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필하모닉의 더블베이스 연주자 오디션 현장. 세계 3대 교향악단이라는 명성만큼 후보들 또한 쟁쟁했다. 심사위원의 손에 들린 참가자 명단에는 유럽, 북미, 일본 출신의 정상급 연주자 백여 명의 이름이 빼곡했는데, 그 가운데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열일곱 살의 어린 후보 하나가 들어있었다. 에딕손 루이스. 베네수엘라 출신의 이 소년은 1887년 베를린필 설립 이래 최연소 단원으로 오디션에 최종 합격했다.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그의 테크닉과 음악적 본능이 모든 사람을 매료시켰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럽도 미국도 아닌 베네수엘라 출신 소년이 세계무대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30년 전부터 국가적 차원으로 진행해 온 '엘 시스테마'(El Sistema, The System의 스페인어) 덕분이었다. 마약과 폭력에 찌들고 대낮에도 총성이 울리던 베네수엘라는 '엘 시스테마'를 통해 놀랍게도 건강함을 되찾고 희망을 노래하게 되었다. 아마존 정글에서부터 가장 현대적인 도시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베네수엘라 전 지역에서는 취학전 아동, 어린이, 청소년 등으로 급을 나눈 500개 가량의 오케스트라와 음악 그룹이 활동 중이다. 지금까지 이 조직을 거쳐 간 사람은 약 30만 명에 이르는데 60%가 빈곤층 출신이다.
'엘 시스테마'는 1975년 경제학자이자 음악가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의 열정에서 시작됐다. 빈부차가 극심한 베네수엘라에서 고통받는 빈곤층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마약과 폭력에 노출돼 있는 그들 손에 악기를 쥐어줬다. 거리를 배회하던 아이들은 오케스트라를 통해 화합과 책임, 배려를 익혔고, 꿈을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11명으로 시작해 차고나 공장, 창고를 전전하며 연습하던 오케스트라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빠른 속도로 규모를 키워나갔고 '남미의 문화 혁명'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 수출될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엘 시스테마'의 원래 취지는 뛰어난 음악가를 배출해내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세계무대에 혜성과 같이 등장해 28살에 LA필하모닉 상임지휘자가 된 구스타보 두다멜이나 에딕손 루이스 등 스타들도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엘 시스테마' 정신의 핵심은 지친 아이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것이다. 학교를 마친 뒤 갈 곳 없던 아이들이 이제는 함께 모여 연습하고, 악기를 다루기 힘든 유아들은 종이로 만든 바이올린으로 연주 예절을 익힌다. 엄연히 경쟁도 존재한다. 엘 시스테마에는 수준에 따른 여러 오케스트라가 있어서 실력을 쌓은 뒤 오디션을 통해 진급할 수도 있다. 제2의 두다멜과 루이스를 꿈꾸는 아이들은 경쟁을 통해 더 성장한다.
음악이 세상을 구원하는가? 음악이 가난을 없애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가? 이 단순한 질문에 '엘 시스테마'는 현실 속에서 실천으로 답했다. 창시자인 아부레브 박사는 "죽으면 쉴 시간은 충분하다"며 주말도 없이 헌신한다. 그는 "음악은 가난한 이들에게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삶을 수긍하는 낙관적 힘을 준다"며 음악의 힘을 강조한다. 음악이나 예술을 통한 사회적 교육 모델의 개척자이자 수출국이 된 베네수엘라는 더 이상 차베스와 미인대회 우승자만의 나라가 아니다. 음악과 희망이 공존하는 뜨거운 중남미의 문화중심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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