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라. 그래야 채울 수 있나니."
"누군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보라."
알 듯 모를 듯, 쉬운 듯 어렵게 들리는 이런 말. 듣기는 여러 번이지만 따라해 보려면 무척 낯선, 마치 오랜 수도자들이나 가능할 것 같은 삶의 태도. 늘 저만치 멀리 있는 것 같았다.
기(氣), 도(道), 선(禪), 그리고 명상(冥想). 예전에 비해 이런 종류의 글귀를 훨씬 더 자주 만나게 되지만, 그 깊이를 가늠해보겠다든가 그 참맛을 느끼고 싶다든가 해서 직접 도전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우연히 명상을 체험할 일이 생겼다. 진양호 어느 기슭에서 귀한 분을 모시고 보름달이 뜨는 시간에 맞춰 '달빛명상'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아, 이번에야말로 맛이라도 좀 보리라' 마음먹고는 지난 토요일(3월 19일), 그곳으로 달려갔다.
사천시 곤명면 신흥리. 1001번 지방도에서 잠깐 비켜 들어간 곳에 고즈넉한 한옥집이 놓여 있었다. 이름은 명가원. 평소에도 몸과 마음을 쉬어가고픈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란다.
오후 5시. 달을 보기엔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사천뿐 아니라 고성과 산청, 하동, 그리고 멀리 거제에서 찾아온 사람도 있다니, 참 놀라웠다. 드물게라도 아는 얼굴이 보여 자리가 덜 낯설었다.
'누가 오늘의 명상을 이끌 선생님일까?' 이런 궁금증으로 주위를 살피니 스님도 보이고, 머리와 수염을 기른 이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차림새와 낌새만으론 누가 고수인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였을 즈음, 주인장이 먼저 저녁식사를 권했다. 야채와 곡물로만 차려진 정갈한 밥상. 맛있는 음식과 차가 있으니 모르는 사람과도 쉬이 말문이 트였다. 그렇다고 넘침은 없었다.
산과 들에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비로소 실내로 자리를 옮겼다. 조용한 음악이 깔리고, 일찌감치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사람들이 있어 내 행동도 따라 조심스러웠다. 침을 꼴깍 넘기기도 부담스런 판에 카메라 셔터 누르기는 더 큰 고역이었다.
'명상은 꼭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에서 해야 하나?' 마음속에서 잠시 이런 항의가 솟을 즈음, 오늘의 명상 선생님이 등장. 그는 바깥에서부터 유독 눈에 띈 사람이었다. 가끔씩 느린 영상을 보는 것처럼, 정말 '아주 느리게' 행동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윤열 선생. 고성에서 한우리회를 이끌고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는 먼저 달빛명상 참가자 전원에게 준비해온 무언가를 하나씩 나눠줬다. 글인 듯 그림인 듯 알쏭달쏭한 그 무늬는 저마다가 생각을 모으는데 도움을 줄 거라 했다.
그리고는 왜 우리가 명상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이었다.
"자기 자신 속에는 온 우주의 역사가 담겨 있으니, 자신은 곧 우주의 가장 진화된 모습이다. 따라서 자신을 올바르게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명상은 이 '참'을 찾아가는 하나의 도구이며, 어쩌면 종교나 예술도 그와 같다. 참을 찾아 나아가는 과정이 '영적진화'인데, 여기서 말하는 진화는 '나아가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화해가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억에 가장 남는 말은 이것이다.
"정리정돈을 잘 하라!"
이 말이 귀에 쏙 들어온 까닭은 아마도 나의 부족함 때문일 게다. 내 주변의 모든 것에 기운이 있고, 그 모든 것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설명. 별로 낯선 말이 아닌데, 이를 '정리정돈'과 연결시켜 생각해보진 않았던 것 같다. '이참에 작은 변화를 이끌어 보리라' 마음먹는다.
이어 실제 명상에 잠기는 시간. 밤사이 비가 내릴 것이란 예보가 맞아떨어지려는지 보름달은 얼굴을 감췄다.
'달이 뵈지 않는다고 달이 없다 할 순 없겠으나, 달빛명상이란 이름을 생각하니 조금 아쉽네.' 이런 생각을 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은은한 대금 연주가 몸과 마음에 평안을 주는 듯했다.
사실 '명상' 하면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흔히 "아무 생각을 하지 마라"고들 하는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이던가.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리 자르려 해도, 마치 솟아나는 샘물처럼 막기가 어렵지 않던가.
그런데 다행이었다. 이윤열 선생은 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 그저 그 생각을 쭉 따라가라고 하니 마음이 편했다.
스무 명 남짓 저마다의 자세는 달랐는데, 나는 선생의 조언대로, 선생이 준 종이를 펼쳐놓고 불을 쬐듯 손을 벌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 내 의식을 쫓았다.
그랬더니 곧 손끝이 조금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아차, 좀 전 쉬는 시간에 전화기를 켰다가 끄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얼른 스쳤다. 그래서 전화기를 꺼내 껐다. 이번엔 '이 명상체험을 기사로 만들려면 사진이 필요한데..' 하는 생각이 끼어들었다. 다시 눈을 뜨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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