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2월 4일)이 지나니 날씨가 풀리고 얼었던 강물이 슬슬 녹고 있다. 우수(2월 19일)가 지나면 대동강 물도 녹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봄이 오면 가장 수난을 당하는 나무가 고로쇠나무들이다. 사람들이 고로쇠나무에 구멍을 뻥뻥 뚫어 몸에 좋다는 고로쇠 수액을 받아내기 때문이다.
이곳 지리산과 백운산 자락은 고로쇠 물을 받아내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양력으로 입춘이 지나면 백운산 자락을 비롯하여 구례, 담양, 화순 등 따뜻한 남쪽지방은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느라 부산하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고로쇠나무마다 구멍을 뚫어 고무호스를 페트병과 연결하여 수액을 빨아 내리고 있다. 페트병도 다양하다. 참OO, 잎△△, □□트 등 술병들이 총동원되어 마치 술병들의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뼈를 튼튼하게 한다는 골리수(骨理水)나무
고로쇠 수액에는 칼슘, 마그네슘, 자당 등 미네랄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관절염은 물론 이뇨, 변비, 위장병, 신경통, 습진 등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로쇠 수액은 골다공증 등 뼈를 튼튼하게 해주기 때문에 골리수(骨理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액은 거의 색깔이 없으며 약간 단맛이 난다. 경칩(3월 6일)을 전후해서 받아낸 수액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거나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수액이 잘 나오지 않는다. 나무줄기가 30cm 이상 된 나무에서 수액을 얻기가 가장 좋다.
봄에 고로쇠 수액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잎이 없는 겨울나무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고 호흡만 한다.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면 이산화탄소가 나무 속 물관에 녹아들어 물관이 진공상태가 된다. 그 압력차에 의해 뿌리에서 물이 빨려 올라온다.
낮이 되면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기온이 올라가 기체가 팽창하고 물관 속의 압력이 올라간다. 이때 외부에서 구멍을 내면 내부의 압력에 의해 수액이 밖으로 흘러나온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면 클수록 물의 양이 늘어난다.
바야흐로 봄은 고로쇠 수액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 언 땅 속에서도 고로쇠나무는 물을 힘차게 빨아올린다. 실제로 화창한 봄날 청진기를 나무에 대고 가만히 들어보면 수액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말에 몇 만 원씩 하는 고로쇠 수액을 철따라 마시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밤새 고스톱을 치며 짠 오징어나 북어포를 잘근잘근 씹으며 두세 말씩 마신다고 한다. 택배로 주문을 해서 마시는 사람들도 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채취현장에서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이 고로쇠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병사들이 섬진강을 끼고 중간에 서 있는 백운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 신라 병사가 목이 말라 샘을 찾았지만 눈에 보이질 않던 차에 마침 화살이 꽂힌 나무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갈증이 심한 병사들이 그 물을 마셨더니 갈증이 해소됨은 물론이도 힘이 용솟음쳐 백제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했다고 한다.
봄이 오면 고로쇠나무는 아프다
그러나 봄이 오면 고로쇠나무는 아프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인간은 고로쇠나무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칼로 예리하게 자국을 내 수액이 흘러내리도록 하였지만, 요즈음은 전동드릴로 구멍을 뚫어 고무호스를 삽입하여 채취하고 있다. 칼로 자르든 드릴로 구멍을 뚫던 생살을 찢어내고 구멍을 뚫으니 나무는 얼마나 아프겠는가?
겉으로 보면 마치 나무가 링거 주사를 맞는 모습이지만 정반대다. 나무의 골수를 빨아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 좋을지는 모르지만 나무가 생장하는데 필요한 수액을 사람들이 몸에 좋다고 가로채 마시고 있으니 나무로서는 죽을 맛이다.
고로쇠나무는 단풍나무과(Aceraceae)에 속하며, 잎이 5~7개로 오리발처럼 갈라지며 푸름을 간직한다. 연한 초록색 꽃이 피고 5월에 열매가 달려 바람이 불면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며 멀리 날아가면서 종자를 번식한다. 가을에는 붉게 단풍이 들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당국은 고로쇠 수액 채취를 엄격히 제한하여 나무가 죽어가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야 한다. 인간에게 이처럼 이로움을 주고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만큼 보호도 잘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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