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걷다보면 생각이 많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오랜 세월 너머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기억을 잃은 동포에게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대학생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자신보다 더 어린 학생들에게 연을 만들어주고 함께 연을 날린다. 오랜 세월을 안고 그들이 바람을 타고 온 것일까? 그 바람을 따라 연을 날린다.
낯선 나라의 작은 도시에서 생면부지의 동포들이 만났다. 지금은 멀고 먼 세월의 거리만큼 멀어져서 같은 동포지만 우리말도 잃은 고려인과 조국에서 온 학생들이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몇몇 고려인들이 말했다. 미안하다고, 그것도 서툰 우리말로 한 말이다. "미안 시럽소!"
난 그들을 만나며 오히려 우리가 미안스러워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살았거나 외면했던 것에 대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찾아야할 것이 있어 왔음을 알고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생각한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곳을 찾아온 후 이곳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도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지난 추석에 "송편 만들기"가 그 중 하나였다.
가끔씩 나이든 어른들은 제사나 장례절차에 대해 묻는다. 그렇지만 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한식 명절을 맞이하는 풍습은 우리보다 더 잘 지키고 있었다. 과거 4대명절의 하나였던 한식이다. 이들에게 그 오랜 전통이 절실히 지켜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달 29일 설을 며칠 앞둔 시점에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 고려인협회장 집에서 고려인 학생과 몇몇 어른들이 함께 모였다.
물론 앞서 알린 바처럼 전남대와 조선대 연합동아리(M.A.D) 학생들의 방문으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들이 준비한 스크립트를 통해 우리의 전통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고려인 한글학교 학생들과 연을 만들어 날리는 일은 두고두고 이곳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과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어서 제기차기와 윷놀이 등을 통해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기도 했다.
두 대학의 학생들이 준비해온 선물은 이곳 아이들에게 뜻 깊은 설맞이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들이 짧은 시간이라도 같은 동족으로서 기억할 것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래된 과거의 흔적을 안고 나라와 민족의 미래가 어깨를 걸었다"는 것이다. 우정과 그리움을 쌓을 수 있었던 짧은 만남이지만, 끊겼던 연줄로 잃어버린 연을 찾아내어 다시 날려보는 즐거움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이 뜻 깊은 만남이 얼마나 장한 일인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 해 설날에 떡국을 만들었다. 대규모로 행사를 기획했으나 여의치 않아 연령대 별로 집으로 초대해서 설날 떡국을 먹었다. 그리고 올해도 광주 "무등 떡방앗간"을 하는 친구 이연동이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을 통해 가래떡을 보내주었다. 평소에도 고려인들이 자주 모이는 세르게이 집에서 대학생들과 세르게이 가족이 함께 떡국을 먹었다. 대학생들이 가져온 한국 쌀을 선물로 전달하기도 했다.
그저 그런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대지에 씨를 뿌리는 심정의 농투산이처럼 만난 사람들이다. 맨살로 살을 부비듯 어색하게 만난 낯선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짧은 순간의 만남에 아쉬움을 갖고 헤어지기 싫어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학생들이 가고 며칠 후 나는 세르게이 집에 안부차 들렸다.
5살이 된 세르게이의 아들 사샤는 학생들의 안부를 묻는다. 정확히 말해서 왜 혼자왔냐?고 따지듯 물었다. 나는 곧 한국에 전화를 걸어 학생들과 서툰 인사를 나누도록 했다. 연줄에 기대어 허공을 채우며 날고 있는 연을 생각한다. 전화기를 통해 며칠 전까지도 생면부지였던 동족이 서로 안부를 묻고 있다. 서툰 말도 축복처럼 보였다. 먹먹한 가슴 한 켠을 채우는 행복을 느낀다.
지난 13일 이곳 고려인 학생들과 공식적으로 작별하는 마지막 수업을 진행했다. 마지막 수업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예빠토리야에서 보낸 19개월에 대한 소식의 끝이 될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해피수원뉴스에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