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전셋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때 불안하고 우울했다. 기한은 2011년 3월 말인데, 이사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선 우리 집을 소개시켜 주었던 부동산에 가 봤다. 2009년에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시세보다 1천만 원쯤 싸게 들어왔었는데, 그때보다 적어도 4, 5천만 원이 올랐다. 주변이 다 올랐단다. 이사 갈 곳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가족들과 의논했다. 말이 의논이지 현재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설명에 앞서 몇 가지 방침을 세웠다. 만약 주인이 4천만 원을 올려달라고 하면 무조건 이사를 해야 한다. 다시 서울시 밖으로 밀려나야(?) 할지도 모른다(도봉구가 서울의 마지노선이다). 3천만 원을 올려 달라고 하면 고려, 2천만 원을 올려 달라고 하면 빚을 내서 2년 더 연장, 물론 그 아래면 더 좋고···. 이렇게 단계별 전략을 짜놓았다. 지난해 12월 중순쯤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살던 분이라 시세보다 싸게 받아야 좋으실 거 아녜요? 당장은 내(주인)가 들어가 살 일은 없으니 2천만 원 정도만 올려주시면 어떻겠어요? 우리도 빚이 있어서 이자가 나가기 때문에 올려 주시면 그것으로 갚아야 할 것 같아요.""좀 더 내려주시면 좋은데…, 노력해 볼 게요."더 내려 달라고 길게 얘기했다간 더 올려버릴까 봐, 미리 짜 놓았던 전략대로 이사 안 가고 무조건 2년 더 살기로 했다. 우리 집 사정을 아는 지인들은 설 전에 집주인에게 돈을 마련해 주라고 했다.
"설 때 가족들, 친척들 다 모여 얘기하다가 더 올려달라고 하면 어쩔 거야?" 기한이 두 달이나 더 남았는데 미리 해줘야 하나? 남편한테 의논을 했더니 3월 말이나 4월 초가 돼야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친구들 말대로, 기한(3월 29일이 만기)은 안 됐지만 주변 시세가 너무 올라 더 올려 달랄까 봐 1천만 원 정도는 미리 해주기로 했다. 물론 여윳돈은 아니고 대출을 받아서 해주기로 했다. 대출금이 입금됐다기에 2월 23일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해드리기로 한 돈, 미리 좀 마련돼서 오늘 드리려 하는데 약속을 어떻게 할까요?""그런데 요즘 뉴스 봐서 아시죠? 올라도 너무 올랐어요. 지난번엔 내가 잘 모르고 2천 정도 얘기한 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4, 5천 정도 올랐는데 좀 더 받아야 할 듯한데…."'결국 이사를 가야 하나' 뒤통수 맞은 듯 '멍'
뒤통수를 맞은 듯 멍했다. '우리 이사 가야 하는 거야?'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그래서 미리 기한 전에 일부라도 해 드리는 거잖아요? 지금 2천만 원도 모두 빌리는 건데 월급쟁이가 무슨 수로 4, 5천만 원을 만들어요? 좀 봐 주세요. 물론 형편이 돼서 올려 드리면 저도 좋죠. 시세와 별 차이 없으면 우리도 이사 갈 때 편하지만 지금은 형편이 좀 어렵네요. 아이 대학 등록금도 내야 하는데요.""집값을 너무 싸게 내놓으니까 세입자들이 이사를 안 가려 해서 애먹어요. 우린 집 사놓고 그 집에 아직 들어가 살아보지 못했어요.""집 싸게 내놓으시는 것도 미덕이죠. 없는 사람한테 보시하시는 셈 치고 이번만 이 정도로 해주세요. 고맙게 생각하고 열심히 살다가 2년 후에는 더 올려 드릴게요. 만약 올려 드릴 형편이 안 되면 이사 가는 걸로 하지요.""알았어요. 제가 말 꺼내놓고 번복하기도 그렇네요. 설마 전세가 더 오르진 않겠죠? 너무 싸게 놓아서…." 전화를 끊고 울컥했다. 신문 기사를 보면 타협이 잘 안 돼서 집을 비워주고 이사를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신문에서만 보던 일이 나에게까지 번질 줄은 몰랐다.
결혼 25년 차, 내 집 없는 것이 그렇게 흠인가결혼 25년 차, 내 집 한 칸 없이 이사다니면서 집주인이 전셋값 올려달라고 할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서울의 공무원 임대아파트에 살다가 IMF 때는 남편의 사업 부채 때문에 정말 길바닥에 나 앉을 뻔한 적도 있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빚이 무서워 전세비 빼서 은행빚을 갚았다. 그래도 남은 빚이 있었다. 1998년, 이사할 곳을 알아보다가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보증금 200만 원 월세 15만 원씩 하는 의정부의 무허가 집에서도 살아봤다. 푸세식 화장실에 아이가 빠져서 난감했던 적도 있었다.
13가구가 사는 아주 작은 동네였는데 사람들이 좋아 잘 어울릴 수 있었고 아이 키우는데 흙을 밟을 수 있어서 좋았고 무엇보다 직장이 가까워서 좋았다. 출퇴근에 부담이 없어서 생활의 불편함 정도는 접어둘 수 있었다.
그러다가 큰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여름에 서울특별시민(?)으로 돌아왔다. 돈을 많이 모아서는 아니고, 수험생인 아이를 위해서였다. 의정부와 서울의 전셋값은 또 달랐기에 빚을 내서 이사해야 했다. 경기도와 가까운 서울이긴 하지만 차원이 달랐다. 서울시민이 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아파트는 비싸서 들어갈 수가 없었고 빌라로 들어갔다.
아쉬워서 이것저것 재지 않고 이사했는데 21평형에 네 식구가 사는 게 만만치는 않았다. 산밑이라 북적대지 않고 공기도 좋은 편이고 직장까지는 자전거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였다. 아이도 자전거로 5분이면 등하교가 가능했다. 잘살고 있는데 그놈의 뉴타운인지 뭔지 하는 정책으로 전셋값이 또 미친 듯이 뛰었다.
전세비를 3천만 원 올려 달라고 했다. 시세에 맞춰 40% 이상을 올린 것이다. 둘째 아이 졸업할 때까지 6개월 정도 미루면서 3천만 원에 대한 이자로 매달 30만 원씩을 더 내고 살았다. 두 아이 모두 고등학교 졸업은 했으니 이사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알아보던 중에 2009년 지금 집으로 이사를 왔다.
중랑천을 경계로 노원구와 도봉구의 전셋값이 달라도 엄청 달랐다. 도봉구는 교통이 더 편하면서도 전셋값은 훨씬 쌌다. 내가 살던 수락산 근처 21평형 빌라는 전세 1억5천만 원으로 올랐는데, 나는 32평 아파트를 전세 1억 원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서울에서 집값이 제일 싸다고도 했다. 그런데, 전셋값이 또 올라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철새도 아니고, 전셋값 오를 때마다 짐 꾸리는 일 "서럽다"전셋값이 오를 때마다 싼 곳을 찾아 떠나는 이사. 돈 없어 떠밀려 하는 이사. 서울 밖으로 밀려(?)나는 이사(물론 서울보다 공기 좋고 저렴한 집 구해서 외곽지역으로 자의적으로 가는 이사라면야 좋겠다. 하지만 직장 가까이에서 교통비라도 줄여볼 생각으로 서울에서 집값이 제일(?) 싸다는 변두리에 살고 있건만 2천 만원씩 올려주게 되는 게 현실이다)를 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2천만 원을 올려주기로 얘기를 끝냈고 이미 1천만 원은 만기일 한 달 앞당겨줬는데, 주인한테 또 전화가 왔다. 너무 적게 올려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1천만 원을 더 올려달라고 했다. 안 되면 천만 원에 대한 이자 셈으로 매달 10만 원씩을 달라고 했다.
집주인은 통화 중에 '전세 만기가 됐는데 세 안 놓느냐고'며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는 얘기도 했다. 부동산에서 너무 싸다며 착한 집주인을 부추긴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돈도 돈이지만 한국에서 상식을 바라는 건 정말 사치일까. 어떻게 전셋값을 한 번에 30%씩 올릴 수 있단 말인가. 2년 만에 올리는 것이긴 하지만 월급쟁이가 대학생 둘을 키우면서 1년에 1천5백만 원에서 2천만 원을 모으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기한 전에 전셋값 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했고 우리 집처럼 기한 전에 50%를 이미 지급한 경우에는 주인 마음대로 이사를 보낼 수 없다고는 한다. 그래도 슬프다. 나도 맘 놓고 살 수 있는, 이사 안 가도 되는, 전셋값 올라갈 걱정없는 내 집을 마련할 날이 오긴 올까?
주택은 '사는 곳', 재테크의 수단이어선 안 된다
남들 빚내서 집사고, 부동산 값 오르면 차액을 남기고, 다시 큰 평수로 옮길 때도 나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물론 그럴 형편이 안 됐던 것도 이유지만, 집이란 말 그대로 '사는 곳'이란 생각으로 어디서나 편하게 빚지지 않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부동산은 투기 대상이 돼선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아직도 전세를 면하지 못하고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됐지만···.
도대체 월급쟁이가 뭘 해서 2년에 수천만 원의 전세금을 올려줄 수 있을까? 정부는 대출받아 전세자금 올려주란다. 그러나 은행의 전세자금 융자혜택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3천만 원 이하의 소득자나 여기에 해당된다는데 과연 혜택받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젊은 부부들도 맞벌이면 대부분 해당되지 않을 것이고, 나처럼 쉰이 넘어서 연차가 쌓인 사람들은 연소득만으로는 해당될 일이 거의 없다.
정부의 주택정책은 바뀌어야 한다정부는 빚내서 전세비 올려주고, 빚내서 대학 학자금 내주고, 퇴직 후에는 연금으로 빚 갚고, 30여 년 동안 몸이 부서져라 일하라고 한다. 편안한 노후는커녕 평생 빚이나 갚다 끝나는 삶을 살아야 하나보다. 언젠가부터 인사로 "부자 되세요" 가 유행이 됐다. 세상이 온통 재테크에 관한 서적으로 홍수를 이루고, 인터넷에도 부자되는 비결 등이 화제가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여전히 돈 없는 사람들이 많다. 봉급인상이 물가 상승을 따라갈 수가 없다. 일할수록 가난해진다는 워킹푸어 시대다.
주택이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꼭 내 집이 아니어도 직장에서 돌아와 가족들과 편하게 쉴 수 있는 곳, 내가 살고 싶을 때까지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곳 말이다.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사회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사회비용도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 많은 사회비용이 들어가기 전에 정부는 나서야 한다.
전세자금을 지원할 게 아니라 임대주택의 공급 확대와 임차인 보호를 위한 법 개정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재건축 아파트의 임대주택 의무화 폐지 및 소형 주택 의무비율 하향 조정 등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오히려 임대주택의 의무화 확대 빛 소형 주택 의무비율을 상향 조정해서 서민들이 집 마련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인간다운 삶을 저당 잡힌 채 워킹푸어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