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AI)로 온 나라가 비상사태다. 특히 구제역은 지난 40여 일간의 대대적인 방역작업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확산돼 살처분 매몰한 가축수는 11일 밤 140만 마리를 넘어섰다는 뉴스가 전해지더니, 13일 오전 8시 150만 600여 마리를 넘어섰다고 한다.
고향 김제에서 한우농장을 하는 친구가 있다. 청소년기부터 친했던 친구인지라 구제역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전라도에까지 확산되면 어쩌나'하는 염려와 불안으로 나도 모르게 TV에 눈을 박고 보게 된다.
뉴스를 볼 때마다 남편을 잃는 시련을 견뎌내고 꿋꿋하게 농장을 꾸리고 있는,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을 친구가 염려되고 안쓰럽기만 하다. 안부 전화 몇 통으로 그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며 위로할 수 있으랴. 다만 오늘도 구제역이 친구의 농장에는 침투하지 말기를 바라고 또 바래볼 뿐.
이상권 소설집 <성인식>(이상권 저, 자음과 모음 펴냄)에 수록된 다섯 작품 중 네 번째, '욕짱 할머니와 얼짱 손녀'는 조류독감(AI)이야기다. 최근 40여 일간 계속되고 있는 구제역 관련 뉴스들과 내 친구에 대한 막연한 염려 때문에 쉽게 흘려 읽지 못한 소설이다.
"혹시 지난주에 촛불시위에 참석한 사람…없겠지?…얼빠진 것들. 지들이 뭘 안다고 까불고 난리야.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도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몇억 분의 1도 안되는데…혹시 우리 반에서 그런 학생이 있으면 내가 교직을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가만 안둘거야! 세상 말세야, 말세! 텔레비전이다 인터넷이다 핸드폰이다 하여 너무 말하기가 쉬워지니까, 너무들 말을 함부로 해. 대학교수니 무슨 박사니 하는 놈들까지 나서서 난리니. 집에서 가금류를 키우는 사람 손들어!"담임선생님은 수업에 앞서 이처럼 다소 위협적인 말을 한다. 조류독감 때문에 때까우(거위)들을 생매장해야 하는데도 꿈쩍하지 않는 욕짱 할머니를 함께 사는 손녀인, 필분이가 설득하여 협조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구제역과 별 상관이 없는 광우병과 촛불시위까지 운운하는 것은 필분이가 위기감을 느껴 어떻게든 할머니를 설득해주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도 방역작업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편하고 어수선해 짜증이 나는데, 할머니의 고집 때문에 교장실에까지 불려가 낯선 사람들 앞에 '국가의 명령(살처분)에 완강하게 버티는 그 할머니의 손녀딸'로 서야만 했던 필분이는 할머니를 어떻게든 설득해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을 안고 조퇴까지 하게 되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조류독감인가 지랄인가 하는 병은 옛날에는 없었다. 다 신식병이다. 양계장에다 수천 수만 마리 가둬 키우면서 생기는 병이지. 우리만이로 몇 마리 마당에다 놓아 기르는 것들은 절대 안 걸려. 눈·비 맞고 자라서 절대 안 걸려!…나는 못 한다. 절대로 때까우를 못 내준다. 내가 죽기 전에는.…때까우가 사람 같다고 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닭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성성하니 살아 있는 것들을 왜 죽이냔 말야. 그런 법은 없다. 내 생전에는…."필분이가 투정을 부리고 애걸복걸하고 트집을 잡고 그래도 할머니는 어떤 말,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뜻을 꺾으려 하지 않는다. 국가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으면 잡혀간다? 조류독감이 발생했으니 모든 가금류는 생매장 해야만 한다? 병에 걸렸다는 증거가 전혀 없는 건강하게 살아있는 생명들을 생매장 한다? 필분이 할머니에게 이런 말들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할머니가 버티면 버틸수록 어떻게든 할머니를 설득해야만 하는 책임(?) 때문에 필분이의 하루하루는 짜증만 난다. 별다른 진전 없이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자 예전에는 이들의 삶에 전혀 신경 쓰지 않던 군청 직원, 경찰, 교장선생님 등과 목사나 이장 등 조금의 안면이라도 있는 인사(?)들이라면 무조건 동원되어 욕짱 할머니의 때까우들을 노리는데….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소설은 당사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뉴스로만 전해 들으며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가축전염병 발생지역의 팽팽한 긴장과 방역작업을 둘러싼 갈등, 버스조차 마음 편하게 타지 못하는 가축전염병 발생지역 주민들의 불편함과 그로 인한 어수선한 상황 등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아마도 병에 걸리지 않아 멀쩡한 생목숨들을 절대 생매장 할 수 없다는 필분이 할머니와 방역반들의 팽팽한 대립은 가축전염병 발생지에서 쉽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대대적인 확산을 막으려면 살처분 매몰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말이다.
14일 오전 7시 TV 뉴스에 나온 "소 대신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는 충북 한 농민의 하소연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여하간 이 소설을 통해서나마 조류독감 발생지역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 뉴스로만 접했던지라 막연한 불안으로 걱정만 할 뿐, 깊이 헤아려 보지 못했던 내 친구와 축산 농가들의 입장과 마음 고생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다고 할까.
10대 임신, 성인식... 청소년의 고민과 사회문제 담은 책…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면서 울음을 짜냈다. 어머니가 알까봐 울음을 꾹꾹 눌러 누르면서 온몸 구석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던 눈물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평생 이렇게 많은 눈물을 세상으로 내보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입관을 보면서도 이렇게 눈물 이삭을 떨구지는 않았다. 상수 형님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저 곡식들을 어루만지는 두툼한 손으로 내 등을 토닥토닥 달래주었을 뿐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약간 현기증이 났으나 몸은 가벼웠다. 나는 처음으로 눈물이 얼마나 무거운지, 때로는 몸보다 눈물이 무겁다는 사실을 알았다. - <성인식>에서표제작 '성인식'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시우. 소설은 얼마 전에 맹장 수술을 해 몸이 허약한 시우가 어쩔 수 없이 사랑하던 개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을 겪으며 시우가 훨씬 성숙해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는 오랫동안 애착을 가졌던 것들과 결별하는 시우의 성인식 외에 친구 진만이의 성인식이 함께 들어 있다.
시우와도 함께 공부했던 새봄이가 진만이의 아이를 임신한다. 고민하고 갈등하던 진만이는 '부모의 길'을 선택, 새봄이 아버지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결연한 결심을 말하지만 고막이 터질 정도로 맞고 쫓겨나고 만다.
10대 청소년의 임신과 미혼모가 늘고 있단다. 청소년을 둔 부모인 내게 진만이의 성인식 통과 과정이 주인공 시우의 성인식 보다 더욱 안쓰럽고 아렸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한 생명의 부모가 되는 것보다는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10대 청소년들이 임신 때문에 얻는 것과 잃어야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내 아이들에게 꼭 읽게 하고 싶다.
'성인식'과 '욕짱 할머니와 얼짱 손녀' 외에 소녀들 사이의 우정과 왕따를 그린 '문자 메시지 발신인', 전원생활을 하면서 오리와 닭을 키우는 예븐이네가 전원생활을 꿈꾸면서도 도시적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이기적인 이웃 때문에 겪는 아픔을 그린 '암탉', 몇 년 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국소 전면개방과 광우병 파동을 바탕으로 한우 농가에 드리운 암울한 상황을 그린 '먼 나라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는 과정이다.''기억하나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소년이었던 날…''나는 처음으로 눈물이 얼마나 무거운지, 때로는 몸보다 눈물이 무겁다는 사실을 알았다.'<성인식>을 모두 읽은 것은 보름 전 쯤, 이후 다른 책들을 읽는 중에도 드문드문 떠올라 소설 속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는, 인상 깊은 구절들이다.
저자에게는 '우리시대 아동청소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란 수식어가 붙어있다. 다섯 작품 중 '성인식'과 '문자 메시지 발신인'의 주인공들은 청소년이고 나머지 작품들은 사회의 어떤 현상과 파동을 바라보는 청소년, 즉 청소년 눈에 비친 사회현상 혹은 사회문제들이다.
저자는 작품들을 통해 성(性), 정체성, 생명, 왕따, 우정 등 청소년들이 흔히 겪고 고민하는 문제들을 청소년 스스로 판단하게 하고, 구제역과 조류독감, 광우병과 미국소 전면개방 등 최근 몇 년 간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있는 중요한 사회문제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때문에 우리 청소년들이 많이 읽었으면 싶은 소설집이다.
덧붙이는 글 | <성인식> / 이상권 (지은이) / 자음과모음(주) / 2010-09-30 /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