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한 권의 책이라고 내세울 만한 책이 있을까. 젊을 땐 책을 읽다가 그래, 이것이 바로 최고의 책이야, 라고 할 만한 책도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책을 만나면서 정확하게 이 책이라고 할 만한 그 한 권의 책을 정하기란 어렵게 되었다.
많은 책들을 만났고 그 많은 책이 알게 모르게 내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당장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는 것이 물이 다 빠져나가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콩나물은 무럭무럭 자라가듯이 나의 정신의 키가 자라고 피가 되고 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시기에 만났던 책들은 또 있기 마련이다.
살아가면서 숱한 만남이 있고 그 만남 속에 오래오래 남는 만남도 있고 우연처럼 스쳐지나가는 만남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오래오래 이어져 온 만남, 그리고 나를 성장시킨 만남은 아무래도 책과의 만남이었던 것 같다. 책과 만나는 것이 또한 가장 편했고 유익했고 나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 자양분이 되었고 그것이 내 정신의 키를 훌쩍 자라게 했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정혜윤/푸른숲)에서 소개된 사람들, 진중권, 정이현, 공지영, 김탁환, 임순례, 은희경, 이진경, 변영주, 신경숙, 문소리, 박노자 열 한 명의 사람들(작가, 영화감독, 영화배우 등)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책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문화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11인의 인물을 만나, 그들 인생의 한 권의 책을 소개하는 이 책의 저자 정혜윤 역시 상당한 독서가임에 틀림없다.
저자가 소개하는 11명의 인물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던 책들과 책을 매개로 한 짧은 전기 같은 책. 진중권은 독서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추천도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목록을 만드는 것(p30)이다. 그가 책을 읽는 이유는 감동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자기만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것'. 일상생활에서 어리버리 그러나 자의식만은 강했다는 정이현, 5학년 때의 경험은 이렇다.
"그러니까 5학년 때인가 처음으로 교보문고에 갔어요. 그런데 가서 혼자 울기 시작한 거예요. 이 세상에 이렇게 책이 많구나! 라는 놀라움이 '나는 참 미미한 존재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진 거죠. '언젠가 내 책을 여기에 못 꽂아놓고 죽는다면 나는 아무 존재도 아니구나'라고 생각 했죠"(p48)
'내 꿈이 네모난 상자 속에 박제되어 있다'라는 문장을 씀으로써 명실공히 시 잘 쓰는 학생으로 선생님의 과보호를 받으면서 온갖 백일장을 휩쓸어 스타가 되고 그 덕에 고교졸업 무렵엔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공로상까지 받았단다.
세 살 때 초등학생 오빠의 책가방을 뒤져서 한글을 통으로 익히고 혼자 힘으로 <소년 한국일보>에 연재되던 이원복교수의 만화를 읽은 후 그 내용을 저녁식탁에서 가족들 앞에서 발표해 온 가족을 놀라게 했고, 일곱 살 무렵에는 소설 <봉순이 언니>에서 묘사되었던 그대로 식모였던 봉순이 언니의 옆집 식모인 미자 언니가 노는 동안 그 옆에서 무심한 얼굴로 <선데이 서울>을 보며 놀았던 아이. 초등학교 때는 프릴 달린 원피스를 입고 아현동 골목을 다니던 주인집 딸로 왕따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책을 읽는 아이가 되었다는 공지영 작가.
영문도 모르고 영문학과에 갔고 지금도 누가 영어로 말을 시킬까봐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공지영은 다니던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노동현장에 갔다가 구로구청 사건으로 잡혀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두려움으로 벽을 보고 앉아 울면서 생각했단다. '난 이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딱 한 가지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뭘까?' 벽을 보며 울며불며 생각하다가 그게 바로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 나이 스물네 살 무렵의 일이다. 그것이 데뷔작 <동트는 새벽>의 배경이 되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로 초특급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유명세도 치러야 했다. 결국은 '고통만이 인간을 키운다'는 것을 경험했다. 세상과 자신의 화해, 살기 위해서 읽었다고 말한다.
열세 살 이전과 이후로 그의 삶이 나누어진다는 김탁환, 어린 나이에 병이 걸렸던 것이 느릿느릿한 행동과 2층에서 관찰하는 시선을 얻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한 권의 책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이다. 중학교에 가서 책에 취미가 생겼다는 임순례(영화감독), "책을 통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게 좋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시기가 중학교 때였다. 그때의 난독이 영화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단다.
<새의 선물>작가 은희경, 자신이 현재 가진 문학의 전 자산은 초등학교 때의 글자중독에 가까운 닥치는 대로 한 바퀴 도는 독서편력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때만큼 신나고 즐거운 일은 없었단다. 학교에서 적어 내던 장래희망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는 아이'였다니 할 말 다했지 뭔가.
"집에 배달되던 농민신문인 <새농민>도 열심히 읽고 <건설회보>도 읽었어요. 읽는 것에 대한 갈증이 심했어요. <소금소총>같은 금서도 초등학교 때 읽고 <한국 고전 해학전집>도 읽고 밤색 표지였던 여섯 권짜리 <강소천 아동문학전집>은 아주 좋아했어요. <새농민>이 오면 연재소설을 꼭 읽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 줬어요."(p143)
'한 권의 책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카프카가 말한 것처럼 모든 작가들에게는 그들이 만났던 그 한 권의 책, 혹은 많은 책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공통점은 작가적인 싹수 혹은 끼가 어렸을 때부터 보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들의 작가적인 '단초'를 찾아 사람 책 11권을 만나 그들 인생의 소중한 순간, 작가적인 끼의 배경과 그것을 펼쳐 놓게 된 실마리를 찾아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에 펼쳐놓았다. 한 권의 책이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였던 작가들의 이야기, 여기에서 또 그들이 즐겨 읽었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수많은 저서들을 소개하고 있어 책에서 책을 만나는 기쁨 또한 크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책을 읽었을까. 작가적 '끼'란 무엇일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11명의 인물, 그들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책과 책과의 인연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한 그대,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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