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신조어 중에 '아오안(out of 안중(眼中)'이라는 말이 있다. 아내폭력은 우리에게 '아오안'이었다. 다시 말해 관심 없는 이슈다. 그럼에도 '아내폭력'에 대해 말하기로 했다. 2011년을 맞아 새롭다(新)라는 접두어를 붙여본다. 주제는 식상하지만 아내폭력을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는 새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남의일, 집안일, 고리타분한 일,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새롭게 "나의 일, 사회적 범죄, 반드시 해결해야할 일"로 새롭게 거듭나길 바란다...<편집자말>
'만삭 의사부인의 죽음'을 두고 세상이 시끄러웠다. 검찰은 지난 1월 14일 만삭의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백아무개(31·의사)씨를 구속 기소한 상태다. 백씨는 자신의 집에서 아내와 부부싸움을 하다가 목을 눌러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욕실에서 발견된 시신의 목과 머리에 있는 외상, 침실에 있던 혈흔, 아내의 손톱에 있던 남편의 DNA, 얼굴과 목에 있던 멍 등이 남편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남편은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남편의 주장대로 만삭의 아내가 욕조에 쓰러져 돌연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부사이의 일은 개입할 수 없다'는 오래된 무관심과 방임으로 부부싸움과 아내폭력-아내살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고,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만삭아내 살해범으로 남편을 떠올리는 것에는 (범행의 진위여부를 떠나) 대단한 추리가 필요한 게 아니다.
아직도 한국사회에는 특별히 분노할 이유가 없을 때조차 모아두었던 화를 아내에게 분출하는 남편들이 많고, 이런 남편들이 화를 마음껏 뿜어내는 찰나 아내를 살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편들은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아내에게 분노를 폭발하지만 분노가 가라앉은 후에는 "죽일 마음은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도 특별히 죽일만한 이유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남편에 의한 아내살해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5일에 한 명씩, 아내는 남편에게 살해당한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0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집계한 결과 남편 혹은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된 여성들은 최소 74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5일에 1명꼴이다. 이것은 언론에 보도된 최소한의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제로 (남편에 의해) 살해당한 아내의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살해 시도가 미수에 그친 사건도 54건에 달하고 있다. 이들 중 32명의 아내와 22명의 여자친구가 각각 남편과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할 뻔했다. 또 그런 위험한 상황들은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지난해 3월 언론에 보도된 살인미수 사건을 살펴보자. 광진구에 사는 미연씨(가명)는 알몸으로 작은방 출입문에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남편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친정식구를 죽이러 가겠다"며 나간 사이 간신히 탈출해 경찰해 신고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2월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자친구가 뿌린 시너를 온몸에 맞아야했던 정현씨(가명)는 고함을 질러 주변에 도움을 요청, 위기를 모면했다.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운 좋게(?) 살아남은 54명의 여성을 합한다면 한 해 최소 128명의 여성들이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으로부터 살해되거나 살해 위험에 노출된 것을 알 수 있다. '128'이라는 숫자는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일상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아내폭력(살해)이 '보편적 범죄'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리는 지표가 된다.
왜 남편은 아내를 살해할까?
그렇다면 왜 남편은 아내를 살해할까. 아내살해 사건 기사를 보면(2010년 기준), 남편들은 "술 마시지 말라"고 말한다고(2/22 울산), 잔소리 한다고(5/30 수원), 아내에게 신원미상의 문자가 왔다고(7/6 구미), 아파트 경비원과 식사했다고(7/21 용인) 아내를 살인했다. 또 아내가 성관계를 거부했다고(1/31 청주), 아내가 집에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로(12/30 춘천) 남편은 아내에게 칼을 들었다. 살인미수로 그쳤지만 더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사건이었다.
지난 2월, 서울 용산구에서 12년 만에 발견된 '박스에 쌓여있던 아내'를 살해한 남편의 살해 동기는 '이사 문제'였다. 경찰에 따르면, 1999년 6월 서울 광진구 화양동 인근에서 살던 이씨는 용산구 후암동 다가구주택으로 이사하기 전날 부인 윤씨를 살해했다. 이씨는 "아내가 이사를 가지 않겠다고 버텨서 부부 싸움을 하다가 화가 나 부엌에 있던 과도로 목을 찔렀다"고 진술했단다.
그런데, 어떻게 남편은 아내를 살인까지 할 수 있었을까. 제이콥슨(Jacobson,1994)은 갈등 상황에서 갈등이 폭력적으로 상승하는데에는 성별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여자의 가해행동은 상대방의 폭력에 대한 대응으로 행사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남성은 '자가-상승'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보고한다. "분노의 자가 상승"이란 쉽게 말해 남편들의 분노 폭발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남편 뜻대로라는 말이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3년에 걸쳐 면접상담에 응해준 319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남편이 아내에게 말하는 폭력의 이유는 "남편을 무시해서"(37.5%)라거나 "남편한테 말대꾸해서"(34.2%) 였다. 남편들은 갈등상황에서 아내의 다른 의사표현을 남성 권위에 대한 훼손으로 판단하고 분노한다.
'부부'는 어떤 관계보다도 빈번히, 일상적으로 갈등상황에 노출된다. 앞서 살해된 여성의 경우처럼 이사를 가고 안 가고의 문제가 생기거나 남편이 요구보다 늦게 귀가하는 일도 빈번하게 생길 수 있다. "술 마시지 말라"거나 "오늘은 피곤하니 그냥 자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일상적인 상황을 자신(남편)에 대한 무시와 손상으로 인지할 때 폭력이 시작되며, 남편이 시작한 폭력은(분노는) 아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아내 폭력이 아내 살해의 위험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분노가 폭발하는 동기(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가 동일하고 폭발하는 분노가 남편의 자가발전 형태라면 폭력상황에서 아내의 죽고 사는 문제는 남편에게 달려있다. 결국 폭력과 살인은 아내들에게 종이 한 장 차이로 결정된다.
아니타 킬리(2009)의 애니메이션 <앵그리맨>에서 남편은 "화나지 않았는데 화났다고 하지마"라며, 숨죽이고 있는 아내와 아이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된 아내들은 남편의 폭발을 막기 위해 남편의 심기를 '건드리지'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남편의 불편한 심기는 아내의 노력과 무관하게 진행된다.
결혼 3개월 이내 폭력 시작 1위...임신 중에 '폭력도'
외과의사의 만삭아내 사망사건을 접하며 많은 사람들이 "설마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신혼부부가, 그것도 임신 중인 아내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상상은 한국 사회에서는 금기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사건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알려져 있듯이 가정폭력의 절반 이상이 결혼 이후 1년 미만의 기간에 시작되며 임신 중일 때에도 예외 없이 폭력은 일어난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3년간 면접상담 설문지를 분석한 결과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분석 결과에 의하면 폭력이 시작된 시기는 결혼 전이 13.7%, 1년 이내가 50.0%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경우 전체 임신한 여성의 15~20%가 신체적인 학대를 받는다고 보고되며,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연구팀(2008)은 뉴질랜드 임신한 여성의 10%가 폭력을 경험한다고 보고한다. 한국의 상황은 공식통계로 집계되지 않았지만, 가정폭력 피해자의 25~45%는 임신 중에도 폭력을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구보다도, 나는, 우리는, 그 외과의사 남편이 만삭 아내를 살해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적어도" 5일에 한명 꼴로 아내살해가 일어나고 있고, 약 60%의 아내폭력이 신혼 초에 일어나고 있는데다가, 임신 중이라 하더라도 폭력의 예외가 될 수 없음을 통계가 뒷받침하며, 통상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이유 또한 "홧김에"라고 밝혀진 상황에서 어떤 희박한 가능성을 붙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표창원 경찰대학교 교수는 "가정폭력 사건이야말로 강력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범죄"라고 말한다. 가정폭력은 흔히 사람들 사이에서 "부부싸움"으로 축소·왜곡되지만 실상 이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누구하나 죽어야 끝나는 '가정폭력'인 것이다.
전체 살인의 24.9%는 가족내에서 일어나
죽음의 위협을 느낀 여성들 중 일부는 남편의 위협과 감시에도, 용감하게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경찰은 딱히 죽일 이유가 없는 이들 '부부싸움'에 개입하지 않고 돌아간다. 이러한 경찰의 미온적인 대처는 남편이 아내에게 충분히 분노할 수 있는(나아가 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안전하다고 믿어지는 가정은 결코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전체 살인의 24.9%는 가족내에서 일어난다(형사정책연구원, 2002).
이런 상황에서 검찰과 경찰공무원 정규과정에서 '양성평등 인권교육' 실시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고무적이다. 경찰과 검찰의 이런 노력과 함께 폭력적인 일상을 살고 있는 아내들도 숨죽이고 참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참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다른 삶에 대한 기회와 꿈에 대한 포기다. 출동하지 않거나 집안일이라며 돌아간다 할지라도 경찰에 신고하고, 침묵하지 말고 주변에 알려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이 외침에 누구든 응답해야 한다. 경찰과 검찰, 이웃, 가족, 친구들이라면 "참고 살라"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호소하는 사람의 고통을 섣부르게 재단하지 말고 힘겨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아무도 고통에 응답하지 않고 집안일이라며 외면한다면, 그 고립감과 막막함을 안고 살 것이 아니라 여성단체와 여성폭력상담소를 찾아야 한다(www.hotline.or.kr).
'만삭 의사부인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단순히 남편이냐 아니냐에 대한 관심을 넘어 가정폭력의 일상성과 그 심각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길 바라본다. 가십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집안일이 아닌 강력 범죄로 규정될 때, 남의 일이 아닌 나와 내 이웃의 문제로 관심을 키울 때, 살해되는 여성(아내)가 없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