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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닐라 캐존시티에 위치한 아시안브릿지 필리핀 센터.
마닐라 캐존시티에 위치한 아시안브릿지 필리핀 센터. ⓒ 이명주

3월 15일

여기는 마닐라 캐존시티(Quezon City). 전날 저녁 마닐라 공항에 도착해 '아시안 브릿지' 를 찾아 왔다. 아시안 브릿지는 2004년 2월 YMCA, 녹색연합, 여성민우회, 아름다운가게 등 한국 시민사회단체들이 설립하여 아시아 지역 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비정부단체(NGO)다.

원래는 위치 확인 후 며칠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들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물어물어 택시가 당도한 곳은 가정집과 사무실을 겸한 본 건물이 있는 주택가 한가운데. 얼결에 어학연수 중 뭐든 돕고 싶다는 취지의 메일을 보낸 바 있는 성혁수(37) 사무국장과 조우했고, 사회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건물 내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청했다. 

 슈퍼를 가거나 산책을 나섰다 매번 이 지점에서 길을 잃었다. 여기서 한 블록 더 가서 우측으로 돌면 나의 새 보금자리가 나온다.
슈퍼를 가거나 산책을 나섰다 매번 이 지점에서 길을 잃었다. 여기서 한 블록 더 가서 우측으로 돌면 나의 새 보금자리가 나온다. ⓒ 이명주
날이 밝아 아침식사를 하고 얼마간 살 집을 구하러 나섰다. 그저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뿐 아직은 구체적인 안이 없으므로 어학을 병행하며 혼자 지낼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건너편 이웃집에 'Room for Rent' 간판이 보였다. 침대와 옷장, TV가 갖춰진 깔끔한 원룸으로 월세도 예상가 5000페소(한화 약 13만 원)와 일치했다.

자, 이제 새 보금자리도 생겼고 필리핀 생활 제 2막 돌입이다. 옳지 않은 일에 간접적으로나마 기여하지 않고, '현장'에서 보다 가치있는 일을 하고 싶은 내 바람이 이곳에서 어떻게 이뤄져갈 지 궁금하다.  

3월 23일

마닐라에 온 지 한 주가 넘었다. 그간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단지 입구에서 내 집까지 길을 잃지 않고(이름만 다른 거의 유사한 골목들이 견출지처럼 구획져 있는데다 본인은 '선천성 악성' 길치다) 찾아올 수 있게 됐으며, 근처 한국 식당과 슈퍼,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현지 식료품 가게와 노상의 계란장수와 얼굴을 익혔다. 

 어느새 오가며 웃음을 나누게 된 계란장수 할머니.
어느새 오가며 웃음을 나누게 된 계란장수 할머니. ⓒ 이명주
이웃이 된 아시안브릿지에서는 오후 몇 시간 인터넷을 빌려 쓰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원활동의 경우, 어떤 직책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을 스스로 고민해 제시해야 하므로 당장 의미있는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곳의 유일한 한국인인, 첫날 만난 성 사무국장에 간간히 현지 사정을 묻고 조언을 구하고 있다. 

스스로 택한 새 삶에 고무되어 있지만 한편으로 고독의 무게가 버겁다. 13년 홀로 서울생활을 했고, 이어 한 해를 온전히 혼자 떠돌았는데 3개월간의 어학원 생활이 지난 세월 굳은 살을 지워버린 듯하다. 고독에 익숙해질 순 있어도 내 본성이 그보다 따뜻하고 덜 고된 것을 원했음을 확인한다. 동시에 한국에 있는 가족보다 불과 몇 달을 함께 한 벗들이 더욱 그리운 것이 아이러니하다.

4월 4일

드디어 첫 자원활동. 지난 주말(2~3일) 아시안브릿지에서 진행하는 'UPSAI 강사 양성' 프로그램에 비디오그래퍼로 참여했다. 다소 거창하게 들리지만 주최 측에서 준비해둔 가정용 비디오로 참가자들의 활동 영상을 찍는 단순한 일이었다. 필리핀 표준어인 따갈로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훈련생들의 표정과 서로간의 호응에서 흐름을 인지할 수 있었다.     

13명의 현지인 참가자들은 UPSAI(Urban Poor Southville Association Inc ; 사우스빌 도시빈민연합) 회원들로 '성(性)인지 훈련(Gender Sensitivity 이하 GS)', '여성·아이 반(反)폭력(Anti-Violence against Women and Children 이하 VAWC), '생명샘 건강(Reproductive Health), '재무 지식(Financial Literacy)' 네 주제 중 각각 하나를 선택해 6주 일정의 훈련을 받아왔다.  

 아시안브릿지의 강사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한 13명의 UPSAI 회원들.
아시안브릿지의 강사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한 13명의 UPSAI 회원들. ⓒ 이명주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참여자 개인은 물론,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가 그곳에 필요한 의식 변화와 실천을 이끌어내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육성하는 것이다. VAWC를 선택한 크리스(Cris·교사)씨는 "가정폭력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로 고통받는 나의 학생들을 돕고 싶었다. 내 가족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내가 배운 지식과 경험을 공유해 한 여학생을 도울 수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이 운동을 해나갈 것이다"라고 했다.  

GS 강의시간에는 발제자가 피임약 복용법을 설명하며 수줍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VAWC와 관련해 조별로 가정폭력을 재현할 때도 매우 심각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훈련생 모두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청소년 학예회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참가자들이 주제의 심각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러한 인식이 성인이 된 그들에게 여전히 생소하며, 무엇보다 건전한 교육의 장(場) 자체가 그들을 들뜨게 하는 듯했다.   

UPSAI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면 이들은 한국의 해외공적개발원조(ODA)로 진행된 철도사업으로 하루아침에 삶터를 잃은 도시빈민들의 자치조직이다. 당시 '비자발적'으로 쫓겨난 이주민이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했다. 즉시적으로 '용산 참사'가 떠올랐다. 함께 점심을 먹던 한 회원은 "한국 정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노기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정확히 알고 있는 사안이 아니라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이번 만남을 기회로 이 사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알아볼 참이다.


 피임약 복용법을 설명하며 수줍어하는 참여자
피임약 복용법을 설명하며 수줍어하는 참여자 ⓒ 이명주

덧붙이는 글 | 홀로 꿈을 좇는 여정에 매력적인 벗들과 멘토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twitter ID : sindart77 / facebook ID : bittersweet835)



#아시안브릿지#UPSAI#도시빈민#ODA# 마닐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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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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