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초가집을 생각할 때, 전설의 고향이라도 먼저 떠 올리게 된다. 아니면 드라마 속에서 늙은 할머니 한 분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방문을 열고 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허리라도 두드리는 장면을 연상하지나 않을지. 초가집은 과거 우리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집으로 조명이 되었다. 그래서 없는 살림살이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하였지만.
하지만 요즈음에는 초가집을 일부러 지어놓고, 전통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민속촌 같은 곳에는, 기와집보다 오히려 초가집이 더 인기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옛날의 풍속을 찾는 나이 드신 분들의 그리움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정작 초가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면, 아무도 선뜻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다.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의문화재 단지 안에 있는 낭성초가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에 소재한 문의문화재단지. 성문처럼 생긴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초가집이 몇 채 보인다. 이 집들은 청원군 내에 있는 집들을 이건한 것이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초가가 두어 채 되는데, 그 중 한 채가 바로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8호인 '낭성 관정리 민가'이다.
이 낭성 관정리 민가는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의 신방호씨가 살던 집이다.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초가형태로 꾸며진 이 집은, 원래 모습 그대로를 이건한 것이다. 가옥의 구조는 광이 달린 대문채와 ― 자형의 안채로 구분된다. 본래 이 집에는 '사주문(四柱門)'이 담장사이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으나, 이건을 할 때 광과 함께 설치했다고 한다.
1994년도에 이곳을 문화재단지로 조성하면서 옮겨왔다고 하는 낭성 관정리 민가. 3월 1일 찾아간 문화재단지는 빗방울이 떨어져 그런지,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날씨까지 바람이 불고 쌀쌀해서인가, 대청호의 찬바람을 쏘이기가 싫었나 보다.
ㄱ 자형의 문간채, 민초의 생활이 보여
현재 충북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돼 있는 이 집은, 대문채가 ㄱ자 형태로 되어있다. 돌로 쌓은 담과 한편이 연결이 된 대문은 초가로 된 일각문이다. 대문 안쪽으로는 ― 자로 구성된 안채가 정면으로 보인다. 안채의 대청과 대문이 일직선상에 있어, 바람이 시원하게 소통할 듯하다.
대문채는 안으로 들어가면 출입구 옆으로는 마구간이 있고, 꺾인 부분에는 광채를 달아냈다. 아마도 이곳으로 옮기면서 조금은 형태가 바뀐 듯도 하다. 광채는 판문을 달아냈으며,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다. 대문채는 전체적으로 5칸 구성을 하고 있으며, 대문채 방 등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관정리 민가에 살던 사람들은 온전한 민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범한 민가 안채에서 찾는 색다름
낭성 관정리 민가의 안채는 6칸 일자집이다. 이런 형태는 중부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민초들이 살아가는 초가의 모습이다. 안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으로부터 부엌 두 칸, 안방과 윗방, 그리고 한 칸의 대청과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 앞으로는 벽을 내달았다. 이런 벽이 돌출돼 있어 앞으로 보면 6칸 반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부엌 옆으로 안방과 윗방을 계속해서 놓고, 앞으로는 대청과 건넌방까지 연결하는 툇마루를 놓았다. 그런데 이 툇마루가 건넌방 앞으로 가면, 높임마루로 높여놓았다. 평범한 것에서 보이는 색다름이다. 이렇게 조금은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 민초들이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요 멋이었나 보다.
고단한 삶 속에서 찾는 여유건넌방을 돌아가면 왜 반 칸의 벽이 돌출이 되었는지 이해가 간다. 건넌방 측면에 문을 내고 그 앞에 좁은 툇마루를 놓았다. 그곳에서 정면에서 감상할 수 없는 또 다른 주변의 경관을 보았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사랑채를 지을 경제적인 여력이 없는 민초들이, 안채와 담으로 경계를 막아 툇마루를 사랑으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평범한 집에서 찾는 조금은 색다른 여유. 아마도 우리 고택에서 보이는 이런 여유로움 때문에 고택답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나, 꼼꼼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이 바로 고택답사다. 좁은 초가에 살면서 없다고 기가 죽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마음에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옛 사람들. 지금 우리가 꼭 배워두어야 할 여유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