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부의 상징이던 냉장고. 불과 50년이 지난 지금 집집마다 냉장고 한 대는 기본이고 김치냉장고는 선택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점점 커지는 냉장고는 우리네 삶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달라지는 냉장고를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보았다. [편집자말] |
작년 12월 8일, 경기도 여주의 한 대기업 연수원에서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촬영현장이 공개됐다. 극중 로엘백화점 사장인 김주원(현빈 분)과 아이돌 가수인 오스카(윤상현 분)의 집도 함께 공개됐다. 드라마의 인기만큼 촬영현장에서 공개된 소품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린 김주원의 냉장고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당시 촬영 현장에서 공개된 김주원의 냉장고 속에는 500ml 1 통에 2만 원을 호가하는 알로에 음료 15통, 파인트 사이즈 1통에 8500원 하는 아이스크림이 3통 들어 있었다. 비록 설정된 드라마 속 냉장고이긴 하지만, 김주원의 냉장고 속에는 '사회지도층'의 소득 수준이 들어 있었다.
계층에 따라, 또는 소득에 따라 냉장고는 과연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지난 21일 계층과 소득에 따른 냉장고의 차이를 취재하기 위해 고소득층 4인 가구 (월 소득 600만 원 이상)와 기초생활수급자 가정 6인 가구(월 소득 150만원)을 방문했다.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냉장고의 눈으로 기사를 재구성했다.
월 소득 600만 원 가정, 맞벌이 때문에 한꺼번에 장봐나는 2006년에 생산된 양문형 냉장고다. 총 용량은 689리터. 433리터는 냉장실이고 256리터는 냉동실이다. 5년 전,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의 한 가정집으로 팔려왔다.
내 주인인 유아무개(42)씨는 올해 15년차 공기업 사원이다. 집은 20평 남짓으로 작은 편이지만 소득은 월 600만 원 이상, 상여금을 포함한 명목상 연봉이 7000만원을 넘는다. 통계청의 월 소득구간별 기준으로만 봤을 때 이 가정은 최상위계층에 속한다. 부인인 장아무개(40)씨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후 이번 달부터 부동산 업체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집에는 초등학교 4학년, 이번에 유치원을 졸업한 딸이 둘 있다.
이 가정은 일주일에 한 번 가량 대형마트에서 장을 본다. 규칙적으로 장을 보지는 않는다. 맞벌이를 하기 시작하면서 장을 보는 빈도가 더욱 불규칙해졌다. 남편인 유씨는 보통 오후 10시에 귀가한다. 해외 출장이 잦아 일주일이 넘도록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장씨도 오전 9시 30까지 회사로 출근해 오후 7시 이후에 귀가한다.
하루 일과가 이렇다보니 장을 한 번 보려면 큰 마음을 먹고 날을 잡아 한 번에 필요한 물건을 사들여야 한다. 장을 본 지 2주일이 다 돼서야 새로 장을 보는 때도 있었다.
보통 마트에서 장을 한 번 볼 때마다 약 8만 원에서 10만 원 가량을 식료품비로 지출한다. 가계부를 보니 1월 16일부터 2월 20일까지 약 한 달 동안 대형마트에서 총 4 차례, 41만 8천원을 식료품비로 지출했다고 적혀 있었다. 1월 28일에는 10kg짜리 쌀 한 포대를 포함해 식료품만 16만 7천원어치를 구매했다.
당장 필요한 채소나 육류는 동네 근처에 영업 중인 유기농마트에서 따로 구입해 쓰기도 한다. 이 경우 식료품비 지출은 더욱 늘어난다. 아이들이 아토피 증세로 고생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마트에서 장을 본 지 3일 이상 지난 채소들은 먹이기가 꺼림칙하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장을 이중으로 볼 때가 생기기도 한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장을 보고 난 후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냉동실로 옮기거나 이주일에 한 번 냉장고 정리할 때 한꺼번에 모아서 버린다.
꽉 찬 냉장고 속, 버려지는 음식들 보면 속상해지금 내 몸 한구석, 냉동실 속에는 한달 전에 사 온 훈제오리 4팩, 우동사리 15개, 튀기지 않은 돈가스 세 봉지, 모짜렐라 치즈 1통, 군만두 한 봉지 등 냉동식품과 설날 제사음식이 5개 칸에 가득 차 있다. 냉장실도 밑반찬과 홍삼 농축액, 흑마늘청 등의 건강보조식품과 요리에 필요한 양념, 컵케이크, 탄산음료 같은 아이들 군것질거리와 보리차, 맥주들이 가득 차 있다
가끔 시댁 식구들이 고춧가루나 들깨를 바리바리 싸서 들고오면 그 재료들은 모두 냉동실 칸으로 향한다. 내 몸 속은 그야말로 터지기 일보직전의 상태가 된다.
이들이 냉장실과 냉동실에 수북하게 쌓인 음식들을 언제 다 소비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주일에 한 번씩 하는 냉장고 정리 때 얼마나 많은 음식들이 버려질까 생각하면 한숨이 밀려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주인은 내가 가진 수납공간이 비좁다 말한다.
이 집 터줏대감인 90리터 용량의 김치냉장고가 나와 역할분담을 하고 있지만, 김치냉장고 속에도 이미 김장김치와 식료품으로 가득 차 있다. 내 뱃속에 음식이 가득 차있는데도 아이들은 냉장고를 열었다가 그냥 닫는다. 습관적이다. 컵케이크도 있고 탄산음료도 있고 냉장실 속에 든 건 많은데 정작 자기들이 먹고 싶은 건 없는 모양이다.
지난 주 목요일, 새로운 음식들이 냉장실에 또 들어왔다. 이번엔 시금치나물, 무생채, 오징어무침이다. 냉장실에 언제 들어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빈대떡은 결국 냉동실로 옮겨졌다. 난 정말 냉장고로서 내 사명을 다 하고 있는 것일까? 곰팡이가 피고 꽁꽁 얼어있는 음식들이 음식쓰레기 봉투에 버려질 때 난 냉장고로서 회의감을 느낀다.
텅텅 빈 냉장고, 8살 민경이의 한숨
민경이(가명, 8)는 냉장고 문을 열고 한숨을 쉬곤 한다. 냉장고로서 나의 사명을 다하려면, 냉장실에 음식이 풍족하게 있어야 하는 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내가 김재민(35)씨네 임대아파트에 온 건 2년 전이다. 정아무개씨가 이사갈 때 나를 폐기처분하는 대신 김씨에게 주었다.
나는 LG전자 창원공장의 냉장고 1라인에서 태어났다. 냉장실은 313리터, 냉동실은 115리터, 총용량은 428리터다. 지금은 800리터 대용량 냉장고들이 나오는 바람에 구식이 되어버렸지만, 초창기에는 LG전자의 인기 상품이었다.
냉장고로서 나의 걱정은 김씨네 집에 이사오면서 시작됐다. 강북구 번2동 임대아파트에 있는 김씨네는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이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뭔지도 몰랐는데, 김씨네 집에서 있으면서 알게 되었다.
김씨는 5년 전에 간질에 걸려 수급자가 되었다. 김씨네 가정은 6인 가구다. 김씨와 그의 부인, 민경(가명, 8), 혜경(가명, 6), 민아(가명, 4), 민수(가명, 1)다. 김씨의 기초생활수급비와 아이들 앞으로 나오는 양육비를 포함해 김씨 가정은 150만 원 정도 지원받는다. 통계청의 소득구간별 기준에 따르면 이 집은 월 소득 100만 원 이상 200만원 이하 수입의 차상위 계층에 속한다.
임대료와 관리비, 민경이·혜경이 유치원비, 분유 값, 약값, 김씨가 노숙생활 할 때 사기당해 진 빚을 갚고 나면, 김씨가 식료품비로 쓸 수 있는 돈은 30만 원도 채 안 된다. 일주일에 한 번 장이 열리는 날에 무말랭이와 멸치볶음을 사고, 소시지 등을 산다. 작년부터 물가가 올라, 냉장실에 들어오는 음식은 더 줄었다.
냉장실에 있는 음식이라고 해봤자 마늘 장아찌, 김, 김치, 멸치볶음, 나물이 전부다. 나물은 정월대보름에 옆집에서 가져다 주었고, 김치는 '동자동 사랑방'에서 가져다 주었다. 아이 4명이 있는 가정의 냉장고로서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식구들 만큼이나 나도 배가 고프다.
다른 집 냉장고들은 마트에서 대량 구매한 음식들이 넘쳐나 버리는 음식들이 많다고 하는 데, 김씨네 집은 형편이 안 돼 냉장고를 채우지 못 한다.
냉장실이 음식으로 가득 찬 적은 단 2번김씨네 집에도 냉장고가 가득 찼던 때가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냉장실이 음식으로 가득 찼던 적은 단 2번. 그 날 따라 김씨는 이마트에 가서 돼지갈비 3근, 야채, 냉동식품 등을 사다 냉장고를 꽉꽉 채웠다. 돼지갈비를 맛있게 먹던 아이들을 보면서 냉장고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아 뿌듯했다. 가족들에게도, 냉장고인 나에게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최근 김씨는 전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고 혼자 있을 때 김씨는 종종 운다. 간질 약이 독해 어금니가 빠졌고, 폐의 통증을 호소할 때도 있다. 수급비가 나오는 매달 18일은 부부 싸움을 하는 날이다. 물가가 많이 올라 먹고 살기가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인 것 같다.
김씨는 혼자 있을 때면 라면이나 반찬도 없이 밥을 먹으며 끼니를 때운다. 돈가스, 소시지 인스턴트 식품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밥상에 김치나 깻잎 장아찌 같은 마른 반찬 밖에 없기 때문에 밥을 잘 먹지 않는다. 김씨는 아이들이 먹으라고 마른 반찬조차 손을 대지 않는다. 저녁식사를 먹을 때에도 찌개도 없이 밥을 먹는다.
김씨네 집에서 유일하게 밥을 제대로 먹는 아이는 막내인 민수밖에 없다. 아직 돌이 지나지 않은 민수는 분유를 먹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처럼 먹는다. 민수는 한 달에 분유 5통을 먹는다.
김씨네 식구들이 언제쯤 잘 먹고 살 수 있을까? 양문형 냉장고가 대중화 되고 있는 지금, 나 같은 구식 냉장고가 폐기처분 당하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김씨와 같이 가난한 가정에서 식구들이 굶주리는 걸 지켜보는 건 냉장고로서 진정 괴로운 일이다.
냉장고, 가정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축소판
기자가 찾아간 두 가정에서는 냉장고를 둘러싸고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사례였던 고소득층 4인 가정에서는 장을 몰아서 본 후 남는 음식들이 냉동실에 가득 쌓여있었다.
반면, 두 번째 사례인 저소득층 6인 가정의 냉장고에는 김치와 무말랭이 등 마른 밑반찬들과 음료수 한 통만 들어 있었다. 고소득층 아이들은 매일 냉장고에 있는 간식들을 꺼내먹거나, 간식이 들어있어도 먹고싶지 않아 그냥 남기지만, 저소득층 아이들은 냉장고 문을 열어도 당장 꺼내먹을 간식이나 반찬이 없어 그냥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소득의 차이는 냉장고 속 내용물의 차이로 직결됐다.
식료품비의 격차는 냉장고 속 내용물의 양극화를 낳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가족이 최근 한 달 동안 지출한 식비는 41만원과 30만원으로 약 10만원 가량 차이가 났다. 여기에 고소득층 가정이 4인, 저소득층 가정의 수가 6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식비 지출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진다.
실제로 통계청에서 조사한 '소득구간별 가계당 가계수지(전국 2인 이상)'에 따르면 2010년 4/4분기 기준으로 월 소득 100~200만원 미만 가구는 식료품 지출에 275,328 원을 쓴 반면, 소득이 600만원 이상인 가구는 식료품지출에 447,462원을 쓴 것으로 조사되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그 가정의 소득수준과 식료품 지출규모를 단번에 알 수 있는 셈이다.
음식이 꽉 들어찬 냉장고와 텅텅 빈 냉장고, 양문형 냉장고와 일반형 냉장고 사이에는 이미 계층의 양극화가 드리워져 있다.
덧붙이는 글 | 구태우, 박종원, 김재우, 정민지 기자는 <오마이뉴스> 13기 인턴기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