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3월 26일)에는 부산에 사는 장모님(85)을 뵙고 왔습니다. 볼일로 대구에 갔다가 오는 길에 들렀는데요. 잠깐 머물다 왔지만, 건강한 모습을 뵙고 용돈도 드리니까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열일곱에 10년 연상인 장인을 만나 예순이 넘도록 시어머니를 모셨고, 소작농에 식모살이도 마다하지 않았던 장모님. 뵐 때마다 채무자가 된 기분이 드는데요.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큰 사위가 어렵다며 저를 대하기조차 꺼렸던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들처럼, 옛날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십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시절부터 지금의 사생활까지, 묻지 않는 얘기도 해주시거든요. 어쩌다 불만을 터뜨릴 때는 죄송하게도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장모님은 자식들 학교에 보내느라 해마다 '장려 쌀'을 얻어야 했고, 빚을 갚느라 마음 편하게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일을 뼈 빠지게 했는데도 남들처럼 모아놓은 재산이 한 푼도 없다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면서도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장모님 용돈 챙기게 했던 처제의 전화
한 달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장모님을 15년째 모시고 있는 처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요, 장모님을 갑자기 병원 응급실로 모셨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듣던 아내도 얼굴이 창백해지더군요.
병명은 간경화(원인 미상).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딸도 몰라볼 정도로 혼수상태에 빠져 자정에 119를 호출해서 병원으로 모셨다고 말하는 처제 목소리도 잔뜩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저도 황당한 나머지 뭐라고 위로도 못하고 듣기만 했지요.
"형부, 혹시 엄마 영정사진 갖고 계신가요? 엄마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서 준비해놓으려고요···."
"응, 찾아봐야지. 옛날에 촬영한 가족사진에서 어머니(장모)만 잘라내서 보관해놓은 게 있으니까 확대하면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처제가 영정사진을 묻는 순간 입에서 "드디어 일을 당했구나!" 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오더군요. 놀란 가슴을 추스르면서 어렵게 통화를 마쳤습니다. 다음 날부터 계속 아내가 근무를 해야 하고 저도 선약이 있어서 곧장 부산으로 달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는데요. 머릿속에서는 흑백 영사기 필름 돌아가듯 지난 일들이 스쳐갔습니다. 부산에는 아내 쉬는 날 다녀오기로 의견을 모으고 이튿날 영정사진을 확대하러 시내에 나가려는데 처제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엄마가 사람도 몰라보고 눈 주위가 이상해서 돌아가시는 줄 알고 전화했는데요. 상태가 좋아져서 아침에 입원실로 옮겼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가 며칠 후면 퇴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네요. 영정 사진도 나현이 아빠(동서)하고 상의해서 여기에서 준비할게요."
처제 전화를 받고 조금은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뵙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더군요. 돌아가시기 전에 비상금이라도 털어 용돈을 드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요. 그런데 아내가 시간이 없다며 혼자 다녀오는 바람에 전화로만 안부를 묻다가 지난 주말에야 다녀왔습니다.
"먼 돈을 이르케 많이 준댜, 자네도 필요헐 턴디!"
토요일 오후 2시쯤 구포역에 도착해서 처제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외손녀(다현이)와 TV를 시청하던 장모님이 깜짝 놀라면서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객지에서 살다가 10년 만에 찾아온 친정동생 대하듯 하더군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안부부터 물었는데요. 옆에 있던 다현이가 "할머니 요즘 무척 건강해지셨어요"라고 해서 마음이 놓이더군요. 장모님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최근 근황을 거침없이 털어놓았습니다.
"건강허기는 혀도 어디 나댕기지도 못허구 이르케 육장 앉어만 있어. 하루 점드락 있어야 누구랑 얘기헐 사람도 없구, 헐 말도 없구, 나가기도 싫구, 그려서 야네 엄마랑 아빠랑 퇴근혀서 오드락 알어듣지도 못허는 TV만 보고 있당게. 교회도 지난 주일에 한 번 댕겨왔어···."
어리광 부리듯 하는 말씀이 푸념인지, 하소연인지, 반가워서 하는 얘기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는데요. 들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푸념이든, 하소연이든 어르신 말씀을 경청하는 게 최고의 대화이고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장모님 말씀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똥 쌀까 봐서 밥도 하루에 한 번밖에 먹지 않는다", "모두가 귀찮아서 냉장고 문을 열기도 싫다", "그래도 손녀들은 나를 기막히게 안다"는 등 묻지 않은 얘기도 하셨는데요. 우선 정신이 맑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움직이면서 밖에도 나가고 하셔야지요."
"잘 움직이도 못허는 나 땜이 야네 엄마(처제)랑 아빠가 욕봐. 어디 나갈라믄 손잡고 나가고. 오늘도 병원에 갔다 오다가 야네 엄마가 짬뽕 한 그릇 사줘서 맛있게 먹었어. 근디 짬봉이 6천 원이랴, 거 굉장히 비싸데···."
짬뽕 얘기가 끝나는 순간 지갑에서 10만 원을 꺼내 장모님에게 드렸습니다. 잘나가는 사장님들에겐 한자리 식대도 안 되는 금액이지만, 용돈이 포함된 생활비를 한 달에 25만 원씩 받는 저에게는 거금이지요. 자장면 한 그릇 사 먹는 것도 고민할 정도로 짠돌이짓을 해가면서 넉 달 동안 모은 돈이니까요.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지고 계시다가 짬뽕이랑 잡채밥이랑 드시고 싶으면 다현이에게 불러달라고 해서 잡수세요."
"하이고, 생활비를 쪼꼼씩 타서 쓰닝게 맨날 부족헐 틴디, 먼 돈을 이르케 많이 준댜, 자네도 필요헐 턴디!"
"아뇨. 저도 쓰고 남은 돈 조금씩 모았다가 드리는 것이니까 부족하지 않습니다. 염려 마시고 다현이랑 맛있는 거 잡수세요."
"모아논 돈이라고 혀도 그렇지, 만 원이나 2만 원만 줘도 충분헌디, 하여간 주는 것잉게 고맙게 받기는 허는디, 미안혀서 어치게 헌댜···."
장모님은 생각지 않은 용돈을 받았으니 두고두고 쓰겠다며 흡족해했습니다. 제가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더군요. 저녁 7시 버스를 타야겠기에 밥도 먹지 못하고 아파트를 나섰는데요, 오래된 빚을 갚은 사람처럼 마음이 가볍고 상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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