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2010년 6월 30일)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120만 명을 돌파하고, 결혼이민자는 13만6556명에 달했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학교교육과 매스 미디어, 그리고 국가 정책 속에서 우리는 단일민족과 순혈주의 이념이 최상인 것으로 배웠다.
그 결과 우리나라 국민과 학생들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중증의 인종차별적인 사고를 가지고 생활했다. 그러한 편협한 인간관은 타민족 타문화에 대해 배려하지 못하고 우물안개구리 같은 사고를 하게 만들었다.
21세기 이데올로기는 경계 없는 국가관, 유목민, 세계화의 새로운 조류 속에서 우리에게 문화적 아킬레스건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다문화 가정과 아동들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인가?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학교와 가정에서 정체성 혼란을 어떻게 겪는가를 보여주는 책이 <가장 검은 눈동자>이다.
저자는 다문화가정에 살고 있는 아동들이 주류 한국 사회의 문화와 교육 체제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적응하고 있으며, 나아가 어떤 교육적 경험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약 일 년에 걸쳐 다섯 명의 다문화가정 아동을 대상으로 다문화가정의 한국 정착생활, 가정에서의 일상생활, 학교생활, 그밖에 아동들이 겪는 교육 문제에 대한 이야기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앞으로 다문화 교육 정책이 대규모의 학교 지원 정책이나 프로그램 개발, 일시적인 문화 체험 등으로 구성되는 관주도의 접근방식이 제공해 줄 수 없는 또 다른 형태의 해결책과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
백인에 대한 허상이 깨지며 정체성에 눈떠서문에 이어 시작되는 첫 번째 이야기는 저자인 진주 교육대학교 김영천 교수가 자신이 미국에 유학 갔을 때 겪은 실화를 이야기 형식으로 나타냈다. 소수자로서의 비애와 금발머리와 파란 눈에 대한 동경이 깨어지고 '백인되기'의 신화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허상이었다는 자전적 이야기다.
그는 백인에 대한 환상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백인처럼 되고 싶었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백인 나라로 이사 가려고 작정했다. 교수가 되기 위해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 입학한 노총각. 어느 날 미국인 친구 집에 놀러가 주차장 옆에서 서성거리는 자신을 보고 누군가가 절도범으로 신고해 경찰이 출동했다. 단순히 노란색 피부라는 이유로.
200달러짜리 파커 만년필을 반환하고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하자 백화점의 특별창구로 올라가 수배범처럼 사진을 촬영하고 현금을 되돌려 받으면서 느낀 모멸감은 백인의 문화에 동화되기 위해 애썼던 자신의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자유의 여신상이 자신을 구원해 줄줄 알았다. 그러나 그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기 위해 100명이 넘는 흑인이 작업 도중에 떨어져 죽었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몸으로 겪었다.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미국에서 살자는 파란 눈과 금발머리의 J를 뒤로한 채 시카고 오헤어 공항을 떠나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가 그렇게 동경하던 백인의 나라에 살지 않겠다고 약속한 진짜 이유는 자신의 찢어진 눈매와 검은 눈동자, 노란색 피부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걸어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다문화 아동의 슬픈 자화상두 번째 이야기는 한국 다문화 아동의 슬픈 자화상이다. 한국이(가명. 초등 5년)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메단 섬이 고향이다. 한국에 들어온 그녀는 문화적 차이로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인도네시아는 한국보다 훨씬 자유로운 생활양식과 문화규범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호칭이 복잡하고 배우기 어려운 한국어와 고부갈등과 남존여비 사상에 힘들어 했다.
한국이는 유치원에 입학하면서부터 정체성 혼란에 빠졌다.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물었다. "어머니는 홰 하필 외국인인가?" "아버지는 왜 외국인 여자와 결혼했을까?" "나는 왜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는가?" 한국이는 5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마법은 한국어 숙달이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담임선생님의 도움은 한국어를 숙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갈색 피부의 은주(가명) 어머니는 필리핀 민다나오 출신이다. 놀랍게도 2년에 세 명의 아이를 출산한 그녀는 5년 동안 함양의 시부모님들과 함께 살며 농사일을 거들다 거창으로 이사해 살고 있다.
요즈음 은주 아버지와 어머니는 직업이 없다. 작년까지만 해도 근처에 있는 김치공장에 함께 나가 일을 했었지만 김치공장의 사정이 나빠지면서 출근하는 날이 줄었다. 은주네 가족은 기초생활 수급자로 의료보험, 생활비보조, 자녀 교육비, 교육활동비 등을 지원받고 있다.
은주가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은 사회다. 은주 어머니가 사회 문제집을 샀지만 은주에게 사회를 가르쳐주지 못한다. 언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은주 어머니는 한국 학부모의 교육열이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높고 자녀들의 학원비로 고액을 지불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은중(가명)이는 창원시 왕릉동에 위치한 왕릉초등학교 4학년이다. 은중이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출신으로 한국에 시집가면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한국남자와 국제결혼을 했다.
1997년의 IMF는 은중이 집도 비켜갈 수 없었다. 회사가 부도나 실직한 아버지는 신세한탄을 하며 매일같이 폭음을 했다. 게다가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야수로 돌변해 은중이 어머니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살림살이를 깨부수며 아들들을 괴롭혔다.
어머니는 남편의 상습적인 구타와 경제적 무능함을 견디지 못하고 별거에 들어갔다. 은중이 어머니는 그동안의 삶의 터전인 부산을 떠나 일자리가 있는 창원으로 옮겨와 외삼촌과 함께 살았다. 차라리 아버지가 없는 게 낫다는 은중이 얘기다,
"아빠가 저와 동생들을 왜 버렸는지 잘 모르겠어요. 왜 술만 먹으면 우리들을 때리는 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차라리 아빠가 없는 것이 편해요. 엄마가 저와 동생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요. 다른 집처럼 부자로 살 수는 없겠지만 지금이 옛날보다 훨씬 나아요"은중이 어머니는 한국생활이 너무 힘들어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년부터는 어머니의 나라 인도네시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은중이는 아직 어린 탓에 자신의 이러한 정체성 혼란을 개념화할 수 없다.
하니(가명) 어머니는 한국에 시집온 지 13년째인 조선족 출신이다.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남편과의 문화 차이였다. 결혼 초부터 남편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는 명령조였다. 어머니가 하니를 임신했을 때 한국에는 IMF가 찾아왔고 남편은 직장인 조선소에서 실직했다.
어머니는 한국에 올 때 이런 시련을 상상조차 못했다. 하니는 며칠 전 어머니의 표정과 떨리는 말투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꼬치꼬치 캐물어 알게 된 사실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비행기 표를 살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비밀로 부치고 혼자 아파하고 있다.
봉식(가명)이 어머니는 필리핀 출신이다. 가족과의 불화, 남편과의 다툼으로 인해 이사벨은 자신의 삶에 대해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사벨은 지난 3년 남짓 지독한 향수병을 앓으며 고통스러워했고, 이제 지금의 현실은 피할 수 없는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현실도피의 수단은 인터넷이다.
봉식이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한글조차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한다. 부모의 무관심은 아이의 학교생활과 학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4학년 1학기를 보내고 있는 봉식이는 현재 2학년 1학기 내용을 공부하고 있다. 봉식이 담임의 얘기다.
"안돼! 하나도 안돼요. 글자도 모르고 책을 주면 다 찢어 버리고. 하도 책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책가방을 봤더니 온갖 쓰레기들이 다 들어 있어요. 집에서 가방도 열어 보지 않나 봐요. 매일 확인하고 아이를 봐 줘야 하는데 안 봐줘요"자신의 아픔을 자식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눈 -가장 검은 눈동자김씨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에서 전역한 후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이다. 경남 산청이 고향인 그의 외가는 베트남이다. 거창시의 큰 횟집에서 평생을 종업원으로 일했던 어머니는 췌장암으로 51세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 어머니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숨을 거뒀다.
그는 어머니 묘소에 노란색의 복수초를 한 아름 캐다가 심어 드렸다. 복수초는 눈 속을 헤치며 핀다. 그 꽃은 피지도 못하고 바로 져버려 아쉬운 꽃이다. 복수초는 머나먼 이국땅에 오셔서 고생만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같았다. 묘소에서 돌아와 우연히 어머니의 일기장을 보았다. 일기장 속에는 자신을 낳은 후 기뻐서 쓴 기록이 있었다.
"병원에서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라고 소리치는 시어머니와 남편 소리. 너무 기뻤다. 그리고 나는 가장 먼저 아들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까만 검은 눈동자. 예쁘다. 마음이 놓인다.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나하고 달리 정말로 눈동자가 까맣구나. 이제 우리 아들을 다른 사람들이 외국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겠구나."그녀의 눈은 노란색이다. 그래서 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살았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을 때 먼 조상 할머니가 프랑스 남자의 아기를 가져 혼혈아를 낳았는데 피부는 까무잡잡하였지만 유독 눈만 노란색에 가까운 갈색이었다.
이 책을 쓰기 전 저자의 연구원들은 면담이 취소되기도 하고 연락이 두절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해온 어떤 작업보다도 어렵고 좌절을 맛보기도 한 작업이었다. 이 책은 피부색깔이 아닌 동일한 인간으로 대접받고자 하는 다문화가정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그린 책이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문화촌뉴스' 및 '네통'에도 송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