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참 자극적인 제목이다. 국권이 기울어가는 시기 일본 칼잡이들에 의해 참혹하게 죽었다는 점에서, 왕조 사회에서 왕비라는 지위가 국모와 동일시되던 관념이 겹쳐지면서 명성황후는 그 어떤 독립투사 못지않은 존경의 대상으로 격상 되었다. 명성황후가 등장하는 뮤지컬이나 영화, 드라마 등이 이런 이미지 형성에 지대한 공을 세웠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젠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는 소설까지 등장했다.

겉그림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
겉그림<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 ⓒ 작가와 비평
픽션을 바탕으로 하는 소설이 꼭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반영해야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을 경우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잘못된 역사 소설은 대중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도 마찬가지다.

<명성황후는 시해당하지 않았다>는 제목처럼 시해 여부를 가지고 딴지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본다면 '에조 보고서'가 3류 소설만도 못한 증거일 수도 있고, 시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다 다른 점이라든가, 국장을 2년간이나 미루었던 점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쓴 소설 속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서 상당히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 대목을 뽑아 살펴보자.

"기껏 개화를 한다는 것들이 새로운 상전 일본을 모시는 것이었습니까? 청나라에 조공하는 것은 사대고 일본을 등에 업는 것은 사대가 아니라 자주랍디까?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우리나라의 힘으로 무엇을 해볼 생각은 왜 못하는 것인지 마음이 저립니다. 이렇게 일이 벌어졌으니 또 청나라에 기대는 겁니까? 결국 우리끼리 싸움하느라고 외세가 우리 틈바구니로 들어오는 길을 자꾸 열어주는 꼴이 아닙니까?" (책 속에서)

갑신정변 직후 민비가 고종 앞에서 쏟아낸 말이다. 갑신정변 주도 세력이 개화를 내세우면서 청에 대한 사대를 비판하지만 개화파가 하는 행위 또한 사대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비판한다. 도대체 우리 힘으로 무엇을 해볼 생각은 왜 못 하느냐고, 우리끼리 싸움하면서 외세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게 아니냐고 항변한다.

갑신정변은 어떤 배경 속에서 일어났을까.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발해서 구식 군인들과 도시 빈민들을 중심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군란의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일시적으로 집권했지만 청 군대가 개입하면서 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갔다.

임오군란 이후 청군은 광화문에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는 깃발을 내걸었다. 사실상 조선을 식민지로 규정한 것이다. 이후 청의 간섭은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실과 온건 개화세력은 청의 간섭을 수용하려 했고, 청의 간섭에 반발했던 급진 개화 세력은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정변 과정에서 급진개화파가 일본에 의존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을 사실상 속방 취급을 하고 노골적 간섭을 서슴지 않던 청의 행위를 수용하려 했던 왕실과 온건 개화 세력의 모습은 자주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고종도 민비도 청의 간섭 앞에서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 세력이 추구했던 갑신정변은 최초의 근대 국가를 추구했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물론 토지 개혁 등의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던 한계는 있었지만 입헌군주제 추구, 문벌 폐지 등의 혁신적 개혁안을 담고 있었다. 고종과 민비가 급진 개화파보다는 청이라는 외세에 의존하려 했던 이유는 백성과 나라를 위한 게 아니었다. 급진 개화파가 추구했던 입헌군주제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꼭 이루어야 했던 게 무엇이었을까. 자주적 근대 국가 수립이었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 자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수많은 의병, 동학농민군, 의사, 열사들의 투쟁이 있었다.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해서 싸운 개화 지식인들과 애국계몽 세력이 있었다.

고종과 민비는 자주적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치열했던 투쟁에 어떤 힘을 실어주었을까. 청에 도움을 청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자 했다. 텐진조약을 구실로 일본군까지 들어와서 동학농민운동은 좌절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이에 격분해서 일어난 을미의병을 향해 해산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고종이었다. 갑신정변 후 개화세력을 몰아낸 것도, 독립협회를 해산시킨 것도 조선 왕실이었다.

조선 왕실은 자주적 근대 국가 수립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전과 다름없는 전제왕권이 유지되길 바랐을 뿐이다. 왕권을 제약하는 근대 국가가 수립되는 것보다는 외세에 의존해서라도 왕권이 유지되길 원했다. 나라 안에서 분출하던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치열한 운동을 억누르던 조선왕조를 외세라고 지키고 보호해줄 리가 없었다. 자주도 근대 국가 수립도 좌절된 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소설 전반에서 민비나 고종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하며 애태우고 눈물 흘리는 인물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청일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밤마다 전등을 켜놓고 광대들을 불러 놀게 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달라질 게 무엇이 있을까.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던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픽션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 소설이라도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명성황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