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겨울 만주기행 둘째날(11일) 오전 5시 25분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사우나에서 몸을 풀고 아침도 먹고, 차도 마시는 등 휴식을 충분히 취한 우리는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타고 '731부대'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기념관에 도착하니까 오전 9시 20분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몹시 추웠고, 운동장은 하얀 눈밭으로 덮여 있었다. 두 번째 방문이어서 낯설지는 않았으나 사진으로 봤던 생체 실험의 참상들이 언뜻 떠오르며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꼈다.
생화학 무기와 생체 실험을 위해 조선, 중국, 러시아, 몽골인 등 3000명 이상의 무고한 생명을 독가스, 동사, 세균 등의 실험 '마루타'로 사용했다는 내용이 적힌 비석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까 작년 8월에 안내했던 여성 해설사가 우리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전시실에서 만난 중국 인민해방군전시실에서는 중국 인민해방군(중국군) 1백여 명이 단체로 관람하고 있었다.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했고, 일부는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미루어 중국군도 일제의 만행에 관심이 상당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육군으로 보였는데, 놀란 것은 그들의 차림새와 체격이었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방한모에 누비옷을 걸치고 인해전술로 내려왔을 때의 꾀죄죄한 차림만 기억에 남아 있는데 세련된 복장에 체격들도 우람했기 때문이었다.
배곯는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궁기(窮氣)를 발견할 수 없었고, 이웃 전시실로 이동할 때 걸음걸이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중국군의 행동과 표정이 3년 전 이맘때 개성공단을 다녀오면서 봤던 북한군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또 한 번 놀랐다.
북한군은 우리와 적이고, 중국군은 친교를 맺고 있는 나라의 군인임에도 반가움보다는 야릇한 질투심이 느껴졌다. 초라한 차림의 10대와 30대가 병영생활을 함께하는 북한 병사들이 초라하고 불쌍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악마의 소굴 같은 731부대흑룡강성(헤이룽장 성) 하얼빈시 평방구에 주둔했던 일본 관동군 731부대는 일왕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1932년 창설되어 1945년까지 전쟁포로와 민간인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과 세균전을 연구했던 악마의 소굴 같은 곳이다.
관동군 관할 구역 내의 정수 업무를 하는 곳으로 위장했던 731부대는 인근 지역을 통과하는 기차는 커튼을 모두 내려야 하고 창밖을 내다보는 승객은 그 자리에서 체포·심문하는 규정이 존재하였을 정도로 보안이 철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설사는 많은 실험과 해부가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살아 있는 상태에서 마취 없이 이뤄졌고, 대상은 대부분 중국인이었으며 한국과 몽골인도 다수 있었고, 러시아, 유럽, 미국인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희생자는 30만 명에 달한다고.
일제는 군인 포로 외에도 노인과 어린아이, 영아, 여성들, 임산부 등 신분을 가리지 않는 잔악상을 보였단다. 해설사는 731부대의 중국인 노동자들도 결국엔 생체 실험 대상이 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인 희생자 9명의 신원도 밝혀졌는데, 한성진, 이청천, 고창률, 이기수, 심득룡, 김성서, 서인춘(여), 유희성, 장하병 등으로 대부분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일본 헌병에 체포된 독립투사들이었다. 일본 규슈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8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 윤동주 시인의 예에서 보듯 생체 실험은 다른 지역에서도 흔하게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의 잔악한 생체 실험
731부대는 영하 40도에서 사람 내장 꺼내기와 동상실험, 철통에 넣고 공기를 빼내는 '생체진공 실험', 말의 피를 혈관에 교체 주사하는 '인마혈 교환실험', 전차나 장갑차 안에 집어넣고 화염방사기를 발사하는 '무기성능 실험' 등 만행을 저질렀다. 임산부에게도 시행되었는데, 어떤 때는 의사에 의해 수태되고 그 태아는 꺼내졌단다.
사람을 기둥에 묶고 페스트에 걸린 벼룩을 담은 세균탄을 터뜨리는 '세균집체 감염실험', 페스트나 장티푸스, 콜레라 등과 같은 세균을 인체에 주입하는 실험, 폐와 뇌 등 장기 일부를 잘라내는 실험, 개복 후 위를 잘라내고 장과 식도를 연결하는 실험, 팔다리를 잘라 출혈을 일으켜 쇼크사 하는 시간을 재는 실험도 했다고.
기념관 1층과 2층에는 생체 실험과 세균전 연구 관련 자료사진과 실험 도구, 당시 실험에 가담했던 일본군 생존자들의 증언록 등이 진열되어 일제의 잔악상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본인 특유의 잔인함과 교활함이 엿보이기도 했다.
일제는 조선과 중국에 끔찍한 전화(戰禍)를 남겼다. 난징 대학살 때는 30만에 이르는 중국인을 학살했으며 '731부대'는 세균전 폭탄을 만들었고, 무고한 농민을 총검술 연습의 대상으로 삼아 살해하거나 '수술실습'의 도구로 삼아 산 채로 해부했다.
고귀한 인간의 생명을 짐승보다 못하게 여겼던 일제였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패전국이 된 지 70년이 되어가도록 피해국과 피해자들에게 보상은커녕 공식적인 사과조차 하지 않고 우리가 언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잡아떼고 있다.
731부대 군의관들, 기자회견 통해 실토
지난 95년 5월 15일 731부대 군의관 출신들이 일제의 생체실험과 세균전 만행을 인정하면서 일본 정치인들을 비판하고 일본 정부에 사과를 촉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어 충격을 줬었다.
당시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유아사 켄(당시 83세)씨는 전쟁포로들을 상대로 장기 제거와 신체 절단 등 야만적인 인체실험을 했다고 실토했다. 이어 "우리는 당시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실험을 했다, 우리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며 잘못을 반성했다.
유아사는 일본 정치인 중에는 성전을 수행했다고 믿는가 하면 생체실험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부류들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일본 정부가 과거의 만행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함께 자리한 시노즈카 요시오(78)씨는 "우리는 종전 후에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됐다, 국가의 양심이어야 할 의회의 사태 인식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전쟁 중에 우리는 집단적으로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천황의 명령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중국 동북부 대련에서 경찰로 근무했다는 미오 유타카(82)씨는 "4명의 중국인과 한국인 첩자들을 인체 실험을 위해 731부대로 보낸 사실이 있다"고 밝히면서 "이 같은 행위를 저지른 것을 깊이 후회한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결탁으로 살아남은 전쟁범죄자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은 1945년 8월 말 일본에 상륙하자마자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을 비롯한 주요 생체실험 관련자 전원을 체포했다. 그러나 비밀거래를 통해 일체의 정보와 자료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관련자 모두 전범으로 처벌하지 않았다.
731부대의 잔인한 행위가 국제연합에 의해 전쟁범죄로 선포되었음에도 패전 후 일본 의학계는 그 어떤 반성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도 전쟁의 피해자다', '그건(2차 세계대전) 침략전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등 억지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일왕 히로히토가 731부대의 세균전을 승인한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일본 의과대학 출신 젊은 의사 중 상당수는 731부대를 긍정적으로 보는가 하면 의학발전에 이바지했다고 믿는다니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생체 실험으로 죽어간 시체들이 발굴되고 가담했던 군의관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일본이 이를 부인하는 배경에는 미국과 결탁하여 살아남은 731부대 출신들이 전후 일본 의료계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 더욱 가슴이 아프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