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거리를 사기 위해 동네 슈퍼로 갔습니다. 쌀을 달라고 하니까 슈퍼주인은 파키스탄 쌀을 내주었습니다. 이란에서 파키스탄 쌀은 가장 저렴한 쌀인데 내게 묻지도 않고 이 쌀을 내밀었다는 뜻은, 날 굉장히 못 사는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조금 씁쓸했습니다. 사실 저렴한 파키스탄 쌀을 살 생각이긴 했지만 타인에게 가난한 사람으로 인증 받은 기분이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밥 하는 건 우리나라 밥 짓기보다 쉬웠습니다. 무조건 물만 많이 넣고 끓이다 보면 물량이 줄어들면서 꽤 찰기가 있는 구수한 밥이 완성됐습니다. 물론 이란인들은 이 쌀로 건조한 밥을 만들지만 난 우리나라 밥처럼 수분이 많은 밥을 만들어냈습니다.
찌개도 끓였습니다. 찌개는 키쉬섬에 들어오기 전 항구 근처 야채가게에서 산 감자와 양파를 큼직하게 썰고, 마늘도 납작납작하게 저며서 넣고, 고추장을 풀어서 끓였습니다. 한국에서 가져간 다시마와 멸치도 넣고, 소금으로 간 했는데 너무 맛있는 찌개가 완성됐습니다. 꽤 큰 냄비로 한 냄비 끓였는데 아이들과 함께 밥 한 솥 찌개 한 냄비를 다 먹어치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란에서 끓였던 방식으로 찌개를 끓여봤는데 이 맛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습니다. 풍요로운 한국음식에 길들여져서 입이 고급스러워진 게 문제인지 아니며 이란의 감자와 양파가 더 맛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둘 다 이유일 것 같습니다.
사실 야채와 과일이 이란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모양은 볼품없지만 맛은 정말 좋았습니다. 작고 볼품없는 모양으로 봐선 비료나 농약 이런 게 사용되지 않은 유기농 농산물인 듯싶습니다. 자연의 순수한 힘만으로 길러져서 그런 좋은 맛이 나는 듯한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란 감자와 사과가 자꾸 생각났습니다.
맛있는 점심을 먹은 후 우린 자전거를 타러 가기로 했습니다. 자전거는 호텔에서 빌렸습니다. 호텔 마당 한쪽에 세워진 자전거들은 호텔에서 손님에게서 돈을 받고 빌려주는 자전거들인데 관리가 잘 안 된 것 같았습니다. 의자에는 먼지가 소복하게 앉았고, 바퀴는 바람이 빠진 게 많았고, 체인도 녹슬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중 탈 만한 걸로 골라 한 시간에 2천토만으로 빌려 해안도로를 찾아 나갔습니다.
숙소에서 해안 도로로 가는 길은 자전거를 타기에 정말 좋았습니다. 차도와 인도가 뚜렷하게 구별돼 있고, 인도에는 사람이 안 다니기에 우린 인도 위를 마음 놓고 달렸습니다. 해안으로 가는 동안 본 풍경은 정말 멋졌습니다. 튼튼하고 아름답게 세워진 하얀 별장들이 푸른 나무들 사이로 보였습니다. 정말 멋진 풍경이었고, 바람은 기분 좋을 정도로 시원했습니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정말 상쾌했습니다. 또한 길을 잃을 걸 두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길은 단순했습니다.
우리가 해안 도로로 가고 있는 중에 해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길 위에 작은 카펫을 깔았습니다. 아잔 소리에 맞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길 위에서 기도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기도를 하게 돼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매일 이렇게 하루에 다섯 번이나 기도를 한다면 정신이 타락하는 일 같은 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위해 하루에 세 번 밥을 먹으면서 몸에 에너지를 보충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신을 위해서도 이렇게 하루에 다섯 번이나 양식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란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표정이 순하고 밝았습니다.
기도하는 남자를 뒤로 하고 우리는 가던 길을 갔습니다. 마침내 해안가로 왔고, 초입에서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아랍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자전거 대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자전거는 호텔 자전거와 달리 새 자전거처럼 보였습니다. 우린 호텔에서 두 대를 빌려왔기 때문에 한 대만 빌렸습니다. 새 자전거가 호텔보다 오히려 가격은 더 쌌습니다. 1500토만이라고 했습니다. 호텔 지배인에 대해서 배신감이 느껴졌습니다. 손해 본 것 같은 기분, 고물 자전거를 2천 토만에 빌린 게 억울했습니다.
젊은 남자는 우리에게 일본인이냐고 물어봤습니다. 완전히 뜻밖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코리아와 재팬은 좀 사는 나라에서 왔냐는 뜻이고, 우리의 몰골이 초라하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하긴 자전거를 타러 나올 때 애들은 선명한 색으로 옷을 입었고, 나도 밝은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옷 색깔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국적이 다 바뀌었습니다.
아이들과 나는 모두 자전거를 한 대씩 타고 해안도로를 달렸습니다. 우리 앞에서 한 무리의 젊은 남녀들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자유롭게 걷고 있었으며 차도르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까 동남아시아 사람들 같았습니다. 우리처럼 여행 온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들은 바다 가까이 방파제께로 내려가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었습니다. 그들을 뒤로 하고 우린 어두운 해안 도로를 달렸습니다.
도로는 수평으로 평평한 게 아니라 해안의 곡선을 따라 꼬불꼬불했고,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었습니다. 오르막을 오를 때는 숨이 가빠지고 힘들어서 땀이 맺혔지만 내리막길을 달릴 때는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면서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땀이 다 식을 만큼 시원해졌습니다. 이런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몇 번씩 반복해서 해안도로를 달렸습니다. 도로에는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사람도 없었기에 우리 가족이 전세 낸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칠 것 없이 쌩쌩 달릴 수 있었습니다. 검은 바다와 앞으로 이어진 도로 그리고 자전거, 세상에 존재하는 건 이것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몸은 가벼워지고 정신도 맑아졌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자전거를 타다가 시간을 보니까 예약한 한 시간이 다 됐습니다.
다음에 누군가 키쉬섬을 방문한다면 해안에서 자전거 타기는 정말 권하고 싶습니다. 물론 자전거는 호텔 보다는 해안가에서 빌리는 게 가격도 저렴하고 성능도 우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