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일주일 사이에 날씨가 확 풀렸다. 지난 1월 29일 춘천 날씨는 영하 15도였다. 일주일 뒤인 지난 2월 5일, 춘천은 영하 6도였다. 입춘이 지나니 봄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나 보다, 싶었다. 그날, 춘천 봄내길 2구간 '물깨말구구리길'을 걸었다. 걸어보니 길 곳곳에 겨울이 잔뜩 웅크리고 있어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더라.
물깨말구구리길이라니 길 이름, 참으로 특이하다. 제대로 외우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다, 싶을 만큼. 하지만 뜻을 알면 쉽게 외울 수 있다. 물깨말은 강촌의 옛 이름이란다. 물깨 즉 물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다. 구구리길은 구구리 마을에서 갖고 온 것이다. 골이 깊고 아홉 구비를 돌아든다 해서 구구리라는 이름이 붙었다나.
뜻을 알고 다시 불러보니 낯선 느낌은 사라지고 되레 정겹게 여겨지면서 입에 착 달라붙는다. 우리 옛말은 이토록 정감이 있고 아름다운 것을, 어째서 지명을 한자어를 갖다 붙인 이름으로 바꾼 것인지, 아쉽다. 이제라도 옛 이름을 찾는 건 어떨까?
춘천 봄내길 4개의 구간 가운데 가장 긴 3구간 '석파령 너미길'은 지난 1월 29일에 걸었고, 이번에는 2구간인 '물깨말구구리길' 걷기에 나섰다. 이 길, 강촌역에서 시작되어 강촌역으로 돌아오는 원점 회귀 구간이다. 거리는 13.7km. 3시간 반이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길은 대부분 가파르지 않고 걷기 좋은 임도라 힘도 별로 들지 않는다. 산책하듯 즐기면서 걸을 수 있다. 걷기에 이력이 난 사람이라면 구간 거리가 좀 짧아 아쉽겠지만.
이날도 남편과 동행했다.
설날 연휴라서 그랬을까? 그날, 경춘선 전철은 미어터지기 직전이었다. 강촌역까지 한 시간가량을 내내 서서 가야 했다. 한데 그건 약과였다. 돌아올 때는 그보다 더했다. 딱 출근시간대의 만원 전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얼굴도 제대로 돌리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말 다했다. 걷는 것보다 전철을 타고 서서 오가는 게 더 힘들었다. 가급적 주말에는 경춘선 전철을 타지 않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긴 전철 안에서 경로석에 앉은 할아버지 한 분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평일에는 텅텅 비어 가는데, 주말에는 늘 이래." 상봉역에서 10시 40분에 출발하는 완행 전철을 탔더니 강촌역에 11시 45분 즈음에 도착했다. 구간 거리가 짧아 아침에 서두르지 않고 집에서 느긋하게 출발했기 때문이다.
날씨, 진짜 포근했다. 내리쪼이는 햇볕이 어찌나 따사롭던지, 봄이 코앞까지 성큼 다가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길은 여전히 눈으로 덮여 있었다. 양지바른 곳은 일부 눈이 녹아 흙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얼어붙은 계곡... 봄이 오려면 멀긴 멀었다
강촌역에서 구곡폭포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외줄기라고 할 수 있다. 길을 따라 그냥 걸으면 된다. 구곡폭포 입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산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봄내길 이정표가 있으니, 확인하고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봉화산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등산로라고 했지만, 자동차 바퀴 자국이 길게 이어진 너른 임도가 펼쳐진다.
길은 경사가 완만했다. 날이 풀렸지만 아직 얼음이 녹을 정도가 아니라 길옆 계곡물은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아직 봄이 오려면 멀긴 멀었다. 며칠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다가 다시 매서운 추위가 몰려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으니까.
그렇거나 말거나 날씨가 너무 포근해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바람막이 점퍼까지 벗어야 했다.
한 시간 반쯤 걸으니 쉼터가 나온다. 탁자에 의자까지 갖춰져 있다. 오호, 점심식사하기 딱 알맞은 곳이군. 그렇지않아도 쉼터에는 먼저 온 대여섯 명의 무리가 모여앉아 왁자지껄하면서 라면을 끓여 먹는 중이었다.
우리도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코펠과 버너를 꺼냈다. 확실히 기온이 올라가니 물이 빨리 끓는다. 날씨가 많이 춥지 않다면 가볍게 도시락을 준비하는 게 번거롭지 않고 좋다. 우리는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지만, 뜨거운 국물을 먹을 수 있는 라면도 끓였다. 날씨가 풀렸다고는 하나, 겨울은 겨울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한기가 몰려올 수밖에 없다. 점심을 준비하기 귀찮으면 문배마을까지 걸은 뒤, 그곳에서 매식을 해도 된다.
식사를 마친 뒤, 주변 정리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봉화산 정상은 쉼터에서 그리 멀지 않다. 우리는 갈림길에서 문배마을 쪽으로 길을 잡았다.
문배마을은 구곡폭포 위에 있는 산꼭대기 마을로 예전에는 외딴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마을이 전부 음식점으로 변해 외지인들을 반기고 있다. 한 때 오지였던 마을이 걸어서도, 차 타고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되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 것이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빙벽 오르는 사람들로 구곡폭포는 '장관'
문배마을을 지나 구곡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길은 대부분 내리막길이었다. 그 길, 가파르기도 하거니와 가장자리에 눈이 얼어붙어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얼음이 박힌 내리막길을 보니, 겁이 덜컥 난다. 저런 길에서 늘 넘어졌기 때문이다. 자주 넘어지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으윽, 결국 그 길을 종종걸음으로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길옆에 잡고 오를 수 있는 줄이 매어져 있지만 그걸 잡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진다, 나처럼. 길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으나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하여간에 엉덩이가 고생이다.
물깨말구구리길의 백미는 구곡폭포였다. 50미터 높이의 폭포가 꽝꽝 얼어붙은 것도 장관인데, 그 위에 자일을 길게 늘어뜨린 채 빙폭을 타고 있는 사람들까지 어우러지니 더 볼만 하다. 아이젠을 신고, 손에는 피켈을 든 채 정신없이 빙벽을 오르는 사람들. 어떤 사람은 천천히 한 발 한 발 위로 올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아주 빠른 속도로 빙벽을 미끄러지듯이 올라가기도 한다.
빙벽은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지만 아주 오래 전에 암벽 등반은 몇 번 해본 적이 있다. 그때 사람들이 왜 위험한 암벽등반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빙벽도 마찬가지가 아닐지. 체력만 받쳐준다면 빙벽도 도전해보고 싶지만, 참아야지.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남편이 웃으면서 묻는다.
"해보고 싶지?"폭포 아래는 빙벽 타기를 마친 사람들과 빙벽을 타려는 사람들로 엄청나게 붐빈다. 그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붐비고.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다. 이래서 세상 어딜 가도 구경거리가 넘친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구곡폭포까지 내려오면 봄내길 2구간 '물깨말구구리 길'은 걸은 셈이 된다. 물론 이곳에서 다시 강촌역까지 걸어가야 하지만. 확실히 구간 거리가 짧아 실제로 걸은 시간은 3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정도에서 걷기를 마친다니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