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키비르강의 도도한 물결처럼 강력했던 이슬람 세력
말라가에서 코르도바(Cordoba)로 이어지는 길 주변은 산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립공원이 많다. 그리고 이들 산악을 따라 만들어진 구릉지역에는 올리브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에스파냐 내에서도 올리브 생산이 가장 많은 곳이 이곳 안달루시아 지방이다. 차로 두 시간 남짓 달리니 넓은 평원지대가 나타난다. 이곳이 과달키비르 강 중류에 자리 잡은 코르도바다. 말라가에서 코르도바까지 거리는 165㎞다.
코르도바는 로마시대 이베리아 반도 세 개 통치령 중 하나인 바에티카(Baetica)의 수도였다. 그 후 711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정복되었고, 716년 우마이야 왕조(수도: 다마스쿠스)에 예속되는 지방정부의 수도가 되었다. 코르도바는 당시 아랍어로 쿠르투바(Qurtuba)로 불렸다. 756년에는 압둘 라만 1세가 알 안달루스 왕국을 건설했고, 766년 코르도바를 왕국의 수도로 선포했다.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압둘 라만 3세(912-961) 때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코르도바의 인구는 50만에 달했고, 이슬람사원, 대학, 도서관 등을 통해 종교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코르도바에는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와 같은 다양한 문화가 조화를 이뤄 사회가 안정되었고,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다. 그리고 직물, 금속, 타일, 가죽 등 산업도 발달해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르도바는 1078년 이웃하고 있던 세비야의 통치자인 알 무타미드 이븐 압바드(1040-1095)에 의해 정복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1236년에는 이베리아 반도 회복운동(Reconquista)을 펼치던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디난드 3세에게 정복되어 다시 기독교화 하는 운명을 맞는다. 르네상스 시기에도 도시는 발전하지 못했고, 18세기에는 인구 2만의 소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코르도바가 다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20세기 초이다.
코르도바에서 우리가 버스를 내린 곳은 과달키비르 강 로마 다리(Puente Romano) 근방 콘페더라시온 거리다. 로마 다리는 강 남쪽의 베르다드(Verdad: Truth)) 평야와 북쪽의 성당 지역을 연결한다. 로마 다리는 1세기 초 로마시대 만들어져 그런 이름이 붙었다. 20세기 중반 산 라파엘 다리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과달키비르 강의 유일한 다리였다. 길이는 250m이고, 16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2008년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로마 다리 근방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니 과달키비르 강의 도도한 물결과 그 건너 대성당이 보인다. 이번 겨울에 비가 많이 와서 수량이 많아졌고, 그로 인해 물도 흙탕물이 되었다. 강 건너 편에 있는 코르도바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이슬람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모습으로 차분하면서도 웅장해 보인다. 우리는 로마 다리를 건너 그곳으로 갈 것이다.
로마 다리의 남쪽 끝에는 칼라호라 타워(Torre de la Calahorra)가 있고, 북쪽 끝에는 다리 문(Puerta del Puente)이 있다. 우리는 먼저 칼라호라 타워를 살펴본다. 칼라호라 타워는 12세기 말 알모하드 왕조 때 세워졌다. 처음에는 양쪽에 사각형의 타워가 있고 이를 아치형의 문으로 연결했었다. 그러나 1369년 카스티야 왕 엔리케 2세가 타워를 하나 더 세우고 이들을 원통으로 연결했다. 일종의 방어성 타워로 바꾼 것이다.
이 타워을 지나 우리는 로마 다리로 들어선다. 로마 다리로는 현재 차량이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유 있게 다리를 구경할 수 있다. 상류 쪽에서 하류 쪽으로 물이 힘차게 흘러간다. 700년대 이슬람 세력은 이 다리를 건너 노도처럼 코르도바로 들어왔고 그 기세를 몰아 100년도 안 되어 에스파냐 거의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다리 한 가운데는 코르도바의 수호신인 대천사 라파엘 석상이 있다. 이것은 1651년 만들어졌으며, 그 앞에 촛대가 있어 불을 붙이고 성 라파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곳에서는 앞으로 가게 될 다리 문과 대성당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다리 문과 성당 앞부분이 보수중이라 일부에 비개와 천막이 씌워져 있다. 그렇지만 다리 문 안으로 임시 가교를 만들어 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코르도바 메스키다에서 느끼는 문화의 다양성
다리 문을 지나 우리는 승리(Triunfo)의 광장으로 간다. 이곳에도 역시 코린트식 석주 위에 대천사 라파엘의 석상이 조각되어 있다. 석상을 지나 대성당으로 가면서 보니 성당 외벽에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이 보인다. 에스파냐의 성당에서는 보편적으로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성 가족(Sagrada Familia)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대성당으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정보센터에 들어가 잠시 코르도바와 대성당에 관한 책을 구경한다.
이들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코르도바 대성당이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공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도 대성당 내부 기둥과 아치의 아름다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 미흐랍을 성당 안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당 이름도 메스키다-카테드랄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우리는 코르도바 대성당에서 문화의 공존과 융합, 그리고 상대방 문화에 대한 존중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입구인 페르동 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성당은 크게 정원지역과 예배공간으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는 먼저 나란호스 정원으로 가 성당 안뜰을 구경한다. 이곳은 원래 이슬람 교도들이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기 전 몸을 씻는 장소로 수조와 수도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오렌지 나무가 심어진 오렌지 정원으로 바뀌었다.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삼면 벽은 회랑으로 되어 있다. 회랑 벽에는 나무 기둥들이 상하로 가지런하게 걸려 있다. 대성당 건축에 쓰였던 것으로 증축과 개축 과정에서 쓸모없게 되어 이곳 회랑 벽에 보관하고 있다. 이들 나무 기둥에는 당초문 같은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들을 보고 영광의 문(Door of the Palms)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성당은 메스키다 시절 네 번에 걸쳐 신축과 증축과정을 거쳤다. 이슬람 메스키다는 785년 압둘 라만 1세에 의해 성 빈센테 교회 자리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때 건축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기둥과 아치다. 로마시대 이후 사용된 대리석 석주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베이지색 돌을 얹은 다음 벽돌과 붉은색 돌로 아치를 만들었다. 이것이 코르도바 메스키다의 가장 큰 특징이다.
두 번째는 압둘 라만 2세에 의한 증축이다. 그는 남쪽으로 메스키다를 확장하고 북쪽으로 정원 공간도 넓혔다. 이어 압둘 라만 3세가 탑인 미나렛을 만들었다. 세 번째 확장은 961년 알 하캄 2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가 무어왕조의 전성기로 동쪽의 비잔틴 제국, 북쪽의 기독교 왕국과 빈번한 교류를 했다. 메스키다 남쪽을 확장할 때 비잔틴 예술가들이 참여했고, 현재 남아있는 미흐랍의 모자이크를 그들이 만들었다. 그리고 미흐랍 천정의 십자 모양 디자인에서도 기독교 건축과의 접목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네 번째 확장은 987년 알 만수르에 의해 이루어졌다. 메스키다 동쪽으로 8개의 석주를 세우고 예배 공간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인지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고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래서 완성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석주 위로 아치를 만들면서 벽돌과 붉은색 돌을 끼워 넣지 않고 붉은 색칠을 해서 모양만 낸 것이 대표적인 예다.
코르도바 메스키다는 1236년 카스티야 왕 페르디난도 3세에 의해 코르도바가 점령되면서 기독교 성당으로 바뀐다. 알폰소 5세 때 왕실 예배당과 빌라비시오사 예배당, 성 바오로 예배당이 만들어졌다. 이후 14세기 엔리케 2세에 의해 기독교 예배당이 더 만들어졌고, 미나렛이 종탑으로 바뀌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에 있던 종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코르도바 대성당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르네상스 시대인 1520년대다. 에스파냐 왕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카를로스 5세 때 대성당 한 가운데 중앙 예배당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중앙 예배당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에 제단이 있고, 가운데 신자석이 있으며, 뒤에 합창대석이 있다. 그런데 천정과 합창대석 장식을 보면 바로크 양식이다. 그러므로 성당의 변화는 1500년대에서 170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