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부가 이룬 꿈의 박물관이다. 평생을 꿈꿔왔던 촌부의 꿈이 강진군의 도움으로 현실이 되었다. 전라도의 질박한 사투리와 우리네 삶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생활용품이 가득한 생활사 박물관, 이름 하여 '와보랑께 박물관'이다.
먼 길을 재촉했건만 짧은 겨울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고 있다. 고향마을처럼 포근한 산자락에 오롯이 자리 잡은 박물관에 인적은 없고 뒷산 자락의 새 울음소리만이 가득하다. 유난히 추운 날씨 탓일까. 입간판에 쓰여 있는 사투리 중 '군불 때고 갈랑께 얼릉가야' '꼬랑지가 달렸냐 문 안 닫고 다니게' 이 두 구절이 눈에 밟힌다.
바람이 차갑다. 하늘엔 반달이 내려다보고 있다.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찬바람과 함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간다. '뎅 뎅 뎅~' 종을 울리자 동네 마실을 다녀오던 아낙이 다가온다. 이곳 박물관장의 아내다.
와보랑께 박물관은 강진군의 예산 지원을 받아 올 1월 22일 문을 열었다. 박물관 내부 전시물은 김성우(와보랑께 박물관장)씨 부부가 짬짬이 구입하고 구경 온 손님들이 버리기 아까우니 이곳에 전시하라며 가져다 준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군비 2억을 지원받고 사비(1억 원)를 탈탈 털었어요. 강진군의 도움이 없었으면 언감생심 꿈이나 꿨겠어요."
투박하고 고단했던 우리네 조상들의 삶 오롯이 담겨
와보랑께 박물관은 무료입장이다. 그가 20년간 꾸어왔던 꿈의 산실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관람객들에게 그냥 무료로 개방한 것이다. 이곳에 전시된 물품은 3천여 점이나 된다. 말끔하게 단장된 '와보랑께 박물관'은 2층 건물이다. 1층에는 각종 생활용품과 가구, 고서를 2층에는 농기구를 전시하고 있다.
난로위에 놓인 노란 도시락이 옛 향수를 불러온다. 놋쇠로 만든 찻상, 재봉틀, 축음기, 고서, 갖가지 생활용품과 그림 등 어느 것 하나 쉬 지나칠 수가 없다. 투박하고 고단했던 우리네 조상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있다.
김 관장은 '토기와 황동그릇'에 애착이 간다고 했다. 그의 아내(59·강임수)는 남편의 자작시인 '옛집'이라는 시가 가장 정이 가는 물품이라고 했다.
"시집와서보니 남편이 시어머니와 오두막에서 살데요, 오두막집에서 5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옛집' 시에는 그때의 삶이 그대로 꾸밈없이 담겨 있답니다."
박물관장 김씨의 자작시 '옛집' 한 토막이다.
작은방 앞 나무칸은 갈쿠나무 가득했고
이곳은 동네친구들 사랑방이라
이불속에 발만 넣고 빙 둘러 앉아
무스 얘기로 밤새다 그대로 포개자고
밥 때 되면
밥 묵어라 하고 식구들이 찾았다.
시 구절구절에는 시골 오두막의 정겨움이 오롯하다. 힘들었던 신혼 시절의 세월이 멈춰선 듯 시구에 그대로 담겨있다. 그의 아내는 그래서 더욱 정이 많이 간다고 말했다.
"강진군의 지원이 없었으면 돈 한 닢 없이 촌에서 이런 큰 건물을 어떻게 짓습니까? 예산을 지원해줘서 너무너무 고맙죠. 농자재를 쌓아 둔 창고에 전시됐던 걸 이리 해 놓으니 얼마나 좋아요."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촌부의 꿈이 현실로!
그는 박물관을 볼 때마다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고 했다. 강진군의 도움이 있어서 꿈을 이뤘다며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보라고 '와보랑께'로 하면 좋겠다고 그의 아내가 조언을 해줘 '와보랑께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와보랑께'라는 단어에는 전라도의 생활과 문화가 모두 함축되어 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좋아서 이 일을 한다고 했다. 고향(강진 병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박물관을 통해 고향 또한 널리 알리고 싶다고 한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촌부의 꿈, 그저 꿈으로만 끝날 뻔 했던 김 관장의 평생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 2011년 신묘년은 토끼해다. 와보랑께 박물관 마당에 전시된 12지신상의 석상 중 토끼상 앞에 멈춰 섰다. 토끼 석상 앞에서 와보랑께 박물관의 무궁한 발전과 독자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하며 두 손을 모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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