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부대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침침한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까 생체 실험 대상이 되었던 '마루타'들의 비명과 아우성이 귓전에 맴도는 것 같았다. 운동장을 덮고 있는 눈이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면서 잠시나마 기분을 전환시켜주었다.
전쟁에 패한 일제는 철수하면서 생체실험 대상자들을 독살하거나 포대에 담아 송화강에 던지고 건물들을 폭파했다고 한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는데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남은 실험용 소각장과 보일러실 굴뚝이 치욕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었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들렸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는 정겨운 소리임에도 괴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년 8월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이 황량하게 하더니 눈 밟는 소리조차 마음을 스산하게 했다.
731부대 정문 앞까지 걸어갔는데 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얼마나 추운지, 품속에 넣고 다니는 카메라를 꺼내기가 두려웠다. 추위에 대비해 내의를 껴입고 두꺼운 머플러에 방한모까지 썼는데도 찬바람이 살 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시계를 보니까 오전 11시 10분이었다. 일행(19명)은 일제의 만행과 교활함에 놀란 마음을 뒤로하고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 점심을 먹기 위해 시내로 이동했다. 박영희 시인이 점심은 만두 명가 '동방만두집'에서 하겠다고 안내하니까 환호가 터졌다.
'눈과 얼음의 도시'다운 거리 풍경 여름엔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더니, 겨울엔 버스가 사람 덕을 보려고 했다. 출발하기 전에는 영하였던 차내 기온이 출발하고 한참 있으면 사람의 체온으로 10도 이상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운전석의 기사도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어 뭐라고 탓할 수가 없었다.
'동방의 모스크바', '만주의 파리'로도 불리는 하얼빈은 해마다 빙등제가 열리는 눈과 얼음의 도시답게 갖가지 모형의 얼음 조각상들이 거리거리에서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연평균 기온이 10℃여서 얼음이 녹지 않기 때문이라고.
새벽에 하얼빈에 도착해서도 역 광장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얼음 조형물을 보고 놀랐었다. 진짜인지 다가가 만져보니까 벽돌처럼 단단하고 미끄러운 얼음덩이였다. 실제 건물과 너무 흡사해서 믿어지지가 않았었다. 어떻게 조각하고 쌓았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사우나에서 아침을 먹고 731부대 기념관을 향해 출발할 때는 길가에 세워진 아이들 셋을 형상화한 귀여운 얼음 조각상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는데, 돌아올 때는 서양식 건물과 용을 조각해 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여름에는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거리를 활보하고, 팬티 차림으로 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명 '붉은 돼지'들이 실소를 터트리게 하더니 겨울에는 섬세하고 웅장하고 아름답게 조각해놓은 얼음 조형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버스가 시내로 접어들면서 결혼식을 올리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뒷좌석에서 누군가가 "저기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고, 신랑·신부가 차 앞에 서 있는 걸 보니까 결혼식 하는가 보다!"라고 하니까 모두 고개를 돌렸는데 잠깐 스치기만 했을 뿐 자세히 못 보아 아쉬웠다.
총각인 안전가이드는 중국은 결혼식 날 택시를 다섯 대 정도 부르는 게 일반적이라며 검은색 자가용이 많이 보여야 신랑 인기가 올라간다고 했다. 검정은 부자, 흰색은 가난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영업용 택시 대절 숫자로 결혼식 규모를 따지고, 검은색 자가용을 선호하던 우리의 60~70년대 사고와 비슷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던 굴뚝들
흑룡강성(헤이룽장성) 성도 하얼빈은 역사와 지리적 특성으로 곳곳에서 러시아 냄새가 풍겼으나 다양한 현대식 고층 건물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영문 간판이 자주 보였다. 특히 한국의 유명회사를 상징하는 마크나 상호를 발견했을 때는 반가움이 앞서기도 했다.
19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몇 가구가 사는 어촌이었던 하얼빈은 1898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공사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건설된 도시로 지금은 1천만 인구를 자랑하는 상공업 관광도시로 변모했다.
하얼빈 시내를 몇 차례 오가면서 러시아풍 옛 건물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지역을 두어 차례 발견했는데 과연 동방의 모스크바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총각 가이드도 하얼빈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으며 미녀도 많다고 귀띔했다.
대도시임에도 자주 보이는 높은 굴뚝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연기가 나지 않았으면 가동을 중지한 공장으로 이해하겠는데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업이 발달한 도시라고 하지만, 중심가에 공장들이 버티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전가이드에게 도심지에 웬 굴뚝이 그리 많으냐고 물었더니, 나무와 석탄을 주 연료로 하는 중국은 집마다 보일러실이 있는 개인난방이 아니고 나무나 석탄을 연료로 하는 집체 난방이어서 시내에 굴뚝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실내 기온도 개인 맘대로 못한다고 했다. 위에서 조절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아파트가 아닌 개인 단독주택은 대체로 춥다고 했다. 처음엔 가이드 설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 팬티만 걸치고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눈을 뜨고서야 '중국이 이런 곳이구나!' 소리가 나왔다. 호텔에서도 내복을 입지 않으면 담요를 덮어도 새벽에는 추웠다.
점심은 중국식 만두로우리를 태운 버스는 낮 12시쯤 하얼빈의 명물이라는 동방만두집에 도착했다. 중국식 만두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큰 식당이었고, 만두 빚는 솜씨가 좋아서 그런지 손님들로 붐볐다. 유명세만큼 맛도 좋았고, 만두 종류도 다양했다.
박영희 시인은 중국 거리에서 간판에 "OO교자(餃子)"라고 적힌 식당은 만두집으로 알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누군가가 하얼빈에 왔으니까 유명한 '하얼빈 맥주' 한잔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해서 맥주도 다섯 병 주문했다.
"도마를!""위하여!"만두와 함께 나온 맥주를 옆 사람 컵에 따라 손을 높이 들고 박 시인이 선창으로 안중근 의사 호(號)를, 일행은 '위하여!'를 외치면서 잔을 마주쳤다.
고기만두, 야채만두, 해물만두, 버섯만두 등 차려져 나온 만두가 10종류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간장에 겨자를 풀어 맛있게 먹었는데, 야채와 해물 만두 등은 크기가 작으니까 한번에 먹어야지 생각하며 베어 먹으니까 국물이 흘러내렸다.
만두를 먹고 나오는데 식당 앞 좌우에 땅콩, 밤 등 견과류를 벌여놓은 행상들이 붙잡으며 사라고 권했다. 한 아저씨가 옷깃을 붙잡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펴보이기에 2위안(360원)을 주니까 실망하는 표정을 지으며 작은 밤 한 주먹을 봉지에 싸주었다. 그는 20위안이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식당에서 나오니까 오후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인원을 확인한 우리는 곧바로 하얼빈 역으로 이동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장소를 확인하고, 거사 전날 거닐었다는 제홍교(齊虹橋), 도마기념관, 조린공원 등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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