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일, 점심을 먹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고 있는 다목적 강당으로 달려갔습니다. 1학년 부장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고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느라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부장 선생님을 무대 뒤로 불러내어 대강 하고 마이크를 넘겨달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올해 특별활동부장인 저를 소개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20분. 주제는 계발(동아리)활동 소개와 활성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300명에 가까운 학생들 앞에서 성능도 별로인 마이크를 잡고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고역스러운 일입니다. 이틀째 강당에 모여 일방적으로 학교에서 준비한 것들을 전해 듣고 있는 학생들이 더 죽을 맛이겠습니다만. 저는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서 내려와 학생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웃옷 안주머니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습니다.
"이게 뭘까요? 결혼 청첩장 봉투입니다. 예쁘지요? 여기 오기 전에 서랍을 뒤져보니 이것이 있어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속에 들어 있는 바로 요것입니다."
'바로 요것'을 보여주자 학생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눈빛도 '확'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5천원 권 지폐였습니다.
"문화상품권을 준비하지 못해서 이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오늘 선생님이 여러분과 함께 나눌 이야기의 주제는 ○○활동입니다. 올해부터는 그것을 동아리 활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두 글자가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학생에게 이 5천원을 줄 겁니다. 아니, 그러기 전에 선생님하고 5분 정도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한데 그 친구에게도 5천원을 문화상품권 대신 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좋아요. 나오세요."
제가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첫 운을 떼었습니다. 그리고 20분 동안 학생들과 나름대로 하고 싶은 얘기를 충분히 나누었습니다. 그것이 돈의 위력인지 저의 상상력의 위력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돈을 탐하여 나온 학생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약에 네가 한 달에 300억을 번다면 그 돈을 어디에 쓰고 싶어? 한 가지 조건은 그 돈을 너의 행복을 위해서만 써야 돼."
"집 사요."
"그래? 그럼 좋은 집을 사고 싶겠지?"
"당근이죠. 정원도 있고 수영장도 있는 집요."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300억이면 살 수 있겠지?"
"그렇겠지요?"
"그럼 그 다음 달에 받은 300억으로는 뭐하지?"
"세계여행 가요."
"세계여행을 가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쓰기 나름이겠지요."
"그럼 넉넉하게 잡어서 한 10억?"
"예. 좋아요. 그 정도면."
"300억으로 30번은 세계여행 다녀올 수 있겠네?"
"그러네요."
"그럼 그 다음 달에 받은 300억으로는 뭐하고 싶어?"
"옷 사요."
"옷도 300억이면 평생 옷을 사고도 남겠지?"
"예."
"그럼 그 다음 달에 받은 300억으로는 뭐하고 싶어?"
"잠깐 있어 봐요. 그러니까 그 돈으로… 예. 저금해요."
"저금은 무슨? 다음 달에 돈이 300억이 또 나오는데."
"그럼 어려운 사람들 도와줘요."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만 쓰라고 했잖아."
"맞다."
약 5분 동안 그 학생과 제가 보여준 즉석 퍼포먼스의 목적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그다지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까요?"
느닷없는 질문에 학생들은 눈만 껌벅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원했던 바로 그 순간이 온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정숙을 강요하지 않고도 이런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교육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학교 도서관에 약 만 오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읽을 수 있는 책은 불과 몇 백 권, 혹은 몇 십 권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책들은 여러분들에게 종이 쓰레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일 년에 학교운영비의 4%를 책값으로 지불하는데 그것들이 종이 쓰레기가 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그것은 독서훈련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한 달에 300억을 주면서 대신 책을 읽지 말라고 하면 저 그 돈 안 받고 싶어요. 그만큼 책 속에 즐거움이 있고 행복이 있고 인생의 지혜가 다 들어 있는데 그런 책들이 다 종이쓰레기가 되고 마는 것은 너무나도 속상한 일이잖아요.
책을 읽을 때 조금씩 수준을 높여서 여러분의 독서 능력을 ○○해야 하는데 여러분이 읽고 싶은 책만 골라서 읽다보니 그리 된 것이지요. 그 ○○이 무엇일까요? 그 두 글자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 돈은 안 줍니다. 도서상품권 대신 돈을 준비한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는데 조금은 슬픈 일입니다. 이것도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함으로써 오는 진정한 행복을 소유하지 못해서 생긴 일일 수도 있어요. 그 행복을 돈으로 사려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가 확인했듯이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그보다는 여러분 자신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여기서 ○○이 무엇일까요?"
그 답을 잠시 미루고 저는 우리 학교 계발(동아리)활동부서를 하나씩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갈무리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많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만큼 선생님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선생님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자연과 책입니다. 철마다 피는 꽃도 그렇고 산에 오르는 것도 그렇고 가을바람을 느끼며 산책하는 것도 그렇고 모두 선생님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입니다.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도 선생님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책과 자연을 통해서 선생님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이 선생님 자신을 꾸준히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행복이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란 말씀이지요. 나를 ○○하는 것, 이것이 정말 중요한데 솔직히 요즘 입시교육 하느라 학교에서 이런 거 별로 신경 안 씁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는 토요일마다 두 시간씩 꼭 계발활동을 합니다. 요즘은 계발활동을 동아리 활동리라고 부르지요. 여러분이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면서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하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답은 '계발'입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다음 주엔 계발(동아리) 활동 부서담당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연수를 하려고 합니다. 강의 제목이 '어린왕자와 교육적 상상력'입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가 그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면, 교사는 그 어딘가에 상상력의 우물을 숨기고 있을 때 아름답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교육공동체벗>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