니 최 감독은 시큰둥해 한다.
"우리가 보기엔 독(돌)여 독!" 최 감독 어록이 한 줄 늘었다. 그래 이 광막한 자연에 별의별 환경을 접했는데 굳이 누군가가 특별한 것으로 지정했다 해서 그것에만 의미 부여를 할 게 뭐람, 하는 말로 들렸다. 모두 동의했다.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으로 사용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것이지만 유리 자르는 데나 유용할 금강석에 집 한 채보다도 더 큰 값어치를 부여하는 대중의 쏠림에 묻힐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런데 정작 내리고 나서는 이리 보고 저리 보며 관심을 보이는 이는 최 감독 하나뿐이다. 백인으로 이곳에 왔던 최초의 사람은 1886년 데이비드 린드세이(David Lindsay)이고 1936년 심슨 사막을 탐험했던 테드 콜슨(Ted Coison)도 여기서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그를 통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느낌이 새롭다. 시간차를 두고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동질감 같은 게 살짝 일어난다. 감히 자동차로 움직이는 나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낯설고 두려운 땅에 들어선 이의 마음엔 비슷한 점도 있지 않을까.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리그 로드로 들어선 이후 한동안은 병렬 사구를 돌파한다기보다 비스듬히 타넘는 형국이어서 모래 언덕을 오르는 일이 줄었다. 다만 노면이 좀 더 울퉁불퉁해 심한 요동을 겪을 뿐. 흔들리며 지나다 보니 호수의 바닥 같은 평지가 드러난다. 하얀 소금이 서리처럼 내려앉은 솔트 레이크(Salt Lake)다. 셀 수도 없는 과거엔 바다였던 곳이다.
땅 위에 덮인 흰 가루를 찍어 맛을 보았다. 짜다. 소금 맛이 난다. 당연하지 소금이니까. 소금을 맛보고 소금 맛이 난다고 놀라는 내가 이상하다. 나는 이 흰 가루들이 바다가 남긴 꿈의 흔적이라고만 생각했다. 만 년의 세월을 견딘, 그저 지워지지 않는 사막의 바다 자국이라고만. 해서 화석으로 남은 공룡들이 벌떡 일어나 움직이지 않듯이 이 가루들도 그 맛도 잃었을 것이라 착각했다. 푸른 바다로 넘쳐 일렁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죽어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바삭바삭한 모래로 둘러싸인 사막의 복판에서 여기 이렇게 오랜 세월을 견디고 아직도 자신이 바다였음을 역설하는 흔적들을 만난다는 것은 익숙지 않은 경험이다. 눈밭에라도 온양, 바다의 밑을 체험이라도 하는 양 한참을 배회하다 자리를 떴다. 전면유리에 가득한 푸른 하늘이 바닷물처럼 느껴진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돌무지, 호수 바닥이라도 마음을 연 자에게는 그냥 돌은 아니었던 셈이다.
'일상'이라는 중력 벗어나기해가 뒤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점점 앞으로 온다. 그러니까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에서는 하루 종일 태양을 피할 길이 없다. 색안경을 벗기도 어렵고 피부는 뜨겁다. 등산용 손수건으로 운전석 오른쪽 유리창에 차양을 만들었다. 뒷좌석의 아내도 수건과 웃옷을 이용해 대형 커튼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줄을 트렁크 끝에서 운전석 손잡이 쪽까지 늘여 편리하게 달았다 뗄 수 있는 커튼줄을 만들었다. 혹 젖은 빨래라도 널면 빨래걸이로도 제격이다.
그러나 계속 쏟아지는 햇살을 감당하지 못했는지 아내가 힘들어한다. 일사병 증상과 차체요동으로 인한 멀미가 겹친 듯하다. 나도 지쳐가는데 아내는 오죽 힘이 들까. 맥주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그녀가 점심 맥주 배급을 거절했으니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만하다. 아내와 같이 뒷좌석에 앉은 경숙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왼쪽에 앉아 햇볕은 덜 받았을지라도 차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었다가 땅으로 처박히는 고생스러움을 다 받아내고 있으니 몸이 말짱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이리라.
오늘은 다들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 조금 일찍 야영지를 정했다. 오후에 잠시 촬영을 놓고 운전대를 잡았던 최 감독도 어깨가 뻐근하다 한다.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 통증이 더 심해졌다. 마비처럼 움직일 수가 없고 글을 쓸 수도 없다. 오늘 이동거리 138km. 사막의 가장자리라 할 달하우지 스프링스(Dalhousie Springs)까지는 아직도 약 273km. 부지런을 떨어도 사막 일정은 진전이 더디다. 초반 일정이 늦어졌고 사막 이후의 길은 더욱 속도가 붙질 않는다. 마음이 조급해지기에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여기에 왜 왔는가. 이것은 경기인가? 경쟁자보다 빨리 이 사막을 빠져나가야 하는가?
디지털 모리스라는 엔진오일이 있다. 지금 동행하는 차에 있는 것 중 유일하게 내 걱정에서 비켜나 있는 존재다. 타이어는 순정인데 스페어는 하나밖에 없다. 스노클도 장착되어 있지 않고, 차는 6살이나 나이를 먹었으며, 달려있는 윈치는 작동이 되지 않는다. 모두의 건강도 염려스럽다. 믿을 수 있는 건 엔진오일 하나? 맞물리는 부속들 사이에 묻은 오일은 중력에 의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주개발의 수요로 점도를 높여 끝내 중력에 저항하는 오일을 만들고자 한 인간의 욕구가 탄생시킨 이 오일은 일상에 대한 내 집착을 연상하게 한다.
나는 자신의 점도를 높여 '일상'이라는 중력에 지지 않으려 안간 힘을 쓰며 산다. 그런데 어떤 때 보면 이런 몸부림이, 부속에 붙어 있으려는 점도의 안간힘이 오히려 '일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때 잠깐이라도 일상의 지속을 중단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김훈이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표현했던 그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날 여기로 인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일상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일이 아니다. 받는 보수만큼 효율적으로 빨리 과업을 완성해야 하는 의무도 아니다. 사막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않았나. 길 자체가 여행이고 휴식이지 않았나? 예정대로 퍼스(Perth)로 가, 호주 서편의 바다를 보고 되돌아오는 여정이 일정상 불가능하다면 중도에 시드니로 돌아가면 된다. 무엇이 두려운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다시 모닥불이 정겹고 어제 같은 별들이 더욱 반갑다. 낮 사막의 황홀함을 잊게 할 밤 사막의 향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