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덕분에 차비를 아끼기는 했으나 버스는 너무 느렸다. 러시아워 시간대이기도 했지만 왠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옆 좌석의 중년 아줌마한테 카오산 가는 버스가 맞냐고 물었지만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옆에 앉은 아가씨가 대답을 해주었다. 노선이 바뀌어서 다른 차를 갈아 타야한다고 했다.
우리는 발음도 이상한 곳에서 내려 카오산행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그러나 태국 사람들은 친절하게 우리를 잘 안내해주었다. 버스에서도 배낭을 앞뒤로 멘 우리를 배려해 주었다. 서 있을 때는 공간을 마련해주었고 자리가 나자 서영이에게 앉으라고 양보까지 해주었다. 어쩜 그들 눈에도 한가족이 배낭을 메고 이국의 버스를 타고 헤매는 모습이 안타까웠거나 재밌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카오산엔 무사히 도착했으나 다른 문제에 부딪쳤다. 본래 계획엔 소란스런 카오산로드나 람부티로드를 벗어나 삼센로드에 숙박을 할 예정이었으나 밤이 되어 찾기가 힘들었다. 낯선 지역에서 지도 한 장 들고 어딘가를 찾는다는 것이 밤에는 정말 고역이다(이는 이후 몇 번이나 부딪치게 되는 상황이다).
할 수 없이 람부티의 한복판 에라완하우스에 숙박하기로 했다. 그런데 더불침대에 엑스트라베드 하나를 추가하니 900바트나 한다. 삼센로드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갈 경우 500~600바트 정도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고생해가며 아낀 택시비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 아닌가, 시간은 시간대로 길 위에서 버리고.
그러나 우리는 여행을 왔다. 일을 보러 온 것이 아닌 것이다. 빠른 길을 나두고도 멀리 돌아가는 게 여행이다. 비용이 도로아미타불이 아니라 오히려 더 들어갔을지언정 시내버스를 탄 것은 잘 한 일이었다. 만원버스 안에서 현지인과 같이 섞여 눈짓으로 대화하고 호기심과 배려가 섞인 양보를 받는다는 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여행이 주는 재미이다.
버스는 앞사람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비좁았다. 저쪽에선 차장 아줌마가 용케 사람들 사이로 몸을 빼내 차비를 거두러 다닌다. 아내는 큰돈 잔돈을 모두 꺼내 손바닥에 놓고 주위사람에게 카오산, 하고 말했다.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참견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차비가 거리마다 달라 의견이 제각각인 모양이다. 마침내 차장 아줌마가 오더니 아내의 손에서 20바트 지폐 하나와 동전 몇 개를 집더니 빙긋이 미소를 짓는다. 아내가 한 명은 어린이라고 서영이를 가리키자 차장은 물론이죠, 하는 눈빛으로 대답을 한다.
나는 앞뒤로 배낭을 메고 아내는 배낭에다 카메라 가방을 앞에 차고 서영이는 배낭만 멨다. 우리 가족의 공간은 족히 다른 사람들의 두 배가 된다. 버스에서는 불편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불편이 주위 사람에게까지 미친다. 아내와 나는 짐이 많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물론 눈빛이다.
내가 짐을 가리키며 돈을 더 낼 의향이 있다고 하자 차장은 무슨 뜻인지 몰라 나를 쳐다본다. 옆에 있던 젊은 남자가 말한다. 우리는 사람에게만 차비를 받아요!(only person to money!) 오, 그랬다. 나는 이들보다 더 화폐화된 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불편함, 미안함, 이런 감정까지도 화폐라는 매개체를 통해 해결하려는 욕구, 쉽게 말해 돈으로 때우면 다 된다는 사고가 나도 모르게 배어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치면서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을 토론 주제로 삼은 적이 있었다. 날마다 계단을 청소하는 미화원 아줌마, 경비 아저씨. 길거리 환경미화원, 음식점 서빙 아줌마, 주차장 아저씨,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택배 기사 등등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 그러나 꼭 필요한 사람들. 이들에 대해 한 학생은 명쾌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돈을 받고 일하잖아요." 그랬다. 이 학생에게 그들은 단지 화폐로 매겨진 경제활동일 뿐이지 사람이 있는 건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로봇을 갖다 놓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을 꼭 빼닮았다.
우리의 아들들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화폐라는 계량화를 통해 인간이 사물화되고 소외 당하는 비극적 현실을 누가 왜 만들었는가. 그런데 이 비극이 가장 효율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현재 누리고 있는 효율보다 더 효율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언젠가는 그들 자신이 소외 당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효율의 두 가지 속성. 속도와 경쟁은 그 누구에게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목적적이다. 그 등에 올라타 남보다 앞서 달릴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내팽겨친다. 그 때의 아픔은 속도와 거리에 비례한다.
비교적 속도와 경쟁에서 효율적이지 못했던 나도 우리보다 조금이라도 느린 세계에 오니 여지없이 화폐화된 사고방식이 드러난다. 본능처럼 아니 본능보다 더 본능적으로 사유가 굳어진 것이다.
어느 곳인가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한결 공간이 넓어졌다. 누군가 서영이의 배낭을 잡아당겼다. 다른 사람도 아닌 딸 아이의 배낭을 잡고 끄는 것이 내 신경을 거슬렸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째려보았으나 그 눈길을 받는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웬 아줌마가 자기 앞에 자리가 나자 서영이에게 양보하는 것이었다.
서영이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투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자리에 앉으라고 하자 그제서야 서영이가 앉았다. 내가 인사를 하라고 하자 조그맣게 들릴 듯 말듯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쌩큐." 아줌마는 외국인 아이에게 더 큰 미소로 답했다. 캅쿤카!(고맙습니다) 내가 한 마디 더했다.
곧 이어 다른 자리가 나자 중년의 남자가 아내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아내가 머뭇거리다 남자의 정중함에 못 이겨 자리에 앉았다. 아내의 입에서도 '캅쿤카'가 나왔다. 고맙게도 우리 가족이 태국사람과 나눈 첫마디는 모두 '고맙습니다' 였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010년 11월 15일부터 12월 16일까지 우리 가족 세명이 태국 롭부리에서 시작하여 말레이 반도를 따라 싱가폴까지 여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