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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릉인 영월의 장릉
단종릉인 영월의 장릉 ⓒ 이상기

원주시 신림면에서 단종의 유배 흔적을 찾다

단종은 영월까지 어떤 길을 따라 유배를 갔을까? 그 길을 알기 위해 나는 자료를 찾아보았다. 가장 먼저 <조선왕조실록> 을 참조했다. 그에 따르면 1455년 윤 6월 11일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20일에는 단종이 정궁인 경복궁에서 별궁인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1457년 1월 29일에는 종친과 대신을 대표하여 양녕대군과 정인지가 상왕인 단종의 문제에 대해 논의한다. 6월21일에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22일 노산군은 한양을 떠나 영월로의 유배길에 오른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노산군이 영월로 떠나가니, 임금이 환관 안로에게 명하여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였다"라고 나와 있다. 화양정은 화양리(성동구 화양동)에 있던 정자다. 7월5일에는 강원도 관찰사에게 "노산군이 일용하는 비용을 원하는 대로 지급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7월6일에는 의원(醫員) 조경지를 영월로 보내 옷가지를 내려준다. 그 후 노산군에 대한 기록은 점점 뜸해진다. 그러므로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난 것은 1457년 6월22일이고, 영월에 도착한 것은 7월 초쯤으로 여겨진다.

 흥원창 주변의 남한강
흥원창 주변의 남한강 ⓒ 이상기

그럼 단종은 어떤 길을 따라 영월로 갔을까? 화양정을 지나 광나루에 이른 단종 일행은 배를 타고 원주 흥원창까지 간다. 당시는 한강수로가 원주의 흥원창을 거쳐 충주의 경원창까지 이어졌다. 흥원창은 지금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배를 내린 단종은 지금의 531번 지방도를 따라 단강리까지 갔다. 단강초등학교 안에는 단종이 쉬어갔다는 6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여기서 단종은 동쪽으로 운계천을 따라 귀래면 운남리까지 간 다음, 계속 동쪽으로 길을 재촉해 배재를 넘는다. 배재는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와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해발 480m다. 이 고개의 이름이 배재가 된 것은 마을 사람들이 영월로 유배되는 단종을 불쌍히 여겨 모두 나와 절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재를 넘은 단종은 지금의 402번 지방도를 따라 운학재(일명: 구력재)를 넘어 원주시 신림면 신림리에 이른다. 이곳 신림면에서는 지금의 88번 지방도를 따라 영월군 주천면으로 간다. 그러나 신림리에서 황둔리까지 이어지는 옛길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나 있었다. 지금 신림리에 있는 명성수련원 후문 쪽으로 난 길이 바로 싸리치 옛길인데, 이 길을 따라 단종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길을 답사하기로 했다. 

'산내 들내 길 찾아' 회원들과 함께 싸리치로

 싸리치 옛길 출발지에서 회원들의 모습
싸리치 옛길 출발지에서 회원들의 모습 ⓒ 노영섭

지난 12일 오전 9시30분에 신림면 신림리에 있는 명성수양관 후문 주차장에서 '산내 들내 길 찾아' 회원들을 만났다. 나만 초면이어서 회원들과 간단히 인사를 하고 바로 싸리치 옛길 답사에 나선다. 이 중 노영섭 회장과 김완수 회원은 이미 이곳을 몇 번 답사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길에 대해서는 걱정을 안 한다. 또 이 길은 1990년 신림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버스가 다니던 중요한 도로였다고 한다. 우리가 오늘 답사할 코스는 신림리에서 싸리치를 넘어 물안리 고판화박물관까지 왕복하는 것이다.

올해는 강원도 지역에 눈이 많이 와서인지 싸리치 가는 길이 아직 얼어붙어 있다. 또 이 길로는 차건 사람이건 통행이 거의 없어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이날 우리는 고개 마루인 싸리치까지 올라가는 동안 사람들을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길 왼쪽으로 나 있는 작은 개천을 따라 한 30분쯤 갔을까? 싸리재 농원이 나온다. 이곳 입구에는 싸리재 여인이라는 장승 형태의 조각품이 세워져 있다. 조각이 비교적 정교하고 예술성도 평가할 만하다.

 철철바위 얼음폭
철철바위 얼음폭 ⓒ 이상기

여기서 다시 10분을 올라가니 철철바위가 나타난다. 철철바위는 물이 철철 흘러내려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흘러내리던 물이 얼어붙어 꽤나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사진도 찍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여기서 이삼십 분 걸으면 싸리치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다시 길을 따라 가면서 왼쪽으로 보니 시명봉에서 남대봉으로 이어지는 치악산 남쪽 능선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또 길옆 소나무 앞에는 수목장을 한 건지 신주가 놓여있기도 하다.   

싸리치 정상에서 단종과 김삿갓의 흔적을 찾다

원래 싸리치 옛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졌을 텐데,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차들이 다닐 수 있도록 계곡 옆 산자락을 굽이굽이 돌아 이어진다. 진짜 옛길은 이따가 돌아올 때 답사할 예정이다. 싸리치 정상 이르러 시간을 보니  오전11시다. 중간에 쉬면서 여유 있게 걸으니 1시간 30분쯤 걸린 셈이다. '산내 들내 길 찾아'는 원래 걷기를 즐기고 자연 사랑을 실천하는 팀이다.

 싸리치 고갯마루의 시비
싸리치 고갯마루의 시비 ⓒ 이상기

싸리치 정상에는 전용찬 시인의 '싸리치'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전용찬 씨는 이 지방 출신의 고위 경찰공무원이었다. 경찰과 시, 잘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자연풍경과 어릴적 체험, 역사 이야기를 잘 표현했다. 시에서도 나와 있듯이 싸리치는 단종의 애환이 서리고 김삿갓의 발길이 머물던 곳이다.

산굽이 돌아돌아 골짜기마다
싸리나무가 지천이어
싸리치라네.

마디마디 거칠어진 손길로
서러움 쓸어내던 싸리 빗자루.
그 사연 모여
보라 꽃으로 피어나는가.

단종의 애환 구름처럼 떠돌고
김삿갓의 발길이
전설처럼 녹아있는
영마루...

무심한 바람결에
솔 내음, 산새소리 묻어오고
수천 년 묵묵히 싸리치는
그렇게 세월을 품고 있다네.

 영월에 있는 김삿갓 묘지
영월에 있는 김삿갓 묘지 ⓒ 이상기

그래서 단종과 동시대인들이 쓴 기록을 찾아보았으나 싸리치 얘기를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조선팔도를 유랑한 김삿갓의 시에도 싸리치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단종이 복권되는 숙종 때까지 단종 얘기는 금기사항이었을 테고, 세상을 등진 김삿갓 얘기는 당시 주류사회에서는 언급도 되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냥 산에 들고 고개를 넘으면서 시비에 적힌 얘기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고판화 박물관 이야기

싸리치 고갯마루를 넘어 황둔리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에 비해 상당히 짧은 편이다. 그것은 고갯길이 새로 난 88번 지방도와 바로 만나기 때문이다. 또 싸리치 고갯마루에서도 신림터널을 빠져나와 주천으로 이어지는 88번 지방도가 산자락 아래 내려다 보인다. 그래서 편하게 싸리치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신림터널을 지나 왼쪽으로 난 길을 이용한다. 이곳에서는 걸어서 15분이면 싸리치 고갯마루에 이를 수 있다.

 고판화 박물관
고판화 박물관 ⓒ 이상기

우리는 이곳에서 88번 지방도를 따라 황둔리 물안동에 있는 고판화 박물관으로 향한다. 고판화 박물관이라면 옛날 판화를 모아놓은 박물관이다. 그럼 옛날에도 판화가 있었다는 말인가? 우리는 의아해 하며 신림터널에서 1.3㎞ 떨어진 명주사로 향한다. 고판화박물관은 명주사 경내에 있다. 그러나 사실 명주사보다 고판화박물관이 더 유명하다. 조금은 특별한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2004년에 문을 연 고판화박물관은 고문서, 목판, 부적판, 시전지판, 판화 원판 등 과 이 원판을 찍은 목판화 등 3500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목판이 2000점, 고문서가 700점, 판화가 800점쯤 된다고 한다. 이 박물관을 연 사람은 명주사 주지인 한선학씨다. 머리를 기른 스님으로 알려진 그는 1996년부터 목판을 모으기 시작해 1998년 현재의 자리에 명주사를 세웠다.

 오륜행실도 목판
오륜행실도 목판 ⓒ 고판화 박물관

그는 목판 수집의 범위도 국내로 한정하지 않았다. 중국, 일본, 티벳, 몽골까지 수집의 범위를 넓혔다고 한다. 중국, 티벳, 몽골 것으로는 불경판이 많고, 일본 것으로는 풍속화판이 많다. 그가 가지고 있는 소장품 중 7점은 현재 강원 유형문화재와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유형문화재로는 안심사판 제진언집 등 4종이 있고, 문화재 자료로는 만연사판 중간 진언집 등 3종이 있다. 그 외 오륜행실도와 용비어천가 목판이 유명하다.

박물관 안에는 이들 유물 중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그 중 눈여겨 봐야할 것이 오륜행실도 목판이다. 조선시대 최고 목판이라고 한선학 관장이 자랑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식 화로인 이로리(囲炉裏)를 감싸는 장식용구로 변해 있다. 이것을 보고 한 관장은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그래서 더 목판 수집에 열을 올리게 되었고, 오히려 이제는 일본의 것까지 수집하게 되었다고 한다.

 드뷔시의 바다와 호쿠사이의 바다
드뷔시의 바다와 호쿠사이의 바다 ⓒ 이상기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의 목판으로는 조선통신사 조엄 행렬도 목판본(1753년), 조선풍속화보 목판본(1910년), 우키요에(浮世繪) 목판본 등이 있다.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시대 발달한 풍속화로 그 영향이 유럽에까지 미쳤다. 호쿠사이(北斎)와 히로시게(広重)의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전시된 것 중엔 호쿠사이의 바다가 보이고,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준 히로시게의 비내리는 다리가 보인다.

 은갱동 칠금맹획
은갱동 칠금맹획 ⓒ 이상기

중국의 것으로는 아미타래영도, 세화(歲畵), 은갱동칠금맹획(銀坑洞七擒孟獲)이 눈에 띈다. 아미타래영도는 불화로 아미타불이 극락세계로 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세화는 정초에 대문이나 집안에 붙이는 그림으로, 복과 경사를 불러들이고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다. 은갱동칠금맹획은 <삼국지> 에 나오는 내용으로,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판화 체험을 하는 회원들
판화 체험을 하는 회원들 ⓒ 이상기

이곳 고판화박물관은 관람뿐 아니라 체험도 할 수 있다. 박물관 입장객은 박물관 안에 마련된 목판에 먹을 발라 판화를 찍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제대로 판화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박물관 옆에 마련된 전통 판화학교에서 판화를 만들어 찍어낼 수도 있다. 체험은 목판 제작, 전통책 만들기, 능화판 문양찍기의 세 가지 과정이 있다.

박물관을 보고 우리는 가까운 비닐하우스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싸리치를 넘어 출발지로 돌아간다. 싸리치를 넘어서는 올 때와는 달리 계곡을 통해 내려온다. 게곡 곳곳에는 펜션 개념의 집들이 지어져 있다. 그런데 지금은 사는 사람이 없다. 아마 봄부터 가을까지 사용을 하고 겨울에는 비워두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들이 너무 계곡 가까이 있어 여름에 폭우가 내리면 문제가 될 것 같다. 또 이곳에서 나오는 생활용수가 계곡물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싸리치 옛길
싸리치 옛길 ⓒ 노영섭

싸리치는 이제 우리처럼 옛길을 탐사하는 사람들만이 다니는 한적한 길이 되었다. 또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피서지가 되기도 한다. 또 농원이나 펜션을 지어놓고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각해 보니 동시대 우리가 남긴 흔적이 또 하나의 스토리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도 있겠다. 단종의 이야기가 그렇고, 김삿갓의 이야기가 그런 것처럼.

덧붙이는 글 | '산내 들내 길 찾아' 옛길 탐사를 떠난다. 지금은 사라진 옛길을 찾아 그곳에 서려있는 역사를 기록하고, 현재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려 한다. 그 첫 번째로 원주시 신림면에 있는 싸리치를 찾았다.



#옛길#싸리치#단종과 김시습#원주 신림#고판화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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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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