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밖에서 만나는 한국저는 나라밖에서 수없이 많은 한국을 만났습니다.
세계 각지의 오지에서 만나는 한국의 가전제품, 한글로 된 서울의 버스노선표를 달고 달리는 러시아의 한국중고차 버스, 각국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거리를 밝히고 있는 한국기업들의 광고 전광판, 일본의 호텔 TV에서 수시로 만나는 한국의 막걸리 광고 등 이제 어느 대륙, 어느 곳에서나 한국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처럼 한국에서 생산된 하드웨어 제품을 통해 한국을 만나는 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우선은 한국과 인연 맺은 사람들과의 만남입니다. 한국의 승마장에서 2년간 일했다는 몽골의 마부, 광주의 한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캐나다 래브라도의 젊은이, 아들의 여자 친구가 부산에 있다는 미국 메인주의 아주머니, 한국에서 돈을 벌어 가게를 냈다는 중국 내몽골 후허하오터 잡화점 주인, 한국에서 한국요리를 배워왔다는 케냐 나이로비 호텔의 주방장 등 당사자가 한국을 경험한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친인척이 한국에 있거나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람까지 합치면 과연 한국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자신의 부인이 한국의 연예인에게 푹 빠져 있다고 하소연하는 일본 남편을 만나는 것도 아주 오래 전 얘기고, 한국의 드라마가 시청률 80%를 돌파했다는 몽골의 얘기도 오래 전 얘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건 한국의 아이돌 스타들이 브라운관을 누비고 한국의 드라마가 상시로 방영되고 있습니다.
라이따이한과 코피노그러나 또 다른 한국과의 인연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국을 여행하다 보면 큰 도시 공원의 추모비로 한국을 만납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젊은 영혼들의 이름이 가득 음각된 전몰장병 기념비의 기단과 마주하는 것은 큰 슬픔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이프코드 프로빈스타운 필그림 모뉴먼트 옆의 작은 비석은 저를 더욱 가슴 미어지게 했습니다. 이 외지고 작은 마을에서 한국전쟁에 참여한 젊은이의 전사통보를 받는 것이 부모뿐만 아니라 앞뒷집 이웃들에게 얼마나 애통한 일인지가 짐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비통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탄생 때부터 축복받지 못한, 성장해서도 여전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라이따이한과 코피노들입니다. 한국 남성과 베트남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코피노들은 한국인의 도리와 책임에 대해 의구심어린 질문을 던지는, 분명한 한국의 자취입니다.
외국에 나가면 올림픽 개최나 월드컵 4강 진출을 들먹이며 한국을 상기시켜야 하던 때를 지나 한국 드라마 내용을 술술 꿰거나 한국 배우나 가수를 얘기하는 외국인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은 때를 살고 있습니다.
몽골 초원에서의 한국 드라마이처럼 나라밖 낯선 곳에서 한국의 흔적을 만나면 처음에는 반가움이고, 이어서 자부심이 목까지 올라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로 이점이야말로 제가 각지를 여행하면서 실망했던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어렵게 당도한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의 외진 마을에서 코카콜라의 벤딩머신을 만나는 기분이라니…….
2009년 몽골을 방문했을 때, 몽골의 지상파 방송으로 방송된 한국의 드라마가 시청률 80%를 기록했다는 소리를 듣고 저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노동당 투표의 결과 같은 그 수치도 놀라움이지만 초지의 몽골인이 한국의 쉬크한 드라마 한 편을 본다는 것은 문화의 다양성 측면에서 보면 희비가 교차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타문화를 이해하는 기회기도 하지만 게르(Ger) 속의 TV 한 대가 초원을 사는 유목민으로서의 그들의 전통과 사고를 팽개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총체적인 한국의 이미지를 수출하는 입장일 테고 인식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게르 속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는 몽골의 유목민은 수천 년 동안 살아온 방식이 아닌 한국 드라마 배경으로 노출된 서울 아파트와 거실이 그들의 꿈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 문화의 다양성을 헤치는 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필리핀은 문화적 피침상태아무튼 한국은 이제 무차별적인 한국 문화의 침투를 그들의 입장에서 염려해야할 만큼 큰 위상의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지난 3월 2일부터 3월 5일까지, 3박 4일간 필리핀 세부와 막탄섬을 다녀왔습니다.
필리핀항공의 기내식은 검정깨가 뿌려진 흰쌀밥에 고기김치볶음이 주식이었으며 김치의 찬과 떡이 후식으로 놓였습니다.
막탄섬은 24시간 운영되는 한국식품점에 한국 상품들로만 채워졌고, 즐비한 한국식당에서 삼겹살구이와 김치찌개, 된장찌개는 상시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항공, 세부퍼시픽항공의 허브공항인 막탄세부국제공항 출국장 라운지의 가게들 메뉴는 한글로 내걸렸으며 한국 돈의 사용에도 전혀 불편이 없습니다.
인천행 필리핀항공의 기내식에도 흰쌀밥에 쇠고기볶음, 김치와 오이장아찌, 벌꿀고추장이 올려졌습니다.
저는 이번 필리핀 여행에서 한국 밖에서 한국에서보다 더욱 한국적인 식사로 매 끼를 누리는 이상한(?) 대접을 즐겼습니다.
필리핀은 1521년 마젤란의 당도 이후에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고, 스페인과 미국의 밀약으로 미국으로 넘겨집니다. 미국의 식민지배에 이어 2차세계대전 중에 3년 동안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독립된 그들. 제가 목도한 필리핀의 막탄섬은 또다시 문화적 피침 상태였습니다. 한국에 의한…….
더 이상, 외국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는 미국과 영국인의 아집, 어느 나라에서나 영어로 말을 건네는 그들의 교만에 진저리를 냈던 제가 이번 여행에서 그들처럼 태깔을 부린 격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제력은 이렇게 세계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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