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만주기행 첫날(10일) 심양에 도착해서 '9·18기념관', '조선 문서점', '서탑거리', '중산광장' 등을 둘러보고 저녁은 감자탕을 먹었다. 감자탕 전문 식당이었는데 규모가 크고 청결했다. 방에 들어가니까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만주를!" "위하여!"여기저기 돌아다녀서 그런지 의자에 앉으니까 피곤했다. 맥주를 몇 병 주문해서 박영희 시인의 제안으로 '만주를, 위하여!'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박 시인이 선창하고 참가자들이 받았는데, 어른보다 학생들 목소리가 더 크고 우렁찼다.
돼지 등뼈와 시래기, 감자 등이 들어간 순수 한국식 감자탕이었다. 국물이 얼큰하고 진해서 감칠맛이 더했다. 뼈에 붙은 고기도 쫄깃하면서 고소했는데 한국 감자탕보다 맛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일행들도 하나같이 맛있다며 좋아했다.
주인의 영업 마케팅과 한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음식을 강조하려는 듯 감자탕을 끓이는 무쇠솥 둘레 세 곳에 한글로 '참 이 맛'이라고 조각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고소한 김치 부침개도 서비스로 나왔는데 입맛을 한껏 돋워주었다.
싱싱한 쑥갓 냄새는 조금 느끼하고 거북해지기 쉬운 돼지 냄새를 제거해주었다. 감자탕과 음식궁합이 맞는 깍두기와 쌈장 등 밑반찬도 개운했는데, 한국에서 이름난 감자탕 전문가를 주방장으로 초빙해왔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식사 끝나고 안마소로 식사가 끝나갈 무렵 누군가가 '안마' 이야기를 꺼냈다. 중국, 특히 심양은 안마가 끝내준다는 거였다. 날도 춥고 피곤한데다 기차 시간도 넉넉하니까 받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나도 동의했다.
인솔자가 안마할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니까 처음엔 서먹서먹해 하더니 조금 있으니까 모두 들었다. 해서 잠시 시내를 둘러보겠다는 한 사람 빼고 안마소로 향했다. 한꺼번에 들어갈 안마소를 찾아 들어갔더니 생각보다 화려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전신 안마를 1시간 받는데 50위안(9000원), 발 안마는 30위안이라고 했다. '발 안마'를 '발 수리'라고 해서 웃음이 나왔는데 중국은 가족이 함께 안마를 받으러 다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와 문화 차이를 느꼈다.
40대 초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고 스트레칭을 40~50분씩 해오고 있는데 건강에 무척 좋다고 검증받은 기분이 들었다. 근육과 관절에 힘을 주는 방식과 순서가 아침마다 하는 스트레칭과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하는 분들에게 불면증·두통·고혈압은 물론 굳은 근육이나 관절을 푸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안마를 한 번쯤 받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긴장과 피로가 풀리면서 잠도 잘 자고 이튿날을 상쾌하게 시작했던 경험이 있어서이다.
안마소에서 밖으로 나오니까 기분이 상쾌하고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밤바람도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학생들도 안마를 잘하더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다른 일행도 몸이 시원하다고 했다.
조심해야 할 게 있는데 이상한 행동이다. 한국의 퇴폐이발소나 안마소로 생각하고 함부로 더듬거리다 안마사 아가씨와 시비가 붙으면 큰코 다치기 때문에 손을 조심해야 한단다. 경찰서에 끌려가면 해결 비용(?)이 장난이 아니라고.
심양역에서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
안마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심양 북역에 도착해서 보니까 밤 8시 2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승객이 여름보다 많지 않은 것 같았고, 퀴퀴한 냄새도 덜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밀고 밀리면서 북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보안검색대를 거쳐 개찰을 하는데 40대로 보이는 여성 역무원이 미소 띤 얼굴로 친절하게 안내했다. 굳은 표정만 봐오던 터라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승객에게 따뜻하게 대했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긴장은 되었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검색대를 통과했다. 여유 넘치는 여성 역무원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활짝 웃어주었다. 그의 웃음에서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 촬영을 조심해야 하는 심양 공항과는 대조적이었다.
인솔자가 기차표를 나눠주는 데 5호 차 6인실 침대(잉워) 17호 2층이었다. 중간층이어서 자리는 괜찮은데 일행들과 객차 번호가 달라 서운했다. 하얼빈에는 이튿날(11일) 새벽 5시 28분에 도착한다고 했다. 장거리 열차라고 하지만, 승차시간은 7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박영희 시인은 중국에서 침대칸 열차를 탈 때 조심해야 할 점을 알려주었다. 침대 열차는 객차마다 담당하는 역무원이 있어서 정차할 역이 가까워지면 도착하기 5-10분 전에 화장실과 출입문을 닫기 때문에 눈치껏 움직여야 한단다.
대기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에 일행들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메모하는 모양이었다. 특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메모하는 학생들 모습이 보기 좋았다. 노트북을 가져와 정리하는 일행도 있었다.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까 메모도 하고 주변도 둘러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잠시 쉬고 있는데 인솔자가 오더니 화장실에 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함께 갔다. 800만 가까운 도시의 기차역 화장실치고는 시설이 너무나 열악했다. 손을 닦고 나오는데 검은 선글라스를 쓴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으나 조금 지나니까 이해가 되었다.
"선생님은 어데서 왔서예?""한국에서 단체로 겨울 만주기행 왔습니다. 아주머니는 어디에서 오셨나요?""그래요. 저도 한국 경기도 안양에 있는 식당에서 7년쯤 지내다 왔드랬시요. 대굴(대구)로 시집간 딸 보러 나갔다가 한참 눌러 앉았드랬지요. 비자 연장하려고 대련에 있는 친언니랑 동무해 가지고 영사관에 왔다가 가려고 이래 기다리는 거라예. 비자가 일주일 있어야 나와서예. 근데 성씨가 뭐라요?""저요, 조(趙)씨입니다." "야, 나라 조씨, 우리하구 한 본이네. 참 반갑네요." 동생은 46세, 언니는 49세라고 했다. 대련에 산다는 언니는 내 목에 걸린 명패를 보고 이름을 알았다고. 그래서 동생이 말을 걸어온 모양이었다. 부모도 오빠도 없고, 고향도 잘 모른다는 자매는 이산가족 상봉 때 만난 친척처럼 이것저것 성가시도록 교대로 물었다. 대화 시간은 짧았지만, 이어지는 질문에서 그들이 얼마나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직감할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까 기차 출발 시각이 30분밖에 남지 않아서 헤어져야 했다. 자매는 밤 12시 차여서 1시간 3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며 서운해했다. 인사를 건네고 자리로 돌아와 짐을 챙기는데, 자매는 창가에서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죄지은 것도 없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가 숙여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