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대구는 전쟁터가 아니었다. 따라서 전쟁의 흔적을 기념할 만한 역사유적은 애당초 있을 수가 없다.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났고 정부가 7월 16일 대구로 내려왔으니 대구는 그저 수용소 정도였다.
각급 학교를 비롯한 여러 시설들은 군 기관에 전용되었고, 밀려온 피난민들로 대구는 도로까지 몽땅 발 디딜 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7월 21일에는 계성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북의 침략을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열렸다. 1954년 10월 31일에는 이 학교 교정에서 2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지금 계성학교 교정에는 그곳에서 2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두려는 뜻에서 '2군 창설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전쟁을 증언해주는 그 이외의 역사유적은 없다. 개교 105년을 넘긴 전통 사학 계성학교를 동족상잔 전쟁의 역사유적지라고 지칭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전쟁 동안 대구 시내에 박격포탄 3발 떨어진 적이 있다. 만약 이 박격포탄들이 지금 남아 있다면 그런대로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전쟁 당시 대구 최대의 위기를 잘 말해주는 증거물이 될 만하기 때문이다. 팔공산이 북한군에게 넘어가면서 대구 시내 중구의 태평로 판자촌에 박격포탄 3발이 떨어진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정부는 부산으로 내려갔고 시민들에게 소개령이 선포되었으니(곧 취소되었다) 이만하면 그 3발의 포탄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명물이 될 법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태평로의 판자촌도 다 철거되고 없고, 포탄이 터진 자리가 보존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포탄들은 그 당시 이미 터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대구에서 전쟁의 유적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대구 시내는 아니지만 비교적 가까운 경북 왜관 다부동에 가면 전쟁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다부동에는 탱크 형태의 전적 기념관이 있고, 마을 뒤에는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지 중 한 곳이었던 유학산이 있다.
839m 높이의 유학산은 1950년 당시 3년에 걸친 전쟁 전체로 쳐도 1-2위를 다툴 만큼 치열한 격전지였다. 누가 유학산을 처지하느냐에 따라 대구를 (북)점령하느냐 (남)사수하느냐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육군사관학교편 <한국전쟁사 부도>에 나오는 '낙동강 방어선은 서북 첨단의 왜관을 기점으로 하여 북측면은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며, 서측면은 낙동강 본류를 따라 남강과의 합류 지점에 있는 남지읍에 도달하고…(그래서) 방어목적상 적의 진출을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최후의 저지선이자, 궁극적으로는 작전의 주도권을 탈취하여 전세를 역전시켜야 할 반격의 도약대로서 절대적 의의를 지녔던 (곳)'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또, 유학산 전투가 얼마나 처참했는지는 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다부동 전적 기념관이 방문객들에게 나눠주는 리플릿을 읽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1950년 8월 5일, 낙동강을 도하한 북한군은 주력인 제13사단, 3사단, 1사단, 15사단 등 군단 병력(2만1천여 명)을 다부동 일대에 투입해 호시탐탐 대구 점령을 노렸고, 백선엽 장군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27연대가 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200여 명의 병력으로 맞섰다. (중략) 8월 13일부터는 12일간 정상 주인이 15번이나 바뀌는 328고지(포남리)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던 837고지(학산리) 탈환전 등 55일간 전투가 계속된 다부동 전투는 6·25 전쟁 중에서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이 전투에서 적은 1만7500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아군도 1만여 명 희생되었다. (하략)
리플릿은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부터 26분 동안 B29 폭격기 98대가 출격해 폭탄 960톤을 왜관 서북방 67.2평방킬로미터 일대에 융단폭격을 가해 적진을 초토화시켰다'고 표현하고 있다. 대략 교실 한 칸 정도의 면적마다 2kg의 폭탄을 투하했다는 이야기이다. 또 'This bombing was recorded as the most enormous one since the World War ∐.'라는 표현도 보인다. 유학산과 왜관철교 일대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융단 폭격이 가해졌다는 말이다.
유학산 일대에서 남북 피차간에 약 3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날마다 주인이 바뀌었던 유학산이었으니 그만큼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그 탓에, 지금도 유학산에서는 전쟁 당시의 유골을 발굴하는 현역 병사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산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내용도 이 곳이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곳임을 잘 밝혀준다.
(전략) 유학산은 1950.6.25.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를 가장 치열하게 치른 곳이 바로 이 곳이다. 8-9월의 폭염 아래 수십여 차례의 피의 탈환전이 이곳 유학산 자락에서 벌어져 피아간에 수만 명을 헤아리는 젊고 고귀한 생명들의 희생을 가져왔고, 저 멀리 908호선 도로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함께 금무봉 전투, 자고산 전투 및 융단 폭격 등 조국 수호의 최후의 보루지였다.
'세상이 평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天下雖安 忘戰必危)라는 격언과 같이 이곳을 지난날 쓰라린 상흔이 점차 잊혀져 가는 유학산과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서 한국전쟁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안보 현장의 탐사 기회와 호국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 1999년 12월 칠곡군수
전적기념관 앞에 세워진 조지훈 시비의 '다부동에서'에는 '살아있던 사람이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고, 죽은 자도 산 자도 편안히 쉴 수 없는 땅'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만큼 다부동과 유학산은 처참한 비극의 땅이었다.
그러나 대구는 전쟁의 직접적 폭격은 피해갔으니 간고등어 냄새가 진동한 땅은 아니었다. 전쟁통의 피난처였으니 산 자도 편안히 쉴 수는 없는 땅이었겠지만, 대구에 전쟁의 유적이 없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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