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지도부가 또 철지난 색깔공세를 펼쳤다.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에 따른 국민들의 방사능 공포가 '불안감을 조성해 국가 전복을 획책하는 불순세력' 탓이란다.
처음엔 방사능에 오염된 어패류 전복(全鰒) 얘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전복이 아니고 사회체제나 정권을 뒤집어엎는다는 그 전복(顚覆)이란다. 생뚱맞다. 지금은 '국가체제 전복'을 걱정할 때가 아니고, '방사능 오염 전복'을 걱정할 때인데 말이다.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일본 원전 사태 대책을 위한 당정협의에서 김무성 원내대표가 정부에게 '주문'한 내용이다.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불순 세력이 있다. TV 뉴스 보니 경기도는 오늘 모두 휴교령을 내리고 서울시는 야외 수업을 예정대로 하는 것에 대해 학부모가 반대해 야외수업 중단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사회를 뒤흔들려는 불순분자들의 책동에 의해 혼란이 생긴 것이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세력들을 막아내야 한다."
한나라당 색깔론은 62년 미국 '매카시즘의 광기'와 판박이
김 대표는 이어진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도 "오늘 일간지 보도를 봤지만 과거 광우병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들인 49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일본 대지진, 핵사고 피해 지원 정책전환 위한 공동대응'이라는 단체가 휴교령을 내리라고 하고, 좌파 교육감들이 휴교령을 내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불순한 행동을 하는 일에 대해 당당히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재철 정책위의장 역시 언론이 "국민들에게 패닉을 조장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특히 TV방송을 겨냥해 "톱뉴스로 전국에 방사능 비가 내렸다고 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다음 맨 마지막에 인체에 무해하다고 보도하고 있다"면서 "결국 그러다보니 수산 시장이 죽고, 식당도 죽고, 경제가 좋지 않을 때, 재보선과 내년 총선에서 우리가 피해를 본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낡은 레코드판'을 틀 때는 그만한 사정이 있어서다. 대개 선거를 앞두거나 돌아가는 판세가 불리할 때다. 여론의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보수세력의 단결을 호소하기 위해 색깔론 공세를 펴는 것이다. 왜? 투표율이 낮은 재보궐선거는 '우리 편'을 투표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가 전복'이라면 쌍심지를 켜는 '어버이'들을 투표장에 끌어내는 데는 '색깔론'만한 것이 없다는 계산에서다.
2011년 봄 서울에서 벌어진 방사능 공포에 대한 색깔 공세는 49년 전인 1962년 미국에서 현대 환경운동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저서로 꼽히는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 출간되었을 때 미국 사회가 보인 '매카시즘의 광기'와 판박이다. 레이첼 루이즈 카슨(Rachel Louise Carson, 1907 ~ 1964)은 이 책에서 선별적으로 '해충'을 박멸할 수 있다는 과학의 오만이 자연생태계를 어떻게 교란시켰는지를 관찰해 치명적인 살충제(DDT) 사용과 미국 화학산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자 DDT 제조사들은 출판사와 카슨을 고소하겠다고 협박했으며, 그 회사들에서 연구 보조금을 받은 대학 교수들은 박사학위 없는 카슨을 공격하는 글을 발표했다. 심지어 당시 미국 농무부장관은 대통령에게 "카슨이 서구 자본주의를 파멸시키려는 공산주의자인 것 같다"는 편지를 썼으며, 살충제 연구는 적을 이롭게 하려는 간첩행위라는 모함을 받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풍요의 시대를 누리던 미국 사회에 찬물 끼얹은 <침묵의 봄>
"카슨의 <침묵의 봄>은 발간 즉시 화학산업계의 거센 반발과 동료과학계의 냉소적 비난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5년에 걸친 카슨의 조사결과는 핵무기로 적(일본 제국-기자주)을 쉽게 박멸한 뒤 전후(戰後)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바야흐로 풍요의 시대를 구가하던 미국 사회에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군수산업체의 특수를 낳았고, 이제 산업계와 과학계는 어떻게 결탁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속적인 전쟁특수 효과를 위해 정치권은 매카시즘의 광기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순응주의가 결합된 이 도도한 '침묵의 시대'에 카슨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박혜영, <침묵의 봄>과 카슨의 시적 감수성, <녹색평론> 제100호)
갖은 모략과 언어 폭력 속에서 카슨은 이태 뒤에 암으로 쓸쓸하게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외로운 투쟁을 계기로 1969년 닉슨 대통령은 환경보호법안에 서명했고 미국환경보호청(EPA)이 발족했다. 이듬해엔 '지구의 날'(Earth Day, 4월 22일)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그 이태 뒤에 미국 내에서 DDT 사용이 전면 금지됐다.
살충제와 핵무기 혹은 핵의 평화적 이용인 원자력 발전(원전)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러나 일단 대기중이나 토양에 투하되거나 유출되면 독성 물질이나 방사능 오염이 반복적으로 생태계 순환을 교란시킨다는 점에서 작동방식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원자력을 '제3의 불'이라고 한다. 인류는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훔쳐왔다는 최초의 불과, 제2의 불 전기에 이어 핵분열에 의한 제3의 불과 함께 문명을 누려왔다. 그러나 인류는 제3의 불을 붙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불을 안전하게 끌 수 있는 방법을 아직 알지 못한다. 또 불행하게도 인류는 아직 사용후핵연료(폐연료봉)를 포함한 고준위 핵폐기물을 완전하게 처분해본 경험이 없다.
인류 최대의 자연재해와 아직 '보이지 않는' 방사능 피해
제3의 불에 수반되는 방사능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색깔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맛을 느낄 수도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엄습할지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은 공포를 더 극대화시킨다. 그 '보이지 않는 적'은 소리 없이 다가와 모든 생명체의 오장육부를 녹이고, 장기적으로는 DNA 구조를 뒤바꿔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생존본능은 원초적 본능이다. 전문가들은 옷에 방사성 물질이 묻으면 먼지 털 듯 툭툭 털면 된다고 말하지만, 일본 도쿄에서도 서울에서도 마스크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또 국무총리는 국회에 출석해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성 물질이 포함된 비를 맞아도 된다고 답변했지만, 환경부장관은 지방자치단체와 상수도사업자들에게 노천 정수시설을 빗물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덮개 등을 설치하라고 긴급지시해 이들은 정수장을 비닐로 덮어씌웠다.
이런 상황에서 편의점의 마스크가 동나고 평소에 비가 올 때보다 우산이 7배나 더 팔려나난 것은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피해의식과 생존본능이 작동한 결과일 뿐이다. 결국 국민에게 불안감과 패닉을 조장한 것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지 한 달이 지나도록 무대책과 안일함으로 일관한 정부의 늑장대응과 혼선이고 그에 대한 불신이지 '무지한 국민과 언론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사실 총체적 불신은 이미 예고돼 있었다. 3월 28일 <동아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원전 사고에 따른 방사성 물질 누출과 관련, '우리나라는 안전하다'는 정부 발표에 대해 94.1%가 '안전하지 않다'고 극한 불신을 나타낸 반면에 '정부 발표대로 안전하다'는 답은 5.9%에 불과했다. 또 우리나라 원전의 안전성에 대해서도 원자력 전문가는 20명 중 18명이 '안전하다'고 답했지만, 국민의 43.2%는 '안전하지 않다'고 답해 '안전하다'는 사람(22.4%)보다 2배 가까이 많았다.
미국 여론도 바뀌었다...신규원전 찬성 57%에서 43%로 뚝
한나라당 지도부가 모르는 게 또 있다. 매카시즘의 본바닥이자 보수우파가 그토록 섬기는 미국의 국민 여론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시각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후변화행동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CBS 방송이 지난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미국 성인남녀 10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2008년 7월 57%에 달했던 원전 건설 찬성여론이 14%나 감소한 43%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 최초이자 최대의 방사능 유출사고인 펜실베이니아 주 스리마일 섬(Three Mile Island, TMI) 원전 사고 직후 조사된 46%에 비해서도 3% 가량 낮은 것이다.
TMI 원전 사고의 경우, 사망자도 없었고 일부 원전 근무자를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방사선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는 미국 내에서 원전에 대한 불신여론을 고조시켜 신규 원전건설을 오랫동안 중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77년 7월 당시 70%에 육박한 원전 찬성 여론은 TMI 원전 사고 직후인 79년 4월 조사에서 20% 이상 떨어진 46%로 나타났다.
미국에서 지난 30여 년간 원전 건설 찬성 여론이 가장 낮았던 때는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로 당시 34%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반대 여론은 거의 60%에 달했다. 그러나 체르노빌 사고 이후 지난 25년 동안 대형 원전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가운데, 원전이 지구 온난화를 유발하는 화석연료의 대안 에너지로 부각되면서 미국의 신규 원전 건설에 대한 찬성 여론은 다시 57%까지 올라갔다.
미국은 전세계에서 가동중인 발전용 원자로(442기)의 23.5%를 차지하는 104기를 가동중인 세계 최대 원전 대국이다. 그러나 국토 면적이 광활한 미국은 유럽에 비해 원전 밀집도가 낮고. 총발전량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의존율(19.6%)이 낮아서 미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유럽인들보다 원전 건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따라서 태평양을 사이에 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미국인의 원전 찬성 여론이 43%까지 떨어진 것은 중요한 변화로 읽힌다.
민심의 흐름 읽지 못하는 '꼴통보수' 한나라당
하물며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에서 일본 원전 사고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상적이고 당연한 인식의 결과이다. 이를테면 지난 1일 <내일신문>-디오피니언 안부근연구소 4월 정례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부의 동해안 원전 신규건설 추진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34.3%에 불과한 반면, 반대의견은 60.5%로 2배 가까이 됐다.
여론조사에서 제시된 문항은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방안이므로 신규건설을 추진해야 한다'와 '일본 원자력 발전소 폭발로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었으므로 신규건설을 보류해야 한다'였다(전국의 19세 이상 남녀 유권자 800명 대상, 전화면접 방식 조사로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5%p)
또 앞서 인용한 창간 91주년 기념 <동아일보> 여론조사에서도 2030년까지 원전 10기를 추가 건설한다는 정부 계획에 대해 '최고 수준의 안전성을 확보해 정부의 계획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49.3%)이 절반 가까이 되었지만,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우므로 추가건설은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42.9%) 또한 만만치 않았다(모름, 무응답은 7.8%).
결국 국민 100명 가운데 적게는 43명(42.9%%), 많게는 61명(60.5%)이 신규 원전을 반대하고, 무려 94명(94.1%)가 안전성을 불신하는 데도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들을 '국가 전복을 획책하는 불순세력'의 책동에 놀아나는 바보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민심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한나라당 일부 지도부가 여전히 '꼴통보수'로 불리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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