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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서'를 다루는 것은 뭣보다, 보거나 읽고 남에게 전하는 게 왕명으로 '금(禁)해진 서(書)적'이라는 것이다. 서책 내용이 대부분 한 왕조의 쇠락을 나타내는 예언의 내용이 많았기에 비밀리에 전한다는 '록(籙)'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면 그러한 단어는 왕과 밀착한 곳에서 정책적으로 빠져나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것이 이른바 '칼날에 묻은 꿀'이었다.

권세를 노린 자들이 원하는 걸 얻기까진 위험한 칼날 위를 걸어야 하지만 일단 건너기만 하면 달콤한 꿀이 기다리고 있다. 손을 뻗으면 기다렸단 듯이 착착 감겨드는 포획물이 벌꿀같은 여인이었으니 사내라면 한 번 시도해볼만한 욕구가 꿈틀거렸다.

1백 40명의 내시가 깔린 궁엔 언제나 출입이 가능한 출입번(出入番)이 있는가 하면, 항상 모시는 이의 곁을 따르는 장번(長番) 내시도 있다. 이들은 모두 화자동에 마련한 내시부에 있다가 궐 안으로 출근한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다시 내시부에 들렸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곳 내시부가 있는 지역이 준수방(俊秀坊)으로 내시들이 촌락을 이룬 내시촌(內侍村)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엔 궁형(宮刑)이 있었다. 이것은 다섯 가지 형벌의 하나로, 오형은 궁형을 비롯해 궁벽, 궁벌, 부형, 음형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오형은 왕조의 발전과 함께 변화를 가져왔다. 목을 자르는 사형(死刑), 생식기를 거세하는 궁형(宮刑), 발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코를 베어내는 의형(劓刑), 얼굴이나 팔뚝의 살에 먹물로 죄명을 적어 넣는 경형(黥刑)이 있었다.

이러한 형벌 중에 궁형을 사형에 버금가는 형벌로 치는 것은 사내는 거시기를 거세하고 여인은 질(膣)을 도려내 자손을 생산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 역시 궁형을 받아 탄식 속에 글을 쓴 자이고 보니 한시각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하고 머릿속이 수많은 생각으로 들끓었을 것이다.

이렇듯 거세한 자들도 학문이 깊다보니 내시부 직제에 '학사'가 없었으나 궁인들, 특히 나인(內人)들은 이따금 궐 안에 마련한 내반원(內班院)에 연락해 학식이 풍부한 내시들을 청해 교육 받았다. '환관학사(宦官學士)'란 말은 이때 생겨났다. 이들을 굳이 내시 직제에 맞춘다면 '사포(司圃)'에 해당할 것이다.

칠석제를 치른 지 두 이레가 지났을 때 진선문(進善門) 앞쪽 금천(禁川)에서 사내의 주검이 발견돼 궐 안을 온통 긴장으로 몰아갔다.

이미 소란은 일어나 있었다. 금천교 아래 죽은 사내는 금위영 소속의 낭청이었다. 손이 귀한 정조의 뒤를 이은 왕자를 낳은 수빈 박씨의 아버지가 금위대장으로 있는 박준원(朴準源)이었다.

낭청은 낭관이라고도 불렸는데 이조와 병조에서는 관리를 뽑을 때 기록하는 이를 전랑(銓郞)이라 부르며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이 기록하지 못하면 당연히 관직에 나갈 수 없었기에 비록 당하관이었지만 그 힘은 적지 않았다.

연락을 받은 정약용이 도착한 것은 술시 어림으로 이미 시체는 한쪽으로 올려진 채 사헌부 금리(禁吏)가 지키고 있었다. 검시를 마친 서과가 두어 걸음 물러섰다.

"나으리, 죽은 자는 금위영 소속 낭청으로 이조(吏曹) 일을 거들고 있다 합니다. 과시 급제자라도 이 자의 손으로 이름이 올라야 관직에 나갈 수 있으니 적잖은 힘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흐음. 그럴 것이다. 이 자가 금천교 아래 뒹굴었다면 몽둥이나 칼에 찔린 것이냐?"
"아닙니다, 여길 보십시오."

서과가 사체의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매끄러운 피부였는데 검지 끝이 검게 물들었다. 서과가 다시 엄지와 검지로 입언저리를 쥐듯이 잡았을 때 입 안의 혀가 드러났다. 서과는 지니고 있던 법물로 사체를 헤아렸는지 결론을 내놓았다.

"이 자는 독물에 중독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시각이 술시니 퇴청시각입니다. 궐 안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이곳 금천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면 독에 중독된 것은 그 이전일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독이냐?"
"색깔이나 냄새, 맛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서책에 뿌려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책을 넘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됐고, 그걸 모른 채 밖으로 나오다 쓰러진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더구나?"
"이 자의 몸에 백성들이 읽어선 안 될 <호중록(壺中錄)>이란 금서(禁書)가 있었습니다."

"<호중록>?"
"예에, 나으리. 이 사내는 무슨 이유로 그 책을 보다 독물에 중독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약용은 얄따란 장갑을 낀 채 서책을 넘겼다. 곳곳에 쓰인 기록으로 보아 비기서(秘記書) 냄새를 풍겼으나 마지막까지 넘기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서책에 관한 말을 접고 낭청에 관해 입을 열었다.

"금위영 소속의 낭청이 금서를 지닌 것은 상감의 장인이라 할지라도 형벌을 모면할 수는 없다. 죽은 자가 발견되면 금위대장이 견책당할 건 뻔한 일이다. 죽은 자의 손을 보건대 이 자는 평소 서책을 가까이 해 붓을 쥔 오른손이 왼손에 비해 발달돼 있는 상태다. 그로 보아 이 자가 금위영에 있었던 건 최근의 일이고 예전엔 실록청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이 사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대왕인 영조대왕의 실록을 꾸미는 곳에서 일을 했었다. 그곳의 낭청이다 보니 칠석제 과시를 치른 후 재능있는 자를 찾기 위해 금위영으로 온 게 분명했다.

주검이 발견된 금천교는 궐 안으로 오를 수 있는 관문이기에 낭청의 죽음이 여기쯤에서 발견될 것으로 생각했다면 이것은 상감의 장인 금위대장을 노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어느 누가 이 같은 짓을 꾸몄을까?'

어느 시대나 '금서'가 나타날 때는 당대에 일어날 사건을 앞에 두기 마련이다. 조선왕조 태조왕 말년에 '남산의 돌을 치면, 남은 정(釘)도 없어진다'는 동요가 나돌았는데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남은과 정도전이 왕위계승 문제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요참(謠讖)'으로 대관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남(南)의 글자음과 여(餘)의 뜻소리를 합한 <남을>이 남은과 비슷하고, 정(釘)은 정(鄭)과 같은 음이므로 두 사람이 죽을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조 10대 연산군 때엔 '웃는 노구솥, 더러운 노구솥, 깨어진 노구솥(見笑矣盧古, 仇叱其盧古, 敗阿盧古)이란 동요가 나돌았는데 이것은 연산군의 패도광란을 노래한 것이다.

'견소의노고'는 왕의 파렴치한 패행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을 말하고, '구질기노고'는 광란으로 나라가 안정되지 못함을 뜻하고, '패아노고'는 이미 파멸에 이르렀음을 방언으로 노래한 것이다.

연산군은 성종 다음의 왕이다. 어머니가 성종의 후궁 정씨와 엄씨의 모함으로 내쫓기고 사사됐다는 사실을 안 연산군은 정씨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살해했다.

경연을 폐지하고 원각사를 기생양성소로 만들고 선비들을 대량학살했다. 민간여자들을 함부로 잡아들이고 시정을 공박하는 투서(投書)가 국문으로 쓰였다 하여, 국문을 아는 자를 잡아들이고 한글서적을 모조리 불태워 국문쇠퇴를 초래한 악행을 저질렀다.

이와 같은 모든 일이 '항아리 속의 기록'인 <호중록>에서 기원했다. 폐비 윤씨의 기록이 발견됨으로써 사건은 더욱 확대돼 제왕의 폐위로 몰아가는 일로 전개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수빈 박씨가 어렵게 얻은 왕손이었다. 정약용은 더욱 심각해졌다.

'<호중록>이 나타난 건 제왕의 폐위를 뜻하는 것이다. 나타날 내용이라면 당연히 '훈구파'와 '사림파'의 싸움일 것이다. 그런 게 없는 데다, 독을 먹고 죽은 낭청의 몸에 다음 보위를 이을 왕손에 대해 쓰인 건 무슨 뜻인가?'

[주]
∎낭청 ; 낭관이라고 함
∎내시부 ; 준수방에 있었다
∎내반원 ; 궐 안에 있는 내시들의 집회소


#추리,명탐정,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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