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영상 기온입니다. 겨울이 봄을 안고 있다기에 카메라를 멥니다. 갑갑한 아파트를 빠져 나와 확 트인 갑천 변을 따라 걷습니다. 다사로운 햇살과 적당한 온도가 언제 그리 추웠냐는 듯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썰매 날을 받쳐주던 단단한 빙판이 마치 빙수를 만드는 듯 녹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두꺼운 얼음도 밤과 낮을 지나며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다가 결국은 녹아내리겠지요. 그런 자연의 순리 때문에 우리네 삶에 위안이 됩니다.
냇물은 드넓은 바다로 흘러가기 전에 얼음으로 뼈대를 만들어 지붕을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추우면 추울수록 더 두껍게 얼고서 깊고 깊은 사랑방에 수많은 생명들이 모여 봄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그런데 이를 어쩌지요? 작살을 쥐고 물속을 더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날씨가 좀 풀렸다 해도 물속에 들어간다는 일이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살며시 다가가 묻습니다.
"뭐 잡으시는 겁니까?"
"어따, 십 년만에 한 번 와 봤는디 붕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유. 옛날에는 제법 큰 붕어들이 있어서 몇 수씩 찍어내긴 했는디, 약삭빠른 배스(외래어종) 놈들만 가득하고 당췌 힘만 드네유. 이거 봐유. 이게 바로 배스 새끼잖아유."
양파자루 안에서 작살 꼬챙이보다 작은 배스 새끼 한 마리를 꺼내 보여줍니다. 전혀 감탄하지 않는 내게 아저씨는 한 마디 덧붙입니다.
"좀 전에 가물치 큰 놈을 한 마리 찍어서 얼음 위에 올려놓고 어망에 담을라고 하는디 쏜살같이 도망 가버렸다니께. 어허! 그 놈만 했어도 오늘 제법 짭짤했는디..."
"아, 네에~ 애쓰시네요. 말씀 주셔서 고맙습니다."
속으로 웃고 다시 걷습니다. 요즘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샐던 교수가 강의하는 '정의란 무엇인가'가 대유행이지요. 냇물에서 작살을 들고 고기 잡는 사람에게 샐던 교수는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아마도 그는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겠지요. '그의 행위는 정의로운가, 정의롭지 못한가?' 이렇게 말입니다.
저는 속으로 대답했습니다. '고기를 잡으려는 그의 목적은 이해되나, 행위는 정의롭지 못하다. 잡는 도구가 작살인 데다 하천 진입은 위험천만한 일이니까'라고요.
흐르는 물은 쉽게 얼지 않습니다. 햇살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흐르는 냇물에서 봄의 생기를 느낍니다. 천변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풀리지 않았던 일도 해빙기를 맞아 다 풀리고 있는 듯합니다. 지나치게 경직됐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언어들이 날씨가 풀리면서 좀더 세련되고 오해도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돌멩이의 온기가 얼음을 녹입니다. 얼음이 물로 변해 돌멩이 주변을 어루만집니다. 때론 홀로, 때론 여럿이 얼음과 한몸으로 살았으나 돌멩이와 얼음은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이별하지 않고 사랑을 어떻게 알까요?
비상하는 철새가 카메라에 잡힙니다. 시인 황지우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데 우리는 제 자리에 주저앉는다'며 군사독재시절 영화관에서 애국가를 부르던 상황을 토대로 당대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비상하는 새들처럼 자유를 추구했지만 군부독재 현실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지요. 저 날아가는 새들을 보며 현재의 나를 돌아봤습니다. 군부독재시절도 아닌데 무언가에 묶여 있다는 갑갑함이 짓누릅니다. 봄이 오면 좀 나아질까요?
강물이 녹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힘 있는 자도 언 강을 녹이지 못합니다. 대자연의 순리를 역리로 막아서려는 억지가 횡행합니다. 나를 둘러싼 정치, 사회가 공정하고 건강한지 묻습니다. 정의로운 목소리들이 생떼와 권력 앞에서 사장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품습니다.
춘란이 봉오리 가득 향을 머금고 피어나기를 기다립니다. 저 어린 식물들도 형형색색 찬란한 꽃을 만들어내겠지요. 지독하게 추웠습니다. 모처럼 되찾은 영상의 기온 속에 수많은 생명들이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새봄이 옵니다. 우리 사는 세상에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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